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23일 일요일

87년체제 극복이 먼저다

개헌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개헌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이들은 적지 않다. 나 역시 권력구조 개편을 포함한 개헌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진행되는 개헌 논의는 설득력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성사되기 위해선 절차와 진정성이 중요한데, 최근 개헌 논의는 절차도, 진정성도 갖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극복, 행정권력과 입법권력 간의 견제 및 균형을 위해 개헌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에는 헌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정부와 국회로 대표되는 정치사회가 무능한 데에 일차적 원인이 있다. 특권 내려놓기 등을 솔선수범하지 않는 국회와 경제민주화 등 여러 공약을 파기한 정부가 개헌을 제안하든 그 제안을 비판하든 일련의 과정은 오히려 권력투쟁의 일환으로 비춰지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헌법은 이른바 ‘87년체제’의 핵심을 이룬다. 87년체제란 1987년 6월 항쟁으로 열린 민주화 시대의 사회체제를 말한다. 산업화 시대의 사회체제인 ‘61년체제’가 냉전ㆍ개발독재ㆍ무정형의 시민사회ㆍ공동체주의 문화에 기반해 있었다면, 87년체제는 탈냉전ㆍ시장만능주의ㆍ조직화된 시민사회ㆍ개인주의 문화로 특징지어진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 87년체제의 그늘을 극복해야 할 과제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다는 점이다.

87년체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정치에 있다. 지역주의에 기반한 정당체제, 정당정치와 운동정치의 기묘한 공존, 강고한 진영 논리와 이와 연관된 이념갈등이 바로 그것이다. 87년체제가 이룬 독재국가에서 정상국가로의 전환은 평가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87년체제는 동시에 지역주의 정치의 고착화, 사회ㆍ경제적 민주화 프로그램의 부재, 이념투쟁을 포함한 사회갈등의 과도한 분출을 가져왔다.

여기에 더하여 주목할 것은 87년체제의 리더십이다. 87년체제는 크게 ‘3김(김영삼ㆍ김대중ㆍ김종필) 시대’와 ‘포스트 3김(노무현ㆍ이명박ㆍ박근혜) 시대’로 나눠진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반독재ㆍ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민주화시대의 적자(嫡子), 이명박 전 대통령은 산업화시대의 적자,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시대의 적자였다. 특히 포스트 3김 시대의 리더들이 내건 ‘낡은 정치 청산’, ‘경제 살리기’, ‘국민대통합’은 1987년 이후 30년에 가까운 시간 속에서 무엇을 이뤘고 무엇을 성취하지 못했는지의 빛과 그늘을 선명히 보여준다.

87년체제는 길을 잃었다. 아니 87년체제는 자신에게 부여된 역사적 임무를 다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87년체제를 통해 우리사회는 민주주의로의 전환과 공고화를 모색해 왔다. 하지만 이 민주화시대는 현재 국민 다수의 사회ㆍ경제적 삶의 위기라는 역설적이고 낯선 결과에 대면해 있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는 일각의 주장은 선뜻 동의하기 어렵더라도 우리 민주주의가 처한 엄중한 현실을 생생히 증거한다. ‘밥 먹여 주는 민주주의’, ‘고용ㆍ교육ㆍ주거ㆍ노후의 불안을 덜어주는 민주주의’야말로 ‘포스트 87년체제’의 과제임은 분명하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개헌의 문제제기가 국민적 정당성을 얻으려면 바로 이런 87년체제가 갖는 명암에 대한 성찰적 반성이 선행돼야 한다는 점이다. 87년 헌법이 갖는 제도적 약점보다는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 받은 정부와 국회가 자신에게 부여된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의 핵심이다. 87년체제가 만든 지역주의 정치와 관성적인 우파 대 좌파의 구도 안에 오히려 안주하고 혁신을 거부해 온 게 우리 정치의 솔직한 민낯이다.

그 시점이 언제가 되든지 개헌은 이뤄져야 한다. 2016년 4월 총선 전까지 당분간 선거 일정이 없는 현재의 시기가 개헌에 적합한 때라면, 느닷없이 개헌 이슈를 꺼낼 게 아니라 우선 어떤 ‘포스트 민주화 시대’를 열 것인지, 이를 위해 어떤 비전과 정책을 내놓을 수 있는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벌여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 개헌보다는 정부와 국회의 자기혁신을 포함한 87년체제의 극복이 먼저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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