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6일 목요일

독일통일-5 (베를린장벽 붕괴 下)

베를린장벽 붕괴의 물꼬를 튼 나라는 역시 동구권 민주화의 첫 깃발을 잡았던 헝가리였다.

(참고로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북방정책)도 1989.2월 헝가리와 첫 수교를 함으로써 개시되었다. 이어 한국은 유고, 소련, 폴란드, 불가리아, 중국 등과 수교하게 된다. 이런 북방외교시 실무를 담당했던 사람이 이 책의 저자 염돈재 박사다).

1989.6.28. 헝가리 개혁정부가 개혁의지의 표시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철조망을 제거하자 헝가리에 와있던 동독주민들이 오스트리아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동독주민들의 베를린 서독대표부 점거(8/3), 몰려드는 동독주민들을 차단하기 위한 동베를린 주재 서독 상주대표부 폐쇄(8/8), 헝가리 ‘부다페스트’ 서독대사관 폐쇄(8/11)조치가 잇달아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주민들의 탈출은 계속되었다. 헝가리 ‘범유럽 피크닉’에 참가했던 동독청년 600여 명이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탈출했고(8/19), 이어 체코 프라하 주재 서독대사관이 폐쇄되었다(8/22).  

서독의 ‘헬무트 콜’은 발빠르게 헝가리 ‘네메트’ 총리와 비밀교섭하여, 5억 마르크를 주는 대가로 헝가리가 동독과 맺은 여행협정을 파기하도록 유도했다(8/25). 헝가리 정부의 여행협정 파기로 국경이 개방되자 콜 정부는 동독주민 57,000여 명을 서독으로 데리고 왔다(9/11). 그 와중에 ‘라이프치히’에서 첫 월요시위가 개최되어 1,200명이 연행되었다(9/4).

이어 체코정부도 ‘프라하’에 체류 중이던 동독인 4,500명의 출국을 허용했다(10/3). ‘라이프치히’ 시위대는 7만명으로 늘었다가(10/9) 12만명까지 증가되었다(10/16).

격변의 와중인 10월 6일 고르바초프는 ”소련군은 일체 개입하지 않을 것이고 무력진압에 반대한다”라고 말했고, 10월 7일 동독 공산정권 수립 40주년 기념행사에서는 ”늦게 오는 자는 인생의 벌을 받는다”라는 소련속담을 인용하면서 동독의 개혁을 촉구했다.(그 때까지만 해도 동독이 개혁만 하면 사태수습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동독의 ‘호네커’ 정권은 유혈진압을 준비했다.

‘라이프치히’ 주둔군 부대에는 “필요하면 발포해도 좋다”는 ‘인민군 명령’이 하달되었고 실탄도 지급되었다. 시위대에 우호적일 가능성이 있는 병사들은 출동부대에서 제외되었고, 사상자 발생에 대비한 수송계획, 혈액, 시체 담을 자루까지 준비되었다.

하지만 10월7일 ~ 8일, 시위대에 대한 무차별적 구타와 대규모 검거는 있었지만 끝내 발포명령은 내려지지 않았고, 독자적인 판단으로 발포명령을 내린 지휘관도 없었다. 만약 누군가가 발포명령을 내리면 군인들의 총부리가 자신을 향할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갔던 것이다.

그러자 동독 정치국원들이 분열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책임을 ‘호네커’에게 지우고 루마니아처럼 그를 제거하면(차우세스코 제거 방식), 사태수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련으로부터 ‘호네커’ 제거 승인까지 받아놓았다. 그런 일환으로 10월 18일, 19년 동안 집권했던 ‘호네커’ 서기장이 퇴진했고, ’에곤 크렌츠’가 취임했다.

‘크렌츠’ 취임 후에도 동독주민들의 탈출과 시위는 계속되었다.

11월 1일에는 동독주민 5만 명이 체코를 거쳐 서독으로 탈출했고, 11월 4일 동베를린에서 개최된 문화예술 집회에서는 동독 역사상 최대 규모인 1백만 명이 운집하여 “개혁, 언론 및 집회의 자유, 자유선거 실시, 공산당 일당독재 폐지”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동독정부는 ‘여행법’을 개정하여 보다 폭넓은 여행자유를 주기로 했다.

‘새 여행법’은 여행허가 범위를 확대하여 주민불만과 불법탈출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개정된 내용도 “개인적인 해외여행의 ‘신청’은 지금부터 특별한 ‘전제조건 없이’ 할 수 있다” 였다.

이것은 여권과 비자발급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겠다는 뜻이지, 출국비자 없이도 해외여행을 완전히 자유화한다는 뜻은 아니었다.(동독에서는 여권을 받아도 별도의 출국비자를 받아야 해외여행이 가능했다. 동독정부는 비자발급 과정에서 여행자유화의 속도를 조절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동독 공보담당 정치국원 ‘권터 샤보프스키’의 ‘위대한 거짓말’이 터져 나왔다.

1989.11.9. 오후 6:55.

매일 열리는 기자회견이 끝날 때쯤, ‘샤보프스키’는 ‘여행법 개정안’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 여행법을 당 서기장 ‘크렌츠’로부터 기자회견 직전에서야 건네받아 아직 그 내용도 읽어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물론 새 여행법에 대한 사전정보나 설명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샤보프스키’는 반은 읽고 반은 대충 해석하면서, “누구나 개인여행을 신청할 수 있고, 즉시 허가가 내려질 것이며, 각 지방 경찰에게는 신청서 없이도 영구이주 비자를 즉석에서 발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발표했다.

엉성한 브리핑에 기자들의 질문이 쇄도했다. “그 규정이 언제부터 발효되느냐”는 이탈리아 기자의 질문에 ‘샤보프스키’는 “즉시, 지체 없이”라고 멋대로 대답했다. 어떤 기자가 “그것이 서베를린에도 해당되느냐”고 보충질문을 하자 ‘샤보프스키’는 “그렇다. 동서독, 동독과 서벨를린의 모든 국경 검문소가 다 해당된다”고 또 멋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실제 새 여행법은 해외여행의 ‘신청’이 간소화된다는 내용일 뿐이었다. 더구나 베를린장벽에도 적용된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실 베를린장벽은 4대전승국의 관리 하에 있었기 때문에 동독정부가 결정할 사항도 아니었다.

새 여행법은 그날 중앙위원회에서 초안이 승인되었었는데, 12월 중순에 예정되어 있던 당 특별회의 준비에 골몰해 있던 ‘크렌츠’가 자기의 업적을 홍보하기 위해 이를 ‘샤보프스키’에게 미리 건네준 것이었다. 더구나 기자회견 직전에 말이다. 말하자면 평소 경솔하고 다변인 ‘샤보프스키’가 말실수를 한 것이다.

추가질문이 이어졌지만 더 이상의 답변은 없었고, 많은 의문점을 남긴 채 기자회견이 끝났다. 기자들은 워낙 의외의 일이라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공식 발표문이 없었기 때문에 소설을 쓰다시피 하면서 기사를 작성했고, 그 바람에 보도내용도 서로 달랐다.

그날 저녁 7시 5분. AP통신이 가장 먼저 “동독이 국경을 개방했다”고 보도했다. 이어서 서독 공영방송(ARD)이 8시 뉴스에서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많은 동서독 주민들이 ‘샤보프스키’의 회견과 TV뉴스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고, 이어서 사실여부 확인을 위해 국경초소로 몰려가 군인들에게 질문했다. 금시초문인 군인들이 시원한 대답을 해줄 리가 없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수천, 수만 명이 국경에서 국경개방을 요구했다. 그러자 주민들과의 시비 끝에 겁에 질린 군인들은 상부의 지침도 받지 못한 채 10시 30분 경, 국경 바리케이트를 열어주었다. 이어서 동서독 주민들이 함께 장벽에 올라가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국경수비대의 보고를 받은 동독 내무장관도 상황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국경수비대의 결정을 추인했다.

이렇게 해서 1989.11.9. 자정 경에는 거의 모든 국경 통로가 열렸고, 베를린은 나팔 불고 춤추고 환호하는 파티장 같이 되어 버렸다. 여기 저기서 또 다른 구멍까지 뚫렸고, 불과 2주 만에 300만 명의 동독주민이 서베를린이나 서독으로 넘어갔다.

서독정부는 전에 하던대로(법대로) 이들에게 100 마르크(6만원)의 환영금을 주었고, 환영금을 받기 위해 더 많은 동독주민들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10일 동안 서방여행을 위한 비자 1,030만 건이 발급되었고, 국경지역 50 곳에 통행로가 만들어졌다. 베를린장벽은 그렇게 무너졌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크렌츠’는 장벽개방이 동독정부의 사전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되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데다가 취임한지 얼마 안된 개혁가로서의 인기하락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튿날인 11월 10일, 크렌츠가 동독주재 소련대사에게 전화했을 때 둘은 꽤 다투었다. 소련대사는 “2차대전 4대전승국의 문제인 베를린장벽을 왜 당신 마음대로 개방하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

참고로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서독정부의 지도자들은 앞 다투어 장벽으로 몰려갔지만, 동독정부 지도자들은 한 사람도 장벽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동독 공산정권의 무능함을 백일 하에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아직 통일은 멀었고, 통일 구호도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천안문 사태가 유혈진압된 지도 얼마 안되었고, 동독에는 소련군까지 버티고 있었기에, 누구도 통일이 현실화되리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헬무트 콜’ 총리 빼고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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