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일 화요일

노동가치론은 낡았는가 - 노동가치론의 수리경제적 모형화에 대하여



0. 들어가며
 최근 류동민 선생의 저작이 출간되었고 미약하게나마 노동가치론과 그 수리경제적 모형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인 것 같다. 아직은 제대로 정독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꼭 제대로 읽어보고자 한다. 수리경제학적 배경지식과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기초교양이 있는 독자라면 읽어볼만 하겠다. 아무튼 이 책이 출간된 것을 계기 삼아 관련해서 몇가지 품고 있었던 생각을 끄적여 본다.


1. 노동가치론은 무엇인가
  노동가치론은 한 마디로 인간의 경제활동을 추상화하는 한 가지 방법론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주류경제학의 효용가치론을 보면, 인간이 각자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물건을 교환한다는 이미지로 현실의 경제활동을 포착하고 있다. 한편 노동가치론은 인간과 인간이 물건을 교환하는 것 이면에서 경제적 분업 아래 각자의 사회적 노동을 부지불식간에 교환하고 있다는 이미지로 경제활동을 포착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19세기적인 패러다임이다. 마르크스의 패러다임은 다른 19세기 고전파 경제학자들보다 더 심오하고 질적으로 다르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면 논의가 너무 복잡해지므로 이쯤 해 두자.

  분명한 것은 19세기적인 패러다임이라고 해서 이론적으로, 실무적으로, 완전히 폐기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드-필류의 말대로 "마르크스의 저작이 19세기에 씌었기 때문에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주장은 바보 같은 것이다."1 오히려 노동가치론은 일상의 상식 상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는 나머지 이제는 더 이상 이론적 관심사가 되지 않을 뿐이다. 존 로크의 고전적인 17세기 사회계약론이 오늘날 모든 정치사회적인 토론에서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듯이 말이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사회계약론의 가정을 문제 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일례로 국가간 생산성을 비교할 때 마치 당연하다는듯이 너도 나도 '노동생산성'을 비교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노동가치론의 패러다임을 전제한다. 나아가 생산활동을 측정하는 척도로 고용을 기준으로 삼는 사고도 노동가치론의 패러다임 위에 서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에 새삼스레 주목하지 않는다. 정치사회에서 사회계약론이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는만큼 노동가치설이 일상의 사고에 부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노동가치론의 공리를 보다 명시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① 아무리 많은 유무형의 자산이 쌓여 있어도 노동이 투입(혹은 착취)되지 않으면 (기업과 가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제순환'은 일어나지 않는다. ② 노동의 투입(혹은 고용) 없이는 부가가치 또한 창출되지 않는다. 아래와 같은 마르크스의 언급이 바로 19세기적인 노동가치론의 패러다임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어느 국민이나 일년이 아니라 두서너 주일 동안만 노동을 중지해도 죽게 된다는 것은 어떤 어린애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욕망에 상응하는 상품의 양은 다양하고, 양적으로 특정한 사회적 총노동의 양을 필요로 한다는 것도 누구나 알고 있다. 사회적 노동을 일정한 비율로 분배해야 할 이러한 필요성은 절대로 사회적 생산의 특정한 형태를 통해서 지양되지 않고 단지 그 현상방식만을 바꾼다는 것은 자명하다.
- 1868년 7월 11일, 맑스가 루드비히 쿠겔만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노동을 그만두면 경제가 마비되고 따라서 모두가 죽는다. 이러한 평범한 사실은 자본이 축적되고 기술력이 발달하면 할수록 더욱 더 첨예해진다. 신고전파의 저속한(vulgar) 언어를 빌려 말하면, 자본이 축적될수록 노동은 희소해지며 노동이 희소해지는만큼 가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본이 축적되고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노동을 어떤 영역에 얼마만큼 분배할 것인지는 그만큼 더욱 중요해진다. 또한 자본과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노동력의 사소한 중단과 역기능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노동가치론의 직관이다. 이것은 또한 마르크스이든, 리카도이든, 스미스이든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공통적으로 품었던 직관이다. 이러한 사고를 이론적으로 부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실무적으로는 결국 이런 생각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실제로도 국민계정과 자금순환표를 보면 노동가치론의 사고가 암묵적으로 녹아들어 있다. 애초에 고용이 이뤄져야만 비로소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순환이 시작, 혹은 갱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주류경제학은 이론적으로 자본과 노동이 생산요소로서 '개별적으로' 그리고 '동시적으로' 투입됨으로써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한다고 말한다. 이때의 가치를 유용성이나 효용으로 본다면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경우, '가치'와 '사용가치(=효용)'를 엄밀히 구분한다. 사용가치 상에서 자본과 노동은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이는 마르크스도 엄연히 인정하는 사실이다.2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주체가 생산하고, 교환되고, 분배되는 (화폐화된) '경제적 가치'의 유일한 원천은 노동이다. 애초에 그러한 경제적 가치의 순환은 고용의 갱신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업(자본)이 노동을 고용하지 않으면, 투자와 고용에서 시작해서 상품의 판매와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재구매로 이어지는 경제순환의 사이클은 시작되거나 갱신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은 바로 이러한 경제순환에 대한 (오늘날에도 자명한) 직관에서 출발한다. 마르크스는 경제순환을 '자본순환(capital circuit)'이라고 말한다. 기계가 쓸모 있느냐 노동이 쓸모 있느냐(=유용하냐)는 문제는 이러한 경제적 (부가)가치가 생산영역에서 출발해서 교환영역과 분배영역에서 순환될 수 있느냐의 문제와 하등 관련이 없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경제순환이 자본가의 고용(=노동력의 구매)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주류경제학자들도 이론에서는 노동가치론을 부정할지는 몰라도 이러한 마르크스와 여타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직관을 결국 실무에서 따를 수 밖에 없다.


△ 마르크스의 자본순환 도식


2. 착취란 무엇인가
  이렇게 보면 착취라는 것도 별 거 아니다. 노동이 투입되어야 경제순환이 시작되며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그래야만 스티브 잡스의 아이디어이든, 공장이든, 건물이든 유무형의 자산에 돌아갈 소득이 발생한다. 한편 노동이 경제순환과 부가가치의 원천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소득에 별도로 자본소득이 항상 존재한다. 착취론은 힙(hip)하지는 않지만 이처럼 회계적으로 자명한 사실이다. 노동이 투입됨으로써 비로소 발생하는 경제적 부가가치는 언제나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으로 나누어진다. 예컨대 스티브 잡스 같은 개인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내놓기 위해 노력한 것 이외의 몫이 항상 존재한다. 어차피 한 개인의 아이디어와 건물과 기계 그리고 원료도 과거의 집합적인 노동의 산물인데 단지 자본의 소유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경제적 부가가치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현실. 그것이 바로 착취이다. 물론 이러한 착취론만으로는 가령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후려치는 것, 정규직이 비정규직의 희생 위에서 고용을 보장받는 것, 국가가 세납자를 기만하는 것 등의 구체적인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로크의 사회계약설이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구체적인 갈등, 예컨대 정당간의 갈등, 시민사회 내의 갈등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3. 노동가치론의 비과학성?
  한편 노동가치론의 비과학성을 비판한답시고 노동가치론은 반증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오히려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주류경제학의 효용가치론은 반증가능한가? 인간의 선호패턴이 일관적으로 정해져 있고 그에 따라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합리적 선택을 하는가? 거기에 대한 무수한 반론이 행동경제학과 인지과학에 의해 주어져도 '어찌되었든 이렇게 보는 것이 얼추 들어 맞는다'고 얼버무리지 않는가? 나는 그것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라 사회과학의 방법론이 인간실존의 구체를 추상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모든 사회과학의 방법론의 근원을 끝없이 캐묻다보면 근거없음(abgrund)의 심연에 도달하는 것 아닐까? 마찬가지로 헌법의 기초를 이루는 사회계약론의 철학도 어떻게 보면은 하나의 소설적 허구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4. 노동가치론은 개개의 수리적 모형으로 흡수될 수 없다
  이제 노동가치론의 수리적 모형화로 돌아가 보자. 노동가치론을 엄밀하고 일관된 모형으로 개념화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되묻고 싶은 것이 있다. 노동가치론을 수리경제적 모형으로 정교화하는 것과 그것으로 현실을 예측하고 설명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 아닌가? 금융위기에서 이미 보았듯이 주류경제학도 전자를 잘한다고 해서 후자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노동가치론을 수리적으로 모형화하면 그래서 뭘 설명할 수 있다는 건가?

  나는 여기서 마르크스의 직관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경제과정을 '자본순환'이라는 도식 아래 파악하려 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2권, 3권으로 가면, 자본순환=경제순환은 수 많은 상호연관된 자본의 투입과 회수가 반복적으로, 그리고 비동시적으로 이뤄지는 과정으로 파악된다. 특히 자본순환의 비동시성과 투입 및 회수의 시차가 언제나 현실적인 경제문제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 애초에 수리경제학이 표상하는 왈라스적 일반균형 따위는 있을 리 없다. 노동이 투입된다고 해서 전부 다 가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이 가치화되었다가 그 가치가 파괴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위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노동가치론을 하나의 일관된 화폐적 모형으로 개념화한 데 성공한 신해석도 논리상으로는 훌륭하지만 이마저도 경제과정의 사후적인 결과를 포착할 따름이다. 그렇게 해서는 공황을 설명할 수 없다. 그걸 설명할 수 없으니 자꾸 일부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이 일반이윤율(뒤메닐, 레비) 타령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이윤율하고 경제위기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뭐 이것도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어쨌든 결론은 이렇다. 노동가치론은 하나의 강력한 직관이자 패러다임이다. 이것을 각자의 방식대로 모형화할 수 있다. 노동가치론이라는 하나의 패러다임을 폴 사무엘슨의 방식으로, 모리시마의 방식으로, 스티드만의 방식으로, 던컨 폴리의 방식으로, 클리만의 방식으로, 류동민의 방식으로 모형화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가치론은 하나의 직관적인 패러다임이기 때문에 개개의 모형으로 흡수될 수 없다. 노동가치론의 개별적인 수리적 모형에 대한 시시비비는 노동가치론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직관과 별개로 생각해야 한다. 만일 경제학의 한 패러다임이 구체적인 경제모형에 대한 시비로 무너질 거였다면 과거 60-70년대의 자본논쟁으로 주류경제학은 진작에 무너졌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조안 로빈슨 등의 포스트 케인즈주의 경제학자들이 당시 폴 사무엘슨 등이 내세웠던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의 자본이론이 논리적으로 비일관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주류경제학자들을 말 그대로 박살 내 버렸다. 그러나 주류경제학의 (인간이 물건을 교환해서 각자가 최대의 효용을 얻는다는 이미지로 포착된 경제시스템) 세계관은 아직도 건재하다. 나는 이러한 주류경제학의 세계관을 전복하려는 것도 아니고 전복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20세기적인 주류경제학의 패러다임도 자본주의의 본질을 자본주의의 태동기에서부터 직관적으로 포착한 19세기적인 노동가치치론의 패러다임을 전복할 수 없다. 오히려 주류경제학은 저 19세기적 패러다임을 자기 나름대로 흡수하고 자기화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  *  *

  이 같은 글은 이른바 내생화폐론 중에서 순환학파(circuit school)를 다루기 위한 하나의 작업 노트이다.
  내 생각에 화폐는 '본질적으로' 내생적이다. 화폐는 중앙은행에 의해 외생적으로 공급되는 명목변수가 아니다. 내생화폐론에 따르면, 화폐는 경제주체들이 수요하는만큼 중앙은행이 공급한다. 중앙은행이 이른바 본원통화(M0)를 공급한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 화폐유통량을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중앙은행은 화폐의 수량이 아니라 화폐의 가격(이자율)을 통제할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화폐는 내생변수이다.
  아무튼 화폐의 본질적인 내생성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화폐 그 자체를 볼 것이 아니라, 화폐가 생성되고 소멸되는 하나의 사이클인 '화폐순환'을 봐야 한다. 즉 화폐순환은 어디서부터 출발하고 어디서 종결되는가, 하는 문제를 해명해야 한다.
  그것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마르크스의 '자본순환'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르크스의 사고대로라면, 본격적인 경제순환=자본순환은 자본이 노동력을 구매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자본이 노동력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미리 화폐자본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 화폐자본은 처음부터 자본가의 수중에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자본론 2권>에서 마르크스가 제기하는 이론적 질문이다. '그렇다면 화폐자본은 맨 처음에 어디에서 오는가?' 마르크스는 금본위제라는 19세기적인 시대적 한계 때문에 이 문제를 끝까지 다루지는 않았다.
  한편 순환학파에 따르면, 그것은 자본가가 필요로 하는 투하자본에 대한 은행대출 및 각종 금융기관으로부터의 대출에서 온다고 대답한다. 따라서 화폐의 본질은 '신용'이다.
  순환학파에 따르면, 주류경제학의 통념처럼 예금이 대출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신용=부채가 대출을 창조한다. 은행은 (신용할만한) 기업의 자본순환에 필요로 한 자금을 대출해준다. 생산영역의 측면에서 자본주의는 노동착취의 경제이지만 교환영역의 측면에서 자본주의는 빚의 경제이다. 이 두 측면은 서로 맞물려 있다. 화폐의 이런 저런 잡다한 기능(교환수단, 회계의 단위, 축장수단, 등등)과 별개로 화폐의 본질에 대한 이론적 고찰은 바로 이러한 이중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1]알프레두 사드-필류, 전희상 역, <마르크스의 가치론>, 2001, 17p.
[2] 칼 마르크스, <고타 강령 비판>

[출처] 노동가치론은 낡았는가? - 노동가치론의 수리경제적 모형화에 대하여|작성자 박가분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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