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6일 금요일

히틀러를 초대한 평화론자들-4

이제 ‘가짜 전쟁(Phony War)’이라는 용어가 등장할 때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도 서유럽국의 ‘평화 지상주의’가 만든 작품이다. (그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기세 좋게 선전포고를 했다. 하지만 폴란드를 보호해 주겠다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번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아니, 하긴 했다. 시늉만 내서 그렇지. (그래서 ‘포니 워’라는 별명이 붙었다.)

영국은 1939.9.30 까지 14만 명의 병력을 프랑스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공세로 나설 계획은 애초부터 없었다. 프랑스군은 1939.9.7 독일로 진격했다. 하지만 독일군이 ‘지그프리트 선’ 너머로 철수하자 8 km 정도 들어간 지점에서 정지했다. 프랑스군은 발만 겨우 걸친 상태에서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고, 그마저도 폴란드가 항복하자 곧장 다시 프랑스로 철수했다. 이게 ‘포니 워’의 전말이다.

만약 연합군이 그 때라도 전면공격을 했다면’ 폴란드군과 싸우고 있는 독일은 큰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군 50 개 사단은 사실상 당시 독일이 가동할 수 있는 전 병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유럽 쪽에는 11개 사단만이 남아 지키고 있었다. (전쟁 말기 독일군 사단은 300 개에 달했다.)

반면 독일 쪽 국경선에 배치되어 있던 연합군은, 프랑스군만 하더라도 그 10 배에 달했다(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육군이 강하다). 하지만 아무리 유리해도 뭐하나? ‘전쟁공포증’에 빠진 나라가 공격을 할 리 없었다. 실제로 전쟁 후 독일의 ‘빌헬름 카이텔’ 원수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 초반, 우리는 ‘지그프리트 선’과 ‘마지노 선’ 사이에서 국지적인 소규모 교전 외에는 별다른 군사행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우리는 왜 프랑스가 이 소중한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서방 열강이 우리와는 전쟁을 벌일 생각이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앞에서 말했던 ’폴 레노’ 수상과 정쟁(政爭) 했던 ’가므랑’ 원수는 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프랑스 출산율은 매우 낮다. 1차대전 때처럼 피를 흘리는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인적자원이 없다. (그 때 20대의 40%를 포함하여 프랑스 젊은이 160만 명이 죽었음). 인명손실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한 과학전쟁을 해야 한다.”

(출산율이 걱정되니 과학전쟁을 하잔다. ㅋㅋㅋ “핑계의 샘은 마르는 법이 없다”는 명언 – 이거 내가 만든 말 – 이 생각난다!)

한편 이 무렵(1939.11.30~1940.3.13)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는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한 ‘겨울 전쟁(Winter War)’이란게 있었다. 무능하고 비효율적인 소련군은 핀란드를 얕잡아 보고 무질서하게 쳐들어 갔다. 핀란드군은 강력하게 저항했고 소련군은 크게 고전했다. (유명한 핀란드 스나이퍼 ‘시모 해위헤’도 이 때 활약했다). 이 전쟁에서 핀란드군은 25,000 명이 죽었는데 위대한 ‘붉은 군대’는 20만 명이 죽었다. 이를 본 히틀러는 ‘소련을 쳐도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도 결국 핀란드는 ‘겨울 전쟁’에서 패하여 땅을 뺏기고 평화조약(?)을 체결했지만, 대신 소련에게 원한을 가졌다. 그래서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을 때, 독일과 함께 소련을 쳐들어가서(계속전쟁ㆍContinuation War) 빼앗겼던 땅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이후 독일의 패배가 명백해지자 독일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또 다시 소련과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그 땅을 또 뺏겼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핀란드는 종전 후,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는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아마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을 혼내준 것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제 히틀러는 대서양과 북극해를 장악하고 자원도 더 확보해야 했다. 그래야 소련을 쳐들어가도 서유럽의 소련지원을 차단할 수 있었다.
다음 먹이는 노르웨이였다. 독일은 노르웨이 철광에 의존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노르웨이를 치기 위해 경유지인 ‘덴마크’로 쳐들어갔고(1940.4.9), 덴마크 정부는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하여 당일에 항복했다. 독일군은 곧장 노르웨이까지 쳐들어가, 뒤늦게 노르웨이에 들어온 영국군에게 개피를 발라주면서 노르웨이까지 점령했다.

이제 유럽 대륙에는 프랑스와 ‘베네룩스 3국’(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만 남았다.
1940.5.10 히틀러는 ‘베네룩스 3국’과 프랑스를 동시에 쳐들어갔다. 이 날 영국의 ‘바보벌린’은 사임했고 ‘윈스턴 처칠’이 새 총리가  되었다.

1차대전 때처럼 ‘독일군이 벨기에를 통해 들어오고 있다’고 확신한 프랑스군은 벨기에 쪽에 전력을 투입했지만  그건 히틀러의 양동작전이었다. 히틀러는 프랑스 바보들이 ‘통과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아르덴’ 숲을 지나 ‘마지노 방어선’을 우회하여, 프랑스군을 남북으로 가르며 파리로 쾌속 진격, 프랑스의 항복을 받았다.(1940.6.22).

세계는 경악했다.
1차대전 때 독일은 4년 여의 기간 동안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 200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면서도 영국과 프랑스에게 패했었다. 그 때문에 반란까지 일어나 카이저(빌헬름 2세)는 쫒겨났고, 독일 땅과 국민들을 잔뜩 뺏기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히틀러의 군대는 겨우 13,000 명의 전사자만 내면서 두 달도 안돼 프랑스를 정복한 것이다.

한편 프랑스로 들어간 독일의 다른 전차부대는 프랑스 서부 ’뒹케르크’ 해변으로 달렸다.
지원군도 없고 병참선도 끊기고 철수할 항구들까지 점령당한 영국과 프랑스군 36만 6천 명이, 좁고 엄폐물도 없는 ‘뒹케르크’ 해안에 바글바글 모여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이라는 철수작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물거리다가는 몰살 당하거나 전원 포로가 될 위기였다.

다행스럽게도 평년과 다른 기적같은 날씨가 계속되어 ‘다이나모 작전’을 도왔다. 비가 오면서 독일군 탱크부대는 15 km 전방에서 진창에 빠졌고, 낮은 구름은 독일공군의 시야를 방해했으며, 잔잔한 바다는 작은 배까지도 운항 가능하게 했다. 연합군은 온갖 크고 작은 배 약 900 척을 징발, 독일공군의 폭격을 받으면서 1주일간에 걸쳐 철수작전을 수행했다. 이 작전에서 영국은 항공기 177대, 호위함 10척을 잃었다.

날씨 덕에 성공했지만(사실 날씨가 영향을 준 전쟁은 많다), 대부분의 장비를 ‘뒹케르크’ 해변에 버려두고 왔기에, 이후 영국은 미국이 참전할 때까지 내내 장비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곧 이어 영국에서는 ’다이나모 작전’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던 “바보벌린 등 대(對)독일 유화론자들이 이 대재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내용의 ‘죄인들(Guilty Men)’이란 책이 나와 영국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윈스턴 처칠’도 이 책에 동조적이었다.

프랑스가 항복하자 프랑스 함대에 대한 처리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막강한 전력의 프랑스 함대가 어느 쪽에 붙느냐에 따라 양측의 전력이 좌우될 정도였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항복문서에는 ‘추축국 감시 하에 무장을 해제한다’는 조항이 있었지만, ’다를랑’ 제독은 프랑스 정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알제리 항구에 함대를 집결시켰다.

영국정부와 런던으로 망명한 ‘자유 프랑스군’은 프랑스 함대를 연합국에 합류시키거나, 최소한 프랑스 해군이 자침시켜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협상이 실패하면서 결국 영국해군이 프랑스 함대를 포격해 몽땅 침몰시켰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 해군 1,200 명이 죽었다. 이런 비극도 발생하는게 전쟁이다.


이제 남은건 영국 뿐이었다.
독일의 영국 상륙작전인 ‘바다사자 작전(Operation Sea Lion)’이 성공하여 독일군이 상륙하면, 육군이 약한 영국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영국은 패닉상태에 들어갔다. 당시 영국주재 미국대사 ‘조지프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는 미국정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이제 영국은 끝이다.”

이번에도 히틀러가 평화공세를 폈다.
“나는 영국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하지 않으며 대영제국을 높이 평가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1940.7.19 에는 이렇게 말하며 평화협상을 제안하기도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이성과 상식에 호소하는 것이 나의 양심에 관한 문제이기 이전에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나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없다 …… 앞으로 지속될 전쟁에 희생될 사람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나는 독일국민들을 위해서라도 그러한 희생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 눈물나게 아름다운 말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또 ‘평화 지상주의자’들이 등장한다. 일부 영국인들이 히틀러와의 협상을 통해 평화를 달성한다는 생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들이 내세운 논리는 이랬다.

“영국이 고개를 숙이면(평화협상 제안을 받으면), 위기감을 느낀 미국이 중립에서 벗어나 독일에게 대항할 것이다. 그러면 소련도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독일과의 협력을 재고할 것이다.” (평화만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핑계의 샘이 마를 리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항전을 지지했고, 이후 치열한 항공전에서 영국이 승리하여, 히틀러는 ‘바다사자 작전’을 몇 차례 연기하다가 결국 취소했다. 여기에는 ‘런던 공습’을 결정한 히틀러의 전략적 실수가 있었다고 한다.

원래 독일공군은 영국 공군기지에 대한 폭격에 전념했었다.
그런데 독일 폭격기 1대가 실수로 ‘런던’에 폭탄을 떨어뜨렸고, 그 보복으로 영국 공군은 ‘베를린’을 폭격했다. 그 바람에 머리가 돌아버린 히틀러가 ”영국인들이 우리 도시에 폭탄을 떨구었으니 우리는 그들의 도시를 완전히 쓸어버릴 것이다”라고 연설한 후, 독일공군에게 “영국도시를 폭격하라”고 명령했다. 그 덕에 빈사상태에 몰렸던 영국공군이 재편성되어 독일공군과 항공전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히틀러는 이듬 해 ‘독ㆍ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 붉은 수염 작전)’을 승인하며, 1941.6.22 소련으로 쳐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영국은 간신히 살아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그런 식으로 전개되었다.

여담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도덕적으로도 인류에게 엄청난 딜레마를 안겨 주었다. 나중에 소련이 연합군에 합류하면서 연합군은, 히틀러 못지 않게 사람을 학살한 스탈린을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소련은 부인하지만 소련이 독일군을 몰아낸 데에는 이런 막대한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독일과 싸우는 소련에게 미국이 제공한 트럭만 해도 44만대였다.)

전쟁 중에 수 많은 작전을 하는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거나 이용당한 ‘착한 사람들’(예를 들면 각국의 망명 정부와 그 군인들, 유태인 및 집시들, 제3국가들)이 눈물을 삼켜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또한 전후에는 동구라파 여러 나라가 공산화되면서 소련의 위성국가로 편입되어, 국가가 수 십년 간 정체되거나 국민들은 압제에 신음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천만다행으로 독립하여 오늘의 한국이 되었다.

이 전쟁에는 56개국이 참전했다. 그리고 독일군 280만 명과 민간인 200만 명이, 소련군 630만 명과 민간인 1,700만 명이, 서유럽 연합군 180만 명과 민간인 1,050만 명이… 총 5,500만 명이 죽었다.    

이 글의 도입부에서 나는 2 개의 어이없는 현상이 히틀러를 초대했다고 말했다.
첫째, 힘도 없는 주제에 ’평화 지상주의’에 물들었던 것, 둘째, 힘도 없는 주제에 ’평화조약이니 불가침조약’이니 하는 ‘종이 쪼가리’에 목을 맸다는 것.

긴 얘기를 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평화? 그거 말로 되는게 아니다. 조약? 그거 언제든지 쓰레기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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