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4일 화요일

독일통일-4 (베를린장벽 붕괴 上)

섬처럼 동독 내에 떨어져 있던 베를린은 4대전승국에 의해 분할되었다. 1948.6월~1949.5월, 11개월 동안에는 소련이 베를린행 육로와 수로를 봉쇄하여, 미국과 영국의 군용기가 하루 4,000 회, 총 27만 8천 회나 날아가 서베를린 시민들에게 물품을 공급하기도 했었다(베를린 봉쇄).

베를린을 둘로 나눈 베를린장벽은 동서냉전과 쿠바 미사일 위기가 한창 때인 1961. 8월에 구축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철조망이었으나 몇 차례 증축해서 담이 되었다.

베를린장벽 붕괴와 관련해서는 1987.6월,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했던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미스터 고르바초프, 이 벽을 부수시오.(Mr. Gorbachev, Tear down this wall.)”라는 연설이 유명하다. 그 2년 5개월 후 베를린 장벽은 거짓말같이 붕괴된다.

베를린장벽 붕괴에 대해서는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그걸 포함하여 그 붕괴 과정을 시간 순으로 살펴보자.

앞서 말했듯이 동독 정부는 여행자유의 수준을 점차 높여가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동독인들이 같은 공산국가인 헝가리, 체코, 폴란드 등으로 여행을 갔다. 1980년대 말쯤에는 이들 나라에 갔던 여행객들이 동구 공산국가의 민주화 시위에 영향을 받아, 여행자유화를 요구하며 그 나라에서 시위를 하곤 했다.

(그 이전인 1985.1월에는 체코 ‘프라하’ 주재 서독대사관에서 시위하던 동독 여행객들이 처벌면제와 조속한 출국허가 약속을 받고 동독으로 귀국한 사례도 있었다.)

1985.3월, 소련에서 ‘체르넨코’ 서기장이 사망하고 ‘고르바초프’가 취임했다. 그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폈고, 동구 공산국가 주민시위시 소련군 무력진압의 근거였던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했다.

그가 이런 정책을 편 배경 중의 하나는 미국과의 무제한적 무기경쟁이 소련을 파멸시킬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만큼 소련 경제는 이미 개판이었다. 실제 고르바초프는 이런 말을 여러 번 했다.

“소련의 중거리미사일 유럽배치에 대응하여, NATO가 유럽에 중거리미사일을 배치한 것과 1983년 레이건의 전략방위구상(SDI. 소위 ‘별들의 전쟁’ 계획)이 소련의 정책변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소련의 개혁, 개방 분위기에 편승하여 동구 공산국가에서 주민시위가 시작되었다.

헝가리가 첫 깃발을 잡았다. 1988.5월 개혁파인 ‘그로스’ 서기장이 집권한 것이다. 이어 폴란드가 2번 타자로 나섰다. 1989.4월 ’자유노조’가 합법화되었고, 6월 총선에서는 비공산당 주도의 연립내각이 수립된 것이다.(이때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도 발생함).

이어 체코에서는 그 해 11월, 공산당 권력독점이 폐지되었고, 12월에는 반체제 인권운동가인 ‘바츨라프 하벨’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같은 달 루마니아에서는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차우세스크’ 부부가 처형되었다.

동독은 가장 늦게 출발했다.

그 이유는 앞서 얘기했듯이, 동서독 주민 모두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가 물샐 틈 없이 감시하고 있었으며, 동독 내의 반체제 인사는 대부분 서독으로 수출되어 ‘반란의 씨’가 말랐기 때문이다.(그래서 돈 주고 정치범을 데리고 온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이렇게 봇물 터지듯 터져나온 동구 공산국가 주민들의 민주화 시위가 ‘고르바초프’ 만의 영향이었을까? 물론 아니다. 그 동안 쌓인 공산주의의 적폐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88서울올림픽’이다. 우리와 관련되어 있으니 잠시 그 부분을 살펴보자.

’88서울올림픽’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12년만에 전지구촌 국가가 참가한 최대 올림픽이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여, 미국 등 서방국가들이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을 위시한 공산국가들은 1984년 ‘LA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이로써 2회 연속 반쪽 올림픽이 열렸다.

마침 1985년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동서 데탕트가 조성되었다. 그러자 국민들의 눈치를 봐야 했던 소련과 동구권 공산국가의 집권층은 더 이상 올림픽에 불참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1988년 서울에서 12년 만에 전 국가가 참가하는 진정한 지구촌 올림픽이 열렸던 것이다.(물론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도 한 몫 했다).

소련과 동구권 공산국가들의 참가결정 이면에는, 서울의 못 사는 모습을 자국민들에게 생중계하여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보여줌으로써, 점증하는 국민들의 불만을 달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때까지 한국에 대한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의 인식은 ’6.25의 폐허’ 그대로였다.

그래서 소련과 동구권 공산국가들은, 관례와 다르게 TV 중계 내용을 사전에 체크하거나 검열하지 않았고, 자국민들에게 그대로 방영하게 했다.

그런데 동구권 공산국가 국민들이 TV에서 본 서울의 모습은 놀라운 것이었다. 전쟁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시민들은 자유로웠으며, 환경은 풍요로웠다. 개막식을 포함하여 서울올림픽 전체가 엄청난 성공이었다.

(참고로 서울올림픽은 진행, 기록, 보안 등에서도 뛰어났고, LA올림픽을 제외하고는 그 전 몇 개의 올림픽에서 보여줬던 적자행진을 끝장낸,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올림픽이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소련 및 동구 공산국가 주민들의 마음 속에는 ‘도대체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한 것인가?’라는 자괴감과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감이 자리 잡았다.

이런 국민의식의 변화가 서울올림픽 직후인 1980년대 종반 동구권 국민들의 민주화 시위를 폭발시켰다는 얘기다. 실제로 동구권 공산국가 주민들이 민주화 시위를 할 때 합창했던 노래가 서울올림픽의 주제가인 ‘손에 손잡고(hand in hands)’였다.

우리나라가 세계에 기여한 드문 사례 중 하나가 ’88서울올림픽’이다. 우리는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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