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11일 일요일

그리스도인 여러분, 예루살렘에서 나가주시죠 – ‘구약성서로 철학하기’

[독후의 – ] 그리스도인 여러분, 예루살렘에서 나가주시죠

지적인 작업이자, 감각의 훈련이라는 두 영역이 만나는 충만한 쾌락의 세계, 독서 - 성실하게 까칠한 김영수가 쓰는 성깔있고, 색깔있는 책 이야기.

<구약성서로 철학하기>, 요람 하조니 지음, 김구원 옮김, 홍성사 펴냄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인가?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인가?”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의 말이다. 그는 아테네와 예루살렘, 이성과 계시,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을 상호적대적인 관계로 봤다. 참된 지식은 사도적 교회의 권위적 가르침을 통해서만 제시된다. 믿음은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기 마련이다. 세속의 지혜는 무익할 뿐 아니라 심지어 해롭다 등. 흔히 ‘반지성주의’로 번역되는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에도 유효해 보인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그의 말은 지난 1800년가량 사라지지 않은 그리스도교의 경향 하나를 간결하게 요약한다.
이성과 계시를 가르는 저 견고한 담을 교회 혼자 쌓아 올린 것은 아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철학에 맞서 신학의 독자성과 우월성을 확보하려 했다면, 근대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동일한 일을 정반대의 목적을 위해 했다. 르네상스 운동 이래 서양 근대의 핵심은 그리스 정신의 복원에 있었다. 계몽주의자들이 계시를 이성에 대비시킨 건, 그리스도교 신앙은 합리성을 결여했기 때문에 공적 영역에서 퇴출 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아테네의 후손을 자처하는 그들은 되물었다. 예루살렘이 도대체 아테네와 무슨 관계인가?
역사는 흔적을 남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감지되는 일종의 분열증을 볼 때 그렇다. 한국 교회 어디서든 테르툴리아누스를 만날 수 있다. 예루살렘의 우월성을 과시하듯,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은 철학을 비롯한 세속 학문 일반을 쉽게 경시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계몽주의자들의 법정에서 심문이라도 받듯 불안해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진리와 공적 가치를 세속 학문의 입회하에 변증 하길 원한다. 아테네의 승인을 바란다고 할까. 창조과학은 가장 노골적인 사례다.
이쯤에서 지금 다루는 책의 제목이 <구약성서로 철학하기>이며, 서론과 결론의 소제목이 각각 ‘이성과 계시의 이분법을 넘어서’와 ‘이성과 계시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지적하는 게 좋겠다. 이런 책을 집어들 때, 그리스도인 책 품을 만한 기대란 어떤 것일까? 먼저는 아테네와의 화해. 즉, 성서로도 합리적인 사유가 가능함을 입증할 것. 다음은 여전한 예루살렘의 우위. 그러니까 신앙에는 그래도 합리성을 넘어서는 차원이 있음을 보여줄 것. 요약하자면, 믿음은 합리성을 결여한 맹신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초월적 행위임을 증명하는 것. 지금까지 나온 언론 서평 대부분은 이 책이 그런 기대를 충족해준다고 말한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의 찝찝한 화해

단정적으로 말해야겠다. 이 책은 그런 기대를 전혀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아니, 상황을 악화시킨다. 원서의 제목은 The Philosophy of Hebrew Scripture, 즉 ‘히브리 성서의 철학’이다. 한국어판은 이를 ‘구약성서로 철학하기’로 옮겼다. 둘 사이에는 사소한 듯 보이는 차이가 있는데, 이 책의 본질적인 문제의식은 바로 그 ‘차이’ 안에 있다. 한국어판의 제목은 의도치 않게 무엇인가를 실토한 셈이다.
구약성서‘로’ 철학‘하기’로 옮겨진 결과 책의 목적은 ‘철학하기’로 고정된다. 저자는 실제로 성서로 ‘철학하기’를 시도한다. 나아가 몇몇 대목들, 가령 구약성서적 윤리의 핵심은 법의 절대적 순종이 아니라 반항에 있다는 통찰, 사회계약은 인민 사이의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이기에 통치 권력의 적법성은 민주주의적 동의뿐 아니라 모세 율법으로 구체화한 신적 권위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 구약성서에는 주체-객체의 구분이 없고 인식하는 이에 의해 ‘해석된 대상’만이 유일한 실재라는 지적 등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저 ‘철학하기’가 어디까지나 습작이라는 사실이다. 서론과 결론을 빼면 책은 1, 2부로 나뉜다. 소제목은 각각 ‘구약성서 읽어내기’(1부), ‘구약성서로 철학하기: 다섯 편의 사례 연구’(2부)이다. 1, 2부가 순서대로 각각 ‘구약성서’와 ‘철학하기’를 담당하는 것이다. 이상한 일 아닌가. ‘철학하기’가 책의 목적인데 고작 사례연구에 그치다니. 저자의 능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그럴 리가. 이유는 단순하다. 습작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철학하기’는 이 책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반복해 주장한다. 히브리 성서는 신약 성서와 다르다. “히브리 성서는 대체로 계시를 매우 중요하고 유용하게 여겼던 기독교적인 신학 주제들에 대해 무관심하다.”(20) 신약의 핵심 사상들은 “히브리 성서가 다루는 주제들 중 40위 안에도 들지 못한다.”(20) 히브리 성서를 계시로 읽으면 그것이 “본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상당 부분 ‘삭제’하게 된다.”(21) 히브리 성서를 오독하는 이유는 “기독교 교리라는 굴절 렌즈를 통해 그것들을 보기 때문이다.”(31) 이성과 계시라는 그리스도교적 이분법의 틀은 “히브리 성서를 해석하는 기초가 되어서는 안 된다.”(324)
무엇보다 히브리 성서는 ‘증언’이 아니다. 신약 성서는 이성으로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이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음을 ‘증언’하는 책이며, 그래서 ‘계시’다. 그와 달리 히브리 성서는 당시에 이미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을 다룬다. 어떤 비밀스러운 사실을 증언하려는 게 아니었다는 얘기다. 신약 성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문제 삼는다. 반면 히브리 성서는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관심한다. 즉, 히브리 성서는 이스라엘이 겪은 고난의 의미를 그들의 역사를 통해 해석하는 역사철학이자 바람직한 삶과 공동체의 본질을 가르치는 윤리학 혹은 정치철학에 가깝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히브리 성서는 계시라기보다 일종의 “이성적 저서, 다시 말해 철학책이다.”(51)
이 책의 심장은 2부가 아니다. 옮긴이는 “히브리 성서와 구약 성서는 목차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내용은 동일하기 때문에 구약 성서에 익숙한 국내 독자들을 위해 히브리 성서를 구약 성서로 표기했다”고 밝혔다(18). 하지만 정작 저자인 요람 하조니Yoram Hazony는 바로 저 ‘익숙함’을 문제시한다. 이 책의 목적은 Hebrew Scripture를 Old Testament, 그러니까 ‘옛 언약’을 뜻하는 구약(舊約)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이 책은 히브리 성서 구출기, 일종의 출애굽기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누가 예루살렘인가?

저자는 지금 그리스도교 성서의 합리성을 변증 하려 하는가. 그리스도교 성서로도 얼마든지 인문학적 사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목적은 히브리 성서를 신약 성서와 계시라는 해석학적 틀에서 해방하는 데 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철학은 그 수단에 가깝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카르타고 출신이라는 사실을 고려하고 아래 인용문을 읽자. 이 책의 결론이자 후속 작업의 방향을 제시한 문장이다.
“예루살렘은 아테네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카르타고와 멀리 떨어져 있을 뿐이다. 이제 예루살렘과 카르타고를 분명히 구분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래야만 예루살렘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아테네나 로마와 같은 도시들과도 제대로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322)
저자는 이성과 계시를 양 끝점으로 하는 이분법적 선분 위로 올라간다. 그리곤 히브리 성서를 밀어 의도적으로 이성 옆에 붙인다. 그래야 계시와 멀어지기 때문이다. 의도는 분명하다. 히브리 성서는 차라리 철학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계시, 즉 신약성서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 책은 분명 예루살렘과 아테네의 화해를 말한다. 다만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 뒤에는 예루살렘과 카르타고의 불화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쥐어짜서 질문 하나만 남기자. 아마도 이럴 테다. 카르타고가 도대체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인가?
“그때에 비로소 아테네와 로마와 같은 도시들과도 제대로 비교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은, 저자의 궁극적인 목적이 저 선분 안에서의 이동이 아니라 오히려 선분 바깥으로의 탈주에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적인 것’도 ‘그리스도교적인 것’도 아닌, 독자적 사상체계로서 ‘유대적인 것’의 확립. 하조니의 목적은 아마도 거기에 있다. 그 작업을 단걸음에 할 수 없기에, 히브리 성서를 신약 성서와 먼저 떨어뜨릴 뿐이다. 아직은 ‘습작’인 철학하기가 본격화되면, 아테네 역시 절교 편지를 받게 될 것이다. 실제로 하조니가 설립한 샬렘 출판사는 서양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의 고전을 히브리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활발히 진행 중이다(C. S. 루이스와 라인홀드 니버의 책도 번역되었다).

카르타고와 예루살렘은 무슨 관계인가?

아테네와의 화해를 기대하며 책을 폈지만, 정작 예루살렘에서 카르타고로 쫓겨나게 생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반지성주의로 환원될 수 없는 교부 신학의 다양성을 재검토하는 일? 신약 성서와 신학 전통 속에서 ‘이성’, ‘계시’, ‘증언’ 개념을 꼼꼼히 다시 살피는 일? 구약 성서와 신약 성서의 관계에 관한 신학의 역사를 되짚는 일? 무엇이든 좋지만 꼼꼼하고 정직한 독서가 우선이다. 좋은 책은 독자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지고 모험으로 내몬다. 좋은 독자는 불편한 질문을 외면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여 그 책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한다. 좋은 책과 좋은 독자가 만날 때, 한 권의 책은 사건이 된다. 이 책이 그럴 수 있을까. 의미 있는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 출판하는 것, 이것으로 출판사와 역자는 할 일을 다 했다. 남은 건 독자의 몫이다. 불편한 부분을 도려내고 읽고 싶은 대로 책을 읽는 것, 그래서 책이 제기하는 불편한 질문을 외면하는 것, 그것 역시 반지성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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