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21일 금요일

독일통일-6 (인권 기반 교류)

동서독 간의 교류에 대해서는 이미 상당부분 얘기했으므로 몇 가지 중요한 분야만 추가한다.

서독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서독기본법’의 3대 명제는 “자유, 평화, 통일”이었다.(여기서 자유란 동서독 주민들의 자유 즉 ‘인권’을 뜻함). 이 3대 명제 중에 ‘자유’가 ‘통일’보다 우선이라는 점에서는 국민적 합의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유와 평화’ 중에 무엇이 우선인지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따라서 동독과의 교류를 통해 ’평화’를 확보하는 문제가 과연 동독주민들의 ‘자유’보다 우선인가 하는 점은 정권마다 달랐다. 이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여서 대북관계에서 항상 갈등요인이 된다. 쉽게 말해 휴전선 평화유지냐 북한주민 자유냐 하는 문제다.

사민당의 ‘신동방정책’은 ’자유’보다는 ’평화’를 중시하는 정책이었다. 그래도 ’평화’를 이유로 ‘자유’의 중요성이 경시된 적은 없었다. 이러한 정신은 전술했듯이 “인권을 저해하는 어떠한 합의도 해서는 안된다”는 최고법원 판결에서도 나타난다. 이게 통일정책을 추진하는 우리 입장에게도 대단히 중요하며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서독은 1)동서독 주민간의 이주, 왕래, 가족상봉, 2)국경탈출자에 대한 사살 중지 및 탈출기도자에 대한 형량 경감, 3) 정치범 박해 금지, 4)동서독 주민간의 정보교환 확대 등 동독주민들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구체적 목표를 달성하는데는 일관성이 있었다.

그런 정신에서 ’정치범 거래’가 성사되었고, ‘중앙기록보존소’가 설치, 운영되었으며, ‘탈출민 수용 정책’이 펼쳐졌다. 그럼 정치범 거래 내역부터 보자.

서독은 1962년부터 베를린 장벽 붕괴시까지, 동독 정치범 34,000명과 그 가족 25만 명을 구입하였다. 거래의 대가는 앞서 얘기했듯이 정치범 1인당 10만 마르크(5,300만원)였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정치범 거래에 대해서는 ‘철저한 비밀’을 유지했고, 관련 예산도 ‘비공개 항목’이었으며, 정치인과 언론도 이를 ‘흥미대상’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정치범 거래의 득실에 대해서는 통일후 철저한 검토가 이루어졌다. 검토결과 ”동서독 주민간의 유대와 정신적,사회학적 결합에 기여한 점, 동독주민들로 하여금 미래의 희망을 유지하도록 했다는 점, 다수의 지식인과 기능인들이 동독을 탈출하여 동독의 붕괴에 기여한 점” 등이 이득으로 판명되었다.

반면 ”동독 내 반체제 세력이 약화되었다는 점, 몸값이 동독 집권층의 권력기반 강화에 이용되었다는 점, 몸값 때문에 정치범이 양산되었다는 점” 등이 손해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독일통일에 기여했다고 결론지어졌다.

다음은 중앙기록보존소.

‘중앙기록보존소’는 우리나라의 ‘북한인권센터’와 유사하다. 즉 “동독주민들의 인권보호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통일 후 법치국가적 질서 확립을 위해 악행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처벌근거가 필요하며, 통일에 대비하여 가해자들의 폭력을 자제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목적 하에 설치되었다.

‘중앙기록보존소’는 기민당 집권 때인 1961. 11월, ’나치만행기록소’ 등을 모델로 하여 국경지역인 ‘잘츠기터’에 설치되었다.(한 때 사민당과 동독정부가 집요하게 폐지를 요구했지만 계속 유지됨). 운영인력은 총 7명이었다.(검사2, 주법무성 공무원 1, 계약직 공무원 4).

동독의 인권침해 관련 정보는 주로 석방된 동독 정치범, 탈출한 동독군, 동독발행 각종 간행물, 서독 친지에게 보낸 동독주민들의 서신 및 통화, 동독 방문 서독인, 동독으로부터의 이주자, 정보기관 등을 이용하여 수집되었다.

중앙기록보존소는 설치 후 통일 때까지 30여 년간, 인권침해 관련 인사 약 80,000 명을 기록했다. 이 중 10,000 명은 통일 후 형사소추가 가능한 피의자들이었고, 나머지 70,000 명은 증인 및 피해자들이었다. 동독 판검사 6,500 명도 등재되었다.

이 기록은 통일 후, 동독 내 ‘사법제도 정착’과 판검사 및 공직자 임용시 심사 자료, 피해자들에 대한 ‘복권 및 보상 심사자료’, 범죄행위 가담자에 대한 ‘형사처벌 근거 자료’ 등으로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통일 후 평가에 의하면, 형사사건의 경우는 처벌 대상감만을, 민사사건의 경우는 정치적 박해로 재산이 몰수된 사건만을 기록했기 때문에, 좀 더 광범위한 기록을 유지했어야 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다음은 탈출민 수용 정책.

1949 ~ 1990.6월 까지 총 520만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이주했다.(특히 1989.5월 ~ 1990.6월까지 격변의 시기에는 1년만에 62만여 명이 서독으로 넘어 옴).

서독정부는 ”1939.12.31 현재 독일 영토에 거주하던 독일인은 서독 국적자로 인정한다”는 ‘서독기본법’에 근거하여, 분단 이후 탈출한 동독인들을 자국민으로 받아들였고, 동독 탈출민들에게 여러가지 지원을 했다.

이 블로그에서는 탈북자에 대한 지원과 관련해서 많은 설왕설래가 있었는데 서독의 선례가 도움을 줄 것이다. 여기서는 지원금을 위주로 살펴보자.

탈출한 동독인들은 우선 ‘베를린’과 ‘기센’에 소재한 ‘긴급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 후 각 주정부 대표와의 협의를 거쳐 각 주로 배분되어, 주에 있는 ‘임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사회로 나갔다. 따라서 각종 지원도 ‘긴급수용소’와 ‘임시수용소’에 있을 때로 나누어 이루어졌다.

연방정부가 관리하는 ‘긴급수용소’에 있는 동안에는, 1인당 200 마르크의 연방정부 보조금이 지급되었고, 주정부 보조금이 가장에게는 30 마르크, 가족에게는 15마르크가, 용돈은 가장에게는 15 마르크, 가족에게는 10 마르크가 지원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숙식비, 건강진단비, 종교단체 제공 의류, 각 주에 있는 ’임시수용소’까지의 교통권 및 이삿짐 운송비 등이 지원되었다.

지방정부가 관리하는 ’임시수용소’에 있는 동안에는, 주택알선 또는 주택입주 우선권과 최고 1만 마르크까지의 저리융자, 학자금, 의료, 연금, 실업, 산재보험, 실업수당 및 생계비 보조금 등이 지원되었다. 하지만 이런건 모두 최소생계유지에 필요한 정도에 국한되어, 탈출자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노력으로 직장을 구하게끔 유도했다.

종합적으로 볼 때, 4인가족이 수령하는 현금지원액은 총 920 마르크 (약 55만원. 통독당시 환율 1마르크 = 600원) 정도였다.

이 역시 통일 후 철저한 분석이 있었는데, 동독 이주민을 제한 없이 수용하고 정착을 지원한 것은 “동독주민의 인권개선과 통일여건 조성, 서독사회에 대한 고급인력 공급역할까지 하여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다음은 경제교류(대동독 경제지원).

경제교류는 무역, 용역거래, 공공부문의 이전지출, 금융협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연간 교류규모는 75억 불에 달했고, 1975 ~ 1988까지 서독에서 동독으로 흘러 들어간 공식, 비공식 지원액은 연간 23억 불에 달했다.

참고로 비공식 지원이란, 예를 들면 “서독인의 동독 방문시 동독화폐로의 의무환전, 서독교회의 동독교회 지원, 정치범 석방대가 지원” 등이 있다.

경제교류도 몇 가지 원칙 하에 했다. 앞서 ’지원 3원칙’ 등을 말했지만 구체적인 절차와 관련해서는 ”수지균형을 맞춘다, 허가와 공고절차를 거친다, 원산지가 독일인 상품만 거래한다, 지불은 중앙은행 간의 청산계좌로 한다(뒷돈 거래 차단 목적)” 등이 적용되었다.

경제교류 역시 통일 후 철저한 득실계산을 했는데, “민족의 결속을 유지하고 분단에 따른 인간적 고통을 완화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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