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26일 일요일

독일통일 -2 (동독의 사정)

2가지 중요한 사건의 ‘발생시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어야 본문 뿐 아니라 앞으로 연재될 글에 대해서도 종합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짜(1989.11.9)와 독일통일 날짜(1990.10.3)이다. 양자 간에는 약 11 개월의 차이가 난다.

첫 회가 나간 후, “동독을 북한에 그대로 대입하면 큰 오류를 범할 것”이란 의견이 있었다. 맞는 말씀이다. 그래서 동독과 북한의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우선 동독이 북한과 얼마나 차이가 많았는지를 보자.

통일 전 동독은 어떤 상태였을까? 이걸 이해하는게 독일통일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특히 1989.10월 이후 ‘라이프치히’ 등에서의 “대규모 시위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살펴보자.

간단히 표현하면, 통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만큼 동독은 안정된 상황이었다. 물론 겉모습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때문에 미래예측에 실패했다.

동독은 사회주의권에서는 가장 잘 살았고 최고의 복지국가였다.
공업력이 세계 10위권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그래서 동독은 사회주의 국가의 최전선이기도 했지만, ‘롤 모델’이기도 했다. 1989년 1인당 GDP가 9,700 불이었고, 그 이전 5년간의 경제성장률은 3.02%로 서독보다 높았다.

(물론 과장되었다. 그런데 이걸 믿고 서독은 통일비용을 적게 예상했다가 낭패했다. 예를 들어 막상 통일해보니, 한 푼도 없다던 외채가 200억 불이나 되어, 매년 총외화수입액 중 62%를 외채이자 갚는데 쓰고 있었다. 동독 내 국유재산을 팔아 통일비용을 조달하려고 했던 계획도, 동독이 빈 깡통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동독이 깡통계좌가 된 이유는, 1980년 이후 야심차게 추진했던 ‘전자 및 화학분야’ 투자의 실패, 그리고 경제성장률보다 훨씬 높게 연평균 7% 씩이나 증가하는 ‘복지지출’ 때문이었다. 이건 장기집권자 ‘호네커’가 서독과의 경쟁을 의식하여 무리한 복지를 시행했기 때문일 것이다(어느 나라든지 복지는 망국병이다).

반면 정치적으로는 그렇게 안정될 수 없었다.

우선 동독에는 조직적인 반체제 세력이 없었다. 통일 후 밝혀진 동독 비밀경찰(슈타지)의 자료에 따르면, 1989.6월 현재 동독 내 반체제 세력은 160개 조직에 2,500 여명이었고, 그 중 핵심요원은 60여 명에 불과했다.

(반체제 인사는 생기는 족족 서독에 팔았다. 판매단가는 두(頭) 당 5,300만원. 동독은 베를린장벽 붕괴 전까지 34,000 명의 정치범과 그 가족 25만 명을 수출했다. 여담이지만 수출품으로 변신하기 위해 일부러 정치범이 된 동독주민도 있었고, 그와 반대로 동독정부는 일반 형사범을 정치범으로 둔갑시켜 수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가끔 소규모 시위가 있었지만, 시위대의 요구사항은 ”여행자유 확대, 평화, 인권, 환경보호” 등으로 체제개혁과는 무관했다.

‘슈타지’ 규모도 대단해서 1,700만 명을 감시하기 위한 ‘슈타지’ 요원의 숫자가 예하 병력까지 포함해서 30만 명이 넘을 정도였다. (8,000만 명을 감시했던 나치의 게슈타포가 32,000 명이었음을 감안할 것). 주민 62 명 당 1 명 꼴로 슈타지 끄나풀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동독에는 소련군이 38만 명이나 주둔하고 있었다.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은 집권 후부터 “임금인상, 휴가연장, 주택공급, 여행자유 확대” 등의 정책을 펼쳐, 19년 동안이나 안정적으로 집권하고 있었다. 베를린장벽 붕괴 직전인 1989.5월 선거에서는 공산당의 득표율이 98.85 %나 되었다.

외교적으로도 미,영 등 세계 134개국과 수교하고 있을 정도로 동독의 지위는 확고했다. 이런 체제 유지에 대한 자신감이 동독 지도부로 하여금 서독의 ‘햇볓’을 받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했을 것이다.

동독은 서독과 총 7 차례의 ‘동서독 정상회담’을 했고, 서독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1976년 서독과 ‘우편,통신협정’을 체결한 이후, 연간 2 억통의 서신, 3,600만 건의 소포가 교환되었고, 1,500여 회선의 전화가 개통되어, 거의 제한 없는 교류가 이루어졌다.

상호방문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동독인의 서독방문은 연간 100만 명 이상, 88년에는 675만 명이었다. 난민도 많아서 1989년까지 서독에 정착한 동독인은 480만 명이었다(불법탈출로 인해 국경에서 사살된 동독인은 총 197명).

동독인들은 1971년 이후 서독 TV도 마음껏 시청할 수 있었다(공식허용은 1980년). 1985년 기준으로 서독TV 시청가능한 인구 중 94 %가 거의 매일 서독TV를 시청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예상 외로 인권상황도 매우 좋았다.

동독은 1973년 이후 ‘유엔인권협약’과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에 가입하여, 동 규범을 지켜야 했다. CSCE 의정서에는 ‘인권, 기본적 자유, 인적접촉 및 여행자유를 의무화’하고 있으며, 이 부분에 관한 한 ’내정 불간섭 원칙’은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이에 따라 서독정부는 인권, 여행 등에 관한 한 동독에게 양보한 적이 없었다. 아예 서독연방 헌법재판소는 1973년에 “인권문제를 양보하는 어떠한 합의도 해서는 안된다”고 판결해버렸다.)

이런 노력의 결과, 동독정부는 1984~85년 경에는 국경에 설치됐던 ’자동발사 장치’를 완전히, 그리고 지뢰는 상당량 철거했다. 1987년도에는 아예 사형제도까지 폐지했다!

쉽게 말해 동서독 간에는 언론, 방송, 학술, 과학, 기술, 환경, 보건, 문화, 스포츠, 청소년, 종교분야에 걸쳐 폭넓은 교류가 유지되고 있었고, 동독은 꽤 유연한 체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상의 온건한 동독의 대국민 정책은, 상당부분 서독의 각종 지원(특히 ‘빌리 브란트’ 총리의 ‘뉴동방정책’)에 대한 대가로 이루어진 면이 있어, 종합적으로 볼 때 이런 교류는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았다고 평가된다.

그래서 동독 입장에서는 서독이 소련 다음의 제2교역대상이 되었고, 서독과의 교역이 국민총생산(GNP)의 3%, 대서방 교역의 40~50%를 차지하게 되어, 서독 없으면 동독이 망할 정도가 되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동독의 교회다.
통일 직전 동독에는 신구교를 합쳐 8,000여개의 교회와 500여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있었으며, 동서독간에는 종교 교류가 활발했다. 이렇게 많은 교회에 잠재적인 반체제 세력이 은신하고 있었던 것도 1989년의 대규모적인 시위를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동독 주민들의 시위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유주의 정신’과 ‘민주적 사고방식’이었을 것이다.

동독주민들은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국가들이 갖고 있던 자유주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었고, 1919년~1933년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선진적 민주제도를 경험한 바도 있었다.

이상이 베를린장벽 붕괴를 야기한 ‘동독 내부의 사정’이었는데, 북한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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