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4일 목요일

이성민,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 서평



한국에서 현대인이 철학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서양철학이든 동양철학이든 외국의 사상을 수입해야 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우선 독자적인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번역'이라는 장벽을 뛰어 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장벽을 뛰어넘는다 해도, '번역투'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평론가와 철학 전공자들은 이러한 '번역투'를 뛰어넘기 힘들다. '허지웅식 허세투'라고 인터넷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사실은 (대중에게 생소한) '번역투'에 다름 아니다. 나 역시 과거에 그러한 번역투를 애용했던 사람으로서 허지웅을 비난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성민은 과거 슬라보예 지젝의 다수 저작들(<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까다로운 주체>, 등등)을 번역함으로써 번역가의 이력을 쌓았던 사람이다. 신기한 것은 그가 번역한 글은 원문 그대로의 '직역'을 고집했던만큼 '번역투'의 전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평소에 자기주장을 쓰는 글은 '번역투'와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그는 충실한 번역가인 동시에, 번역투에 의존하지 않고 '한국어'로 자기 사유를 전개하고자 한 유일무이한 저자이다.

그가 집필한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바다출판사)은 바로 공식출판물 상에서 '한국어'로 자기 사유를 전개한 최초의 성공적인 시도이다. (솔직히 그의 전 저작인 <사랑과 연합>은 너무 난해했다.) 물론 한국말로 서구철학이나 동양철학을 자기 나름대로 소개하고 소화하려 한 시도들은 없지 않으나 대부분 애초에 자신이 소개하려 했던 철학보다 더 '천박'해지기 일쑤였다. 왜냐하면 애초에 자신이 소개하고자 하는 사상 이외의 자기 사상이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그것은 독일 관념론 철학의 전통에서 흔히 구분되는 '이념(idea)'과 '개념(concept)'의 차이를 해설하는 구절이다. 그는 일상적인 것들, 가령 아이들의 놀이, 직업선택의 자유, 이름과 성명, 언론의 자유라는 일상적이고 작은 주제에 주목한다. 나아가 그는 그러한 일상적인 것들이 '이념'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을 걱정한다. 원래 그의 책의 제목은 <작은 것들의 이념>이다. 비록 출판사의 상업적인 (동시에 매우 올바른) 판단 아래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각설하고, 그는 우리가 일상의 언어사용에 있어서 왜 우리가 '관념론자'일 수 밖에 없는지를 설명한다. 가령 우리가 맛있는 순대국밥을 먹을 때 '이 집은 순대국밥을 참 잘 끓여'라고 말한다. 그것은 순대국밥이 순대국밥답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헤겔식으로 말하면 '순대국밥의 개념에 부합'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즉 우리는 순대국밥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고 개별적인 순대국밥들이 그 '개념'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이상, 우리는 이미 부지불식간에 칸트-헤겔주의자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순간 식습관이 바뀌어서 순대국밥을 찾지 않을 때, 순대국밥이 순대국밥답다는 '개념'은 의미를 잃는다. 그때 순대국밥은 길가에 채이는 돌맹이 같은 것이고 우리는 길가에 채이는 돌맹이를 돌맹이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우리가 순대국밥을 더 이상 원하지 않을 때, 라캉식으로 말해서 순대국밥이 더 이상 욕망의 대상-원인이 아니게 될 때, 순대국밥은 순대국밥으로서의 '이념'을 잃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독일관념론에서 '이념'과 '개념'의 차이를 이토록 쉽고 직관적으로 설명한 사례를 보지 못했다.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순대국밥을 더 이상 아무도 찾지 않고 순대국밥이 순대국밥으로서의 이념을 잃는다 해도 순대국밥 식당 주인들 외에는 슬퍼할 사람들이 없다. 하지만 순대국밥만큼이나 일상적인 무언가가 자신의 이념을 잃고, 더 이상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을때 슬퍼해야 할 일들이 있다. 이성민이 <작은 것들의 철학>에서 한탄하는 것은 바로 이 작은 것들, 가령 아이들의 놀이, 아버지의 성을 따라 이름을 짓는 관행, 직업선택의 자유, 친구들 앞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자유, 등등이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세태이다. 특히 인권담론과 페미니즘이 이 작지만 중요한 문제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다고 개탄한다는 점에서 이성민은 분명 보수주의자이기도 하다. 이 말은 일리가 있다. 인권담론과 페미니즘은 작은 것들에 관심을 갖는다고 스스로 자처하지만, 사실은 일상의 문화와 관행에 전혀 관심이 눈곱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지금까지 성과 이름의 구분이 있었는지 제대로 생각하지도 않는 주제에, 그냥 성을 아버지와 어머니의 것을 번갈아 쓰면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무지하고 멍청하다. 그들이 왜 멍청한지를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책을 읽으면 된다. 그리고 그들이 한국말로 다시 한번 스스로 사유해보기를 권한다.

여하튼 이성민이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에서 아이들의 놀이와 교육에 주목하는 것은 굉장히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가 요새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동기간의 또래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문명'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또래 아이들이 서로 자신의 욕망과 아집을 타협하고 공통의 규칙을 세워가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어머니-아이 간의 수직적인 관계로 이야기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문명의 기초로 생각하는 정신분석학은 틀렸다. 오히려 문명이라는 것은 아버지-어머니와의 관계를 떠나, 아이가 다른 아이들의 다름과 같음을 인정하고 같이 놀이를 하면서 공통의 규칙을 만들어가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성민이 보기에 사실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동서양 공통의 황금률도 바로 이 아이들의 놀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공자와 마호메트 그리고 예수의 '황금률'도 바로 이 '아이들의 놀이'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공자와 마호메트를 그리고 예수를 사상적으로 길러낸 것은 그들의 부모가 아니라 그들과 '또래집단'을 형성한 동기-제자들이다. 인류의 문명은 바로 이 "작은 것들" 혹은 "일상적인 것들"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오늘날 더 이상 아이들은 골목길에서 놀지 않는다. 피구왕 통키 놀이도, 땅따먹기 놀이도, 고무줄 놀이도 하지 않는다. 골목길과 놀이터에서 사라진 그 아이들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메갈과 일베라는 가상의 놀이터에서 놀고 있다는 것이 나의 심증이다. 이것은 문명이 붕괴하고 있다는 징후이다.

[출처] 이성민,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 서평|작성자 박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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