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2일 일요일

독일통일-3 (서독 정책)

서독의 통일정책은 양대 정당인 기독교민주당(기민당)과 사회민주당(사민당)의 정책을 보면 개괄될 수 있을 것이다. 당명에서 알 수 있듯이 기민당은 보수당, 사민당은 진보당이다. 하지만 어느 당의 통일정책이라도 기본적으로 커다란 제약 내에서만 통일정책을 수립해야 했다. 그 제약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독일은 2차대전 패전으로 인해 미,영,프,소 등 4대 전승국에 의해 분할되었고, 그 바람에 1990.10.3. 통일될 때까지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독일은 1952년 ‘독일조약’에 따라 ’4대 전승국’의 동의를 받아야 통일이 가능했던 것이다.(그 때문에 베를린장벽 붕괴 후 통일 때까지 약 11개월 동안 ‘헬무트 콜’ 정부는 정신 없이 바빴다).

독일조약에는 ”전체로서의 독일과 베를린에 대해서는 2차대전 전승국가들이 책임과 권리를 갖는다”라는 규정이 있었고, 이에 따라 서베를린 지역에는 미,영,프 군대가 총 12,500명이나 주둔하고 있었다. 동독에는 소련군이 38만명이나 주둔하고 있었으니 더했다.

따라서 동서독이 통일에 합의한다고 하더라도 4대 전승국 중 어느 한 국가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통일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영국, 프랑스, 소련이 독일통일에 찬성할 리가 없었다.(다행히 남북한은 그럴 필요가 없다). 실제로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후에도 미국을 제외한 3국은 통일을 극력 반대했다.

그래서 가까운 시일 내에 통일이 가능하다고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고, 이는 동서독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의 제약은 전회에서 얘기했듯이 ”인권문제를 양보하는 어떠한 합의도 해서는 안된다”는 ‘서독연방 헌법재판소’의 판결이었다. 어느 당의 통일정책이든 이 ‘인권의 틀’ 안에서 해야만 했던 것이다.

마지막 제약은 통일에 대한 서독국민들의 ‘체념’이었는데, 그 체념의 배경에는 위에서 말한 4대 전승국의 승인을 받을 수 없다는 무력감도 있었지만, 그것 못지않게 통일의지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민족주의’가 발을 붙일 수 없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서독 국민들은 2차대전의 트라우마로 인해, 통일을 들먹이는 자체가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것이고, 이는 곧 2차대전을 반성하지 않고 ‘나치로의 회귀’를 원하는 정신나간 주장으로 간주하였다. 민족을 들먹이는 것이야말로 죄악처럼 간주되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서독 학자 ‘에버하르트’는, “우리는 독일인임을 더 이상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자랑해야 한다”고 말했고, 작가 ‘패트릭 쥐스킨’은 “동독과 서독만큼 무관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신동방정책’의 전도사 ‘빌리 브란트’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후에도 ”(독일) 통일은 반세기 이후에나 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고, 독일통일에 가장 많은 악담을 했던 ‘권터 그라스’는 독일통일 이후에도 “독일은 통일과정에서 잘못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모두 잘못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직전까지도 서독국민들의 통일 의지는 매우 낮았고, 붕괴 후에도 통일을 진정으로 환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는 얘기다.

동독인을 동포로 생각한다는 서독인의 비율은 1970년 68%에서 1987년 52%로 줄어들었으며, 특히 29세까지의 젊은 층에서는 동독인을 ‘오스트리아인’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동포로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많았다. 베를린장벽 붕괴 후인 1989.12월의 여론조사에서도 절반의 응답자만이 ‘우리는 같은 민족이다’고 대답했을 정도였다.

독일의 정당들은 이런 여러가지 제약 속에서 통일정책을 수립, 시행해야만 했다. 그럼 기민당과 사민당의 통일정책을 보자.

기민당은 전후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었던 친미보수 정당이다. 기민당 출신 총리로는 ‘콘라드 아데나워’(1949~1963), ’루드비히 에르하르트(1963~1966), ‘헬무트 콜’(1982~1998)이 있다.

기민당 통일정책은 ‘자석이론(magnet theory)’이다. 자석이론이란 ‘힘의 우위’를 크게 유지할수록 자석에 쇠붙이가 딸려오듯 흡수통일이 된다는 주장이다. 기민당은 경제발전, 친미 친서방 및 대소련 강경외교, 서독의 주권회복, 서독의 유일대표권 확립. 통일보다는 자유 중시 등 ‘힘의 우위’를 추구했다.

하지만 변화도 있었다. 사민당에게 정권을 뺏겼다가 다시 찾은 후 기민당은 사민당이 추진했던 ’신동방정책’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추진했다. 그러나 통일의 기회 즉 베를린장벽이 붕괴되자, 기민당(헬무트 콜)은 사민당과 주정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독의 ‘국가연합 통일방안’과 ‘경제원조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여, 동독혁명을 흡수통일로 연결시킴으로써, ‘통일을 이룬 정당’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반면 사민당은 독일판 햇볓정책인 ‘신동방정책(neue ost-politik)’을 추진했던 진보정당이다. 사민당 출신 총리로는 ‘빌리 브란트’(1969~1974), ‘헬무트 슈미트’(1974~1982)가 있다. 신동방정책이란, 끊임 없는 대동독 지원과 동독과의 교류로 ‘접근을 통한 변화’를 일으키자는 ’작은 걸음 정책’이다.

사민당은 처음에는 진보정당답게 무조건적인 통일을 주장했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통일지상주의’나 ‘독일의 중립화’를 주장했고, 통일에 방해가 될 경우 “서구와의 동맹을 파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심지어 서독의 경제적 흡인력이 동독의 불안정과 붕괴를 야기하여 통일을 더욱 어렵게 한다는 주장까지 했다.

그 후 비현실적인 주장에 독일국민이 등을 돌리자, 대신 나온 정책이 ’빌리 브란트’의 ‘신동방정책’이다. 신동방정책은, 실제로는 통일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교류 협력을 통해 ‘사실상의 통일’을 이루겠다는 것으로, 통일정책이라기보다는 ‘분단의 평화적 관리정책’이었다.

(독일 사민당의 통일정책 변화 과정은, 우리나라 진보정당의 통일정책이 ’통일지상주의’에서 ’햇볓정책’으로 변한 과정과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사민당은 베를린장벽 붕괴 직후에도 ”동독 탈출자의 수용을 제한할 것”과 “점진적인 통일”을 주장하는 바람에, 통일을 반대하는 당으로 낙인 찍혔고 ’통일의 최대 패배자’로 인식되었다.

이상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당의 차이와 집권당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독일은 통일정책에서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두 당 모두 집권시의 대동독 정책은, 분단에 따른 인간적 고통완화와 동독주민의 ‘삶의 질’ 개선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으며, 인권문제에서는 양보하지 않았고, 기민당은 사민당의 신동방정책을 계속 추진했으며, 사민당은 기민당의 친미, 친서방 정책과 ’중앙기록보존소’(‘북한인권기록센터’와 유사함)를 계속 유지했다.

이런 일관성의 예는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동독에 대한 경제지원 원칙의 준수가 그것이다. 그 원칙이란 ”1) 동독이 먼저 요청할 때, 2) 반드시 대가를 받은 후, 3) 동독주민들이 서독의 지원사실을 인지할 수 있게 하는 방법으로” 라는 3대원칙과 더불어 정경분리 원칙, 시장경제 원칙이 그것이다.

서독은 대가 없는 지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항상 정치범 석방 등 실제적인 인권신장을 대가로 ‘현금지원이 아닌 현물지원’을 했다(현금지원은 딱 3번 했다). 그리고 정치범 선정, 몸값 지불 등은 서독 ‘개신교연합회’에 전적으로 위임했다. 동독정부가 인신매매범이라는 인식을 뒤집어쓰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일관성 유지의 또 다른 예로는 사민당의 대소련 강경책을 들 수 있다. 사민당의 ‘헬무트 슈미트’조차 집권 중 ’NATO의 2중결정’을 실행했다. ‘NATO의 2중결정’이란 1979년 소련의 SS-20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에 대응하여, 상호 철거협상을 추진하되 소련이 응하지 않으면 ‘퍼싱2 미사일’과 ‘크루즈 미사일’ 570여기를 서독에 배치하기로 한 결정을 말한다(싸드 배치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이상의 원칙 외에도 서독은 친서방 노선의 견지, 기본법의 영토조항 및 국적조항 유지, 동독 국가인정 거부 등에 대해 일관성을 유지함으로써, 소련과 동독이 잘못된 기대를 갖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도록 유도했다.

이런 통일정책 일관성의 배경에는, ’한스 디트리히트 겐셔’라는 사람이, 몇 번의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1974년부터 통일 때까지 무려 16년간이나 외무장관으로 재임했던 것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렇게 각 당은 자신들의 정책에 따라 통일을 추진하기는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어느 정당도 통일을 현실적인 정책목표로 설정하거나 적극적인 통일정책을 추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양당 모두 여러가지 이유로 동서독의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오히려 유럽통합을 먼저 하고나서, 그 틀 내에서 동독과의 통일을 모색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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