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1일 월요일

독일통일-7 (외교전쟁 上)

1989.11.9.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이 때부터 통일을 선언하는 이듬해 10월 3일까지 약 11개월 동안 동서독을 비롯한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의 수반들과 관리들은 각자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가 무수히 만났고 정신 없이 뛰어다녔다.

이 6개국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6각 줄다리기’를 했다. 각자 합종연횡을 했고, 교묘한 전략을 썼으며, 겉과 속이 다른 말로 상대를 속였다. 그 와중에 동독에서는 데모와 체제 급변이 진행되었으니, 그야말로 카오스의 연속이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방향을 잡은 사람이 서독 총리 ‘헬무트 콜’이었다.
콜은 베를린장벽이 붕괴된지 20일도 안된 1989년 11월 28일 “유럽과 독일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10개 항목(이하 ’10개항목’)”이라는 이름의 사실상의 ‘통일방안’을 발표함으로써 통일의지를 분명히 했다.

콜의 제안은 ‘서독기본법’에 엄연히 살아있는 통일관련 조항에 근거했다. 서독기본법은 통일을 헌법상의 명제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서독의 정치인들은 이전 회에서 밝혔듯이, 독일민족주의 부활에 대한 우려 등 여러가지 이유로 통일을 입에 담지 않았었다. 그런데 콜이 ’10개항목’을 발표함으로써 통일의 이니시어티브를 쥐었다.

’10개항목’은 동독 ‘모드로우’ 총리의 조약공동체(이게 ‘연방제 통일안’인 것 같다) 제의와 지원요청을 거절하는 형식이었지만, 콜은 통일과 관련해 양독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동독에 ‘민주적인 합법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절대적인 선결조건으로 제시했다. 콜은 이렇게 요구했다.

○ 동독에 대한 지원은, ’동독 정치, 경제제도의 근본적인 전환이 동독에 의하여 확정적으로 수락되고, 불가역적으로 시행되는 경우’에 한정된다.
○ 여기서 불가역적이란 동독 지도부가 동독의 ‘헌법개정’과 새로운 ‘선거법의 제정에  합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 동독은, 무소속은 물론 ‘비사회주의적’ 정당들의 참가가 보장되는 ‘자유·평등·비밀선거’를 실시하라.
○ 동독 공산당은 권력독점을 포기해야 하며, 우리가 요구하는 ‘헌법적 조건’은, 무엇보다도 ‘정치범죄에 관한 법률’을 폐지하고, 그 결과 ‘모든 정치범을 즉각적으로 석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하면 “동독에 민주제도를 도입해서 주민들의 자유의사를 물어라”는 요구이다. “그렇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는 말이다.

풍전등화의 동독은 콜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동독이 민주정부를 수립하여 통일에 대해 주민투표를 실시했던 것이고, 그 최종결과가 독일통일인 것이다.

사실 난마처럼 얼킨 주변국들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풀고 통일을 이룬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콜’은 회고록에서 당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1989년 통일의 길에 나섰을 때만 해도 우리는 마치 늪을 건너는 기분이었다. 무릎까지 물속에 빠져 있었고 시야는 안개에 가로막혀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은 오직 하나, 그런 상황에서도 어딘가에 분명히 길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독일 ‘슈피겔지’는 이 때의 외교전쟁을 포커게임이나 체스게임에 비유했다. 이 게임의 대표 선수는 각국 정상들이었지만 외교관, 법률가, 정치인, 군인 등 수백 명의 전문가들도 자국의 이익을 위한 외교전에 투입되었다.

이 전쟁에서의 최대 승자는 ‘헬무트 콜’이었다. 그는 미국만이 독일통일을 찬성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콜은 처음부터 미국의 요구조건(통일독일의 NATO 잔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자기 편으로 만들었고, 미국을 이용하여 주변국을 설득했다.

나중에 버티다 못한 소련이 “NATO를 탈퇴(중립화)하면 독일통일에 동의하겠다”는 제안까지 했지만 콜은 거부했다. 그는 통일 전 10개월 동안에만 부시와 8번, 미테랑과 10번, 고르바초프와 4번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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