2017년 5월 31일 수요일

“양극화와 편가르기 심각…한국 성취에 자신감 가져야”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 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모델로 평가받는 대한민국. 지난 70년의 현대사에는 크고 작은 굴곡들도 많았지만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과제를 달성하고 세계경제순위 11위의 경제대국을 이룩한 성과는 누가 봐도 눈 부실만 하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다툼의 양상은 이러한 성과를 부정할 만큼의 심각한 수준으로 번지고 있다. 이념과 성별, 경제적 격차, 남북 간 대립 등이 용광로처럼 끓고 있는 현재의 한반도를 한 발 떨어져 본다면 좀 더 냉정함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문학을 통해 한국을 알리고 있는 재미교포 작가 존 차(한국명 차학성.71)를 만나 최근 한반도 문제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그는 1960년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교포 1세대로 영어로 쓴 소설 『안녕, 테레사』(문학세계사)가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것을 기념해 잠시 귀국했다. 지난 1982년 뉴욕에서 살해당한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테레사 차(한국명 차학경)의 진범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은 자전적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테레사 차가 바로 그의 여동생이다. 테레사 차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뒤를 이을 차세대 예술가로 주목받았지만 32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존 차는 동생의 죽음 이후 글을 쓰기 시작했고, 한국 소설을 영어로 번역해 문예진흥원 번역상과 펜문학 번역상을 받았다. 지난 30년 간 구상·집필에 매달려 이번 소설을 완성했다고 한다. 1997년 한국으로 망명한 故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의 만남을 계기로 북한 인권과 통일을 위한 활동도 펼치고 있다. 만주 용정에서 태어나 서울과 부산에서 한국전쟁을 겪고 4.19 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그의 삶 자체가 한국의 현대사를 축약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에 대해 설명하려면 역사를 먼저 이해시켜야만 했다면서 현대사를 대변하고 있는 인물들을 다룬 자서전을 쓰고 있다고 했다. 과거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로 탈바꿈한 우리의 역사를 젊은 세대들이 좀 더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면 한다는 바람도 전했다.

만주에서 출생하셨다고요? 당시 배경을 설명해주신다면

나는 해방둥이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석 달 뒤 만주 용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실 원산 사람이었는데 당시 지주였던 할아버지가 일본인들에게 재산도 뺏기고 핍박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일본인들과 싸우다가 버틸 수 없어서 만주로 도망을 갔다. 어머니는 용정에서 태어나신 분이다. 두 분 다 만주에서 교사를 하셨다. 같은 학교에서 일하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쫓아다녀서 결혼까지 하게 됐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캐나다 선교사들이 만들었던 제창병원에서 행정을 담당했다. 당시 용정은 도시가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도 학교들이 많았다. 만주에서도 이른바 교육도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외부에서 유학을 많이 왔었다. 병원은 캐나다 선교사들이 했기 때문에 일본군도 들어올 수 없었다. 그래서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이 많이 다녀갔다. 당시는 배운 사람들은 다 독립운동 할 때였으니까 우리 외할아버지도 아마 관여하지 않았을까 싶다. 캐나다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할아버지에게 열쇠 뭉치를 줬는데 일본군들이 그걸뺐으려고 고문도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얘기니까 주로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으셨겠네요.

만주에 있었을 때의 이야기는 어머니로부터 나중에 전해 들었다. 제창병원 원장은 김영 씨라고 의사 출신 독립운동가인 김필순 씨의 아들이었다. 김영 씨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아버지가 거의 운영을 했다고 봐야한다. 당시 용정에는 윤동주 시인도 있었고,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 씨도 살았다. 어머니 얘기로는 윤동주 시인이 세 집 건너에 살았다고 한다. 정일권 총리는 어렸을 때 자전거를 타고 아침마다 신문 배달을 했다. 어머니의 오빠인 그러니까 외삼촌과 윤동주, 송명주 시인 셋이서 같이 술도 먹고 시도 쓰고 그랬다고 한다. 사랑방에서 담배를 피다가 할아버지한테 들켜서 야단을 맞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현대사 비극 속에 만주에서 서울로 목숨 건 남하 

해방이 된 후에는 어디로 가셨나요.

우리 식구들은 해방이 되고 6개월 뒤에 남하했다. 당시 만주 지역에 소련군이 들어왔는데 최초로 들어온 부대의 질이 굉장히 나빴다. 소련군 내에서도 제일 악질적이었다고 한다. 길거리를 떠돌던 부랑아들로 구성한 부대였기 때문에 군인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일본군을 친다고 내려왔는데 막상 약탈에 더 열을 올렸다. 뭐든지 보이는 것은 다 강탈했고, 여자들은 강간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안 되겠다 싶어 우리 가족도 남하하게 됐다. 일본 때문에 만주까지 쫓겨났는데 이번에는 소련 때문에 만주에서도 쫓겨난 셈이다.

두만강을 넘어 회령에서 기차를 타고 원산까지 왔다. 원산에서 다시 기차를 타기는 했지만 3.8선이 있기 때문에 기차로 넘지는 못했다. 결국 밤중에 한탄강을 몰래 건너기로 했다. 당시만 해도 소련이 지키고 있어서 월남자들을 총으로 쐈다. 어머니 얘기로는 한탄강을 건너다가 내가 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사람들이 애기를 물에 빠트리라고 얘기했다. 그것 때문에 물에 빠져 죽는 애들도 많았다. 어머니가 안 된다며 사람들하고 싸우는데 마침 내가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그래서 살아남았다. 그렇게 강을 건너서 버스를 타고 서울에 도착해서 처음 간 곳이 파고다 공원이다. 공원에 앉아서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나 망연자실했다고 한다.

당시 피난민들의 삶은 다들 어렵지 않았습니까. 

다행히 서울에 이모가 살고 있었다. 경복고등학교 교사셨는데 어떻게 하다 이모를 만나게 돼서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살게 됐다. 부모님은 만주에서도 교사를 했으니까 교사 자리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잘 안 됐다. 그러다 6.25가 발발했다. 우리는 그때도 미처 도망을 못 갔다. 사람들은 다 떠나고 그 기숙사에 남아있는 가족은 우리뿐이었다. 인민군들이 북한 출신을 찾을 때여서 아버지는 도망을 다니셨다. 그때 인민군들이 길거리의 어린 아이들한테 노래를 알려줬는데 나도 덩달아 배웠다.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배워 집에서 부르니 어머니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더라. 그리고 1.4후퇴 때 서울역에서 기차로 부산을 가는데 사나흘 정도 걸렸다. 지금은 두 시간 반이면 가는 거리지만 그때는 가다 서다 했다. 피난 생활을 생각하면  참 어려웠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피난민 새끼라고 해서 구박도 많이 많았다. 그때 방 한 칸에 두 식구가 살았는데 방 중간에 담이라고 이불을 걸어놓고 저쪽에 한 식구 이쪽에 우리 식구가 잠을 잤다. 그렇게 좁은 방에서 동생 학경이가 태어났다. 다음에는 송도로 이사를 가서 초가집을 하나 얻고 살았는데 거기는 정말 좋았다. 폭탄소리도 안 들리고 밤마다 별이 총총했다.

미국으로 가시게 된 계기도 궁금합니다. 가족들이 같이 떠나셨나요.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다시 왔고 아버지는 남대문 시장에서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다. 미국에 간 건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인데 정확히는 쫓겨난 것이다. 4.19 당시 내가 무슨 끼가 있어서인지 중학생 친구들하고 같이 세종로를 돌아다니면서 데모하는 대학생들을 쫓아다녔다. 당시 3.15 부정선거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는데 우리 같은 애들이 제일 많이 흥분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나를 보고 그러다가는 길에서 총을 맞던지 어떻게 될 것 같다며 친척 할머니가 있는 하와이로 가라고 했다. 사실 가기 싫었지만 아버지가 가라니 할 수 없이 갔다.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위스콘신 주에 있는 마켓대에서 엔지니어링을 공부했다. 졸업 이후에는 석유개발 하는 회사에서 선박 제작 관련 일을 하게 됐고, 결혼 이후에 샌프란시스코와 오렌지카운티에 살았다.

재미교포 1세대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적응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처음 하와이에 간 것이 다행이었다. 거기는 인종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인종차별이 별로 없다. 우리 때는 원주민도 있었고 백인도 있었고, 아시아 인종도 많았다. 젊은이들끼리는 싸우기도 했지만 인종 때문이 아니라 그냥 치기어린 싸움이었다. 그런데 미국 본토로 가니까는 다르더라. 하와이에서는 따로 백인이라고 할 게 없었는데 미국 본토에 가니 다 백인이어서 그게 좀 이상했다. 또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달랐다. 우리를 낮춰보고 그런 일이 꽤 많았다. 나는 저 놈들이 틀렸다 정도만 생각했지 서글프고 그런 것은 없었다. 제일 화가 났을 때는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데 누가 버스에서 ‘야, 이 잽(Jap)’ 하고 날보고 소리를 지를 때였다. 당시 미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을 재패니즈(Japanese)라고 안 부르고 비하하는 표현으로 잽(Jap)이라고 불렀다. 그때는 동양인이라고 하면 주로 일본인을 생각하니까. 길을 가다가도 저편에 동양인이 보이면 그렇게 반가웠다. 쫓아가서 한국 사람이라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할 때도 많았지만. 지금은 동포사회가 많이 커졌다. 보기 귀찮을 정도로(웃음). 그러나 당시는 미국도 베트남 전쟁과 연관해서 반전운동, 히피운동 등 시대가 혼잡스러웠다.

동생 죽음 계기로 작가로 진로 바꿔… 한국 알리기 위한 문학 활동 

동생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작가로써 활동을 시작하게 되셨는데요.

오빠라서 그런 게 아니고 동생은 천재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실제 당시에는 걔가 뭘 하는지 잘 몰랐다. 나도 학교를 다녔고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70년대에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개념 예술이라는 게 탄생하는데 학경이가 초창기 거기 들어가서 활동했더라. 죽은 다음에 보니 엄청나게 많은 일을 했다. 한인계로는 처음으로 버클리 대학에서 주는 상도 받고, 전공도 4개나 할 정도로 공부를 지독하게 했다. 연락을 할 때마다 ‘아직도 학교에 가니’라고 말할 정도였다. 버클리 대학에 작품을 기증해서 가끔 쇼도 열린다. 한국에서도 2003년 회고전이 열렸다. 사고 당시에는 충격이 꽤 컸는데 당시 학경이의 자료를 보면서 나도 과거의 꿈이 생각났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다보니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학경이의 자료를 보면서 이렇게 사는 게 다는 아니구나 싶어졌다. 당시 일도 재미가 없어지고 내가 뭘 해야 할까 싶었는데 이제는 그쪽으로 가야겠구나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에 주로 한국의 문학이나 문화를 알리는 데 활동을 집중해 오고 계시는데요.

번역을 시작하게 된 건 어머니 때문이다. 한번은 어머니가 신문에서 문예진흥원에서 하는 번역 공모전 소식을 보시고 나에게도 해보라고 권하셨다. 시간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했지만 자꾸 해보라고 권해서 그럼 어머니가 스토리를 골라보시라고 했다. 그래서 골라주신 게 주요섭 작가의 『사랑손님과 어머니』였다. 작품을 번역해서 제출하고 난 후에는 잊고 있었다. 어느 날은 뒷마당에서 풀을 깎고 있는데 어머니가 종이를 흔들고 뛰어오시며 내가 상을 탔다고 전해줬다. 당시 상금이 150만 원인데 계산해 보니 왔다 갔다 비행기 표 사고 나면 남는 것도 없을 것 같아 시상식에는 참석하지 않으려 했다. 시상식도 아버지가 원해서 참여하게 됐는데 막상 한국에 와보니 강당도 꽉 차고 규모도 큰 행사였다. 그때부터 번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 같다.

미국에서는 현재 한국책이 거의 안 보인다. 서점에 가도 코리안에 관한 책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래 가지고는 안 되겠다 싶었다. 한국 문학이라는 것이 재미도 있지만 한국어 자체에는 굉장히 시적이고 정서적으로 풍부한 면이 있다. 번역을 하면 자세히 분석을 해야 하니까 그러면서도 배우는 것이 많았다. 나이가 들어 다시 읽으니 어릴 때와는 또 다른 점이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미국에서 너 어디서 왔니 물으면 코리아가 어디인지부터 설명해야 했다. 당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전혀 몰랐다. 한국에 대해 설명을 하다 보니 그게 동기가 된 것도 같다. 사람들이 너무 모르니 알려야겠다. 그래야 나도 좀 편해지겠다 싶었다.

아는 친구 중 한 명이 한국의 옛날 건축 방법을 수업 자료로 쓰고 싶다고 자료를 구할 수 있냐고 물어본 일이 있다. 그래서 구할 수 있다고 답하고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는데 우선 영어로 된 것이 없더라. 워싱턴에 있는 한국대사관에 연락해서 자료를 받긴 했는데 오자투성이고 형편없었다. 이래 가지고는 뭘 하겠나 싶었다. 진짜 제대로 된 번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물론 그때보다 훨씬 나아졌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그래도 지금은 한국이라고 하면 삼성 휴대폰, 현대 자동차, 케이팝 이런 것들을 알아준다. 그러나 한국의 얼, 정신 같은 것이 제대로 알려지지는 못했다. 그런 것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소수이기도 하고 학계의 연구물에 불과하다. 한국을 설명하다 보면 한국의 역사 자체를 이해시켜야 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노
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번역뿐 아니라 전기도 여러 편 쓰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도산 안창호의 따님인 안수산 여사의 전기도 쓰셨다고요.

안수산 여사의 전기를 쓰게 된 것도 우연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섭 선생님의 소설을 번역해서 상을 탄 게 LA에도 보도됐었다. 하루는 집에 있는데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아 보니 주요섭 선생님의 아내 분이었다. 고맙다고 하면서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시더라. 김자혜 여사라는 분인데 마침 LA에 사셨다. 김자혜 여자는 한국 최초의 여성기자로 동아일보에서 근무했다. 인력거를 타고 취재한 이야기하며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 땄을 때 옆에서 일장기 지우는 작업을 봤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 인연으로 그 분하고 가까워졌다. 그 분이 3.2여성동지회 고문이셨는데 마침 동지회 회장이 안수산 여사셨다. 김자혜 선생님이 안수산 여사에 대한 팸플릿을 내려고 하는데 써줄 수 있냐고 해서 감히 거절은 못하고 승낙을 했다. 그 기회를 통해 안 여사를 만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얘기를 하다 보니 분량이 길어져 결국은 책으로까지 나오게 됐다. 안 여사는 인품이 명랑하고 아무것도 감추는 것이 없었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어서 많이 배우게 됐다. 안창호 선생도 정직을 강조하셨는데 가족에게도 실천을 시킨 것이었다. 그 분이 지난해 2월 24일 만 100세 나이로 타계하셨는데 그 전날까지도 청소년 모임에서 스피치를 했다고 한다. 그 분 전기를 통해서 조선 말기부터 일제 강점기 시대, 더불어 2차 대전까지 설명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이 책을 읽은 외국인들도 당시 코리아가 이랬구나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안 여사가 소개해준 게 백영중 회장이다. 14살 때 평양에서 혼자 도망 나와 남한에 와서 전쟁 치르고 고생하다 미국에 와서 억만장자가 된 분이다. 이 사람의 스토리를 쓰면 6.25전쟁을 포함해 한국 현대사를 담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 이 분은 평양을 떠날 때 일주일 뒤에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가족들도 다 두고 왔다. 결국 지금까지 소원이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다 1995년 미국 정부에서 경제원조단을 만들어 평양에 갈 건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백 회장님에게 했다. 그러자 그 분이 어머니를 만나게 해 주면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평양에 가서 마지막 만찬 때까지도 어머니를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때 어떤 사람이 쪽지를 전해줬는데 이번에는 어머니와 상봉이 어려울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너무 화가 나서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지르고 항의를 했다고 한다. 다음날 공항에 가려고 숙소 앞에 서 있는데 호텔 앞으로 벤츠 한 대가 섰다. 한 청년이 내리더니 자기 멱살을 잡고 벤츠로 끌고  가길래 나는 이제 죽었구나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청년이 바깥에는 보는 눈이 있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면서 어머니에 대한 해결책이 있으니 들어보라며 진정을 시켰다고 한다. 이후에 공항 VIP실에서 기다리는데 그때 황장엽 선생이 방 안으로 들어와 다음에 오면 어머니를 꼭 찾아주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한다.

북한, 핵문제로만 인식…주민들 삶 이해시키고파 

황장엽 전 비서와의 인연이 이미 여기서부터 시작됐군요. 북한 문제에 대한 관심은 이때부터 생기셨나요.

우리 가족사와도 연관된 부분이 있다. 윤동주 시인과 어울려 놀던 외삼촌이 우리와 함께 남으로 오지 못 하고 만주에 있다 두만강을 넘어 무산으로 갔다. 그때 외할머니가 병에 걸려서 함께 남하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오빠를 계속 보고 싶어 했다. 미국에서는 마만 먹으면 북한과 컨택(연락)을 할 수 있었다. 어머니께 여러 번 외삼촌을 찾자고 얘기했는데 미국에 친척이 있다고 하면 오빠가 불이익을 받을까봐 돌아가실 때까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니까 자라면서 늘 북한을 의식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또한 책을 쓰면서 한국 역사 얘기를 하려면 북한 얘기를 안 할 수가 없겠다 싶었다. 백 회장을 통해서 황 선생님 얘기를 듣고 만나서 인터뷰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황 선생은 1997년 망명을 했었고 백 회장하고도 상봉했었다. 그러던 차에 2003년 쯤 비서 역할을 했던 손광주(현 남북하나재단 이사장) 씨와 함께 해서 황 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솔직히 황 선생님을 만나고 충격을 받았다. (북한에서 300만 명이 아사했다는 얘기를 듣고)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 있을까 싶었던 거다.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황 선생도 처음에는 자기도 못 믿었다고 얘기하더라. 그래도 한반도 얘기를 쓰려면 그 분의 스토리를 쓰는 게 좋겠다 싶어서 손광주 씨와 만나 그때부터 책을 쓰게 됐다. 황 선생님은 볼 때마다 나에게 미국에서 뭘 해야 하지 않나 하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이미 백 회장하고도 북한민주화운동을 같이 하자고 뜻을 모았었다. 결과적으로 제대로 되지는 않아서 나도 참 안타까웠다. 어쨌건 황 선생님을 만나면서 북한인권과 탈북자 문제에 대한 관심이 더욱 본격적으로 생겼던 것 같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과 이해 정도는 어느 정도인가요. 

사실 북한 사람이나 남한 사람이나 같은 사람 아닌가. 우리가 이렇게 갈라져 있지만 정치적 문제이지 사람하고는 상관없다. 결국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면 되는데 60년 동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 머리 좋다고 하는데 이 문제만큼은 바보 같다고 생각한다. 함경도 지역 사람들은 옛날부터 잘 못 먹었다. 일제 강점기 전부터 감자만 먹고 살았는데 10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도 굶고 있다. 그 사람들이 진짜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왜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 미국 사람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를 않는다.

미국에서도 한창 대북지원을 할 때 교회를 통해 봉사를 간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쌀 창고에는 쌀이 쌓여 있는데 아랫부분은 썩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북한에는 절대 쌀을 주면 안 된다고 얘기했다. 나도 그때는 그 말을 이해 못했다. 알고 보니 정권에서 식량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황 선생이 그런 말을 했다. 김정일은 100만 명이 죽어도 끄떡 안 할 거라고. 우리 친척도 굶어 죽었을지 모른다. 사람을 그렇게 취급한다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인들이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는 여론조사가 있었는데 ‘북한 사람들은 크레이지(crazy)하다’는 답이 제일 많았다고 한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 사람들도 사람이다. 그 사람들도 딴 사람들하고 다를 게 없다’고 얘기한다. ‘다만 그들은 지도자를 잘못 만난 것이다. 지도자가 미친 거지 그 사람들이 미친 것은 아니다’고 얘기하지만 그게 잘 안 통한다. 현재 미국에서 물망초 재단을 통해 탈북자 학생들을 초청해서 진행하는 언어 연수 프로젝트를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 프로그램을 통해 여기 사람들에게 탈북자 학생들을 자꾸 소개해 주고 이해시키고 싶다. 어쨌건 미국의 관심은 기본적으로 핵이다. 김정은이 폭탄을 터뜨리겠다고 하니까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94년 당시 영변을 폭격했어야 했는데 아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고, 대화를 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큼 대화가 현실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꽤 있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전략적 인내를 내걸고 있는데 요즘은 좀 변하고 있는 것 같다. 대북 제재 내용들을 보면 달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는 더 속지 않겠다는 그런 생각인 것 같다.

외부인의 시각에서 최근 한국 사회의 모습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면.

외부에서 볼 때는 미국도 같기는 하지만 양극화가 문제인 것 같다. 미국도 양극화가 굉장히 심각하긴 하지만 오래된 문제이기도 하고 중산층이 워낙 두터우니까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양극화의 형태가 중산층이 자꾸 줄어드는 모습으로 가는 것 같다는 우려가 든다. 그리고 학자들이나 교수들이 편 가르기를 먼저 하는 게 문제인 것 같다. 나를 처음 보는 한국 사람들이 ‘이 사람이 이쪽일까 저쪽일까’ 계산하는 것이 보인다. 나는 사람 중심으로 생각하지 이 당, 저 당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말하면 이상해 보이는 것 같더라.

미국에서도 귀향 군인들, 나이 든 사람들은 여기의 아스팔트 우파처럼 적극적으로 나선다. 반대로 젊은 세대는 아무것도 모른다. 결국 우리 세대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만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한국이라고 하면 삼성, 현대차, 케이팝 문화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옛날에는 낙후했던 국가가 이제는 이런 강국이 됐으니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싶다. 또 하나는 한국 사회가 안보문제에 너무 안이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김정은이 평화를 위협하고 도발을 할 때는 뭉쳐서 대응해야 하는 것이 맞는데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면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았다.

또한 요즘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젊은 세대의 불만과 분노가 크다. 이제는 젊은 사람들이 자신의 살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본다. 음악도 유행에 따라 인기를 끌  듯이 패러다임도 바뀌어야 한다. 한국의 젊은 사람들은 통일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자신들의 살 길이 통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통일을 자신들의 패러다임으로 정해서 앞장서서 개척해야 한다. 과거 4.19혁명이나 5.18민주화운동도 다 젊은 세대가 앞장 서지 않았나. 요즘 젊은이들이 일자리 문제로 고통을 당하는 건 안타깝지만, 불평과 불만에 너무 익숙한 것 같다. 자기의 살 길은 자기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통일 문제에 있어 중국이나 미국을 설득하는 데도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떳떳하게 설명도 하고 설득도 해야 한다. 이런 열정 같은 게 있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게 잘 안 보인다. 그것도 역시 우리 세대의 잘못이면 잘못이겠지만 말이다.

http://www.sdjs.co.kr/read.php?quarterId=SD201603&num=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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