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4일 수요일

히틀러를 초대한 평화론자들-3

이제 히틀러의 침공 과정과 그 과정에서 있었던 서유럽의 어이 없는 대응을 보자.

전체적으로 볼 때 이 과정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은 히틀러의 계속적인 위협 ㆍ회유ㆍ도발과 서유럽의 거듭되는 양보와 합리화다. 서유럽은 왜 그랬을까? 그 때문에 독일군은 이웃 나라를 합병하면서 더욱 강해지지 않았는가?

히틀러를 과격분자로만 생각했지, 과대망상증 환자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히틀러의 지도력으로 독일이 안정될 것”이라며 히틀러의 집권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1차대전 때 영국총리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데이빗 로이드 조지’는 “히틀러가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준 것에 찬사”를 하기도 했다.)

히틀러의 독일이 소련의 공산주의로부터 서유럽을 막아줄 것이므로(독일 방파제론!), 그건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더구나 당시 유럽은 경제위기로 인해 대부분의 국가가 전쟁은커녕 기존 군사력을 유지할 돈도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서유럽식 양보ㆍ합리화의 기저에 깔려있던 심리는 ’평화 지상주의’ 였다. 다시 말해서 “무조건 평화!”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이 서유럽 정치인들과 국민들에게 먹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전쟁을 하기 싫어했다. 그래서 무조건 전쟁을 피했고 비현실적인 희망에 목을 맸다. 이걸 눈치챈 히틀러는 적어도 1938. 8월까지는 위협과 호전적인 외교를 적절히 구사하면서 야욕을 실현해 나갔고, 서유럽이 수수방관 하는 사이에 이웃 나라들을 합병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어느새 서유럽은, 엄청나게 커진 독일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진 자신들을 보게 되었다. 서유럽은 히틀러를 제어할 여런 번의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 그 과정을 보자.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 무효’를 주장하더니 국제연맹을 탈퇴했다(1933.10). 이어 교묘한 외교술을 펼치며 폴란드와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어(1934.1.26) 폴란드를 안심시켰다.(이것도 나중에 휴지조각이 된다!)

다음 해에는 징병제를 실시했고(1935.3), 상비군을 50만 명으로 증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육군항공대의 형태로 숨겨놓았던 공군의 존재를 공개하기도 했다. 대부분 ‘베르사유 조약’ 위반이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자신감을 얻은 히틀러는 ’라인란트(Rheinland)’에 눈독을 들였다.

‘라인란트’란 독일과 벨기에-룩셈부르크 사이 라인강 유역으로 ‘베르사유 조약’으로 만들어진 영구 비무장지대다.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의 의지를 시험해보기 위해 ‘라인란트’를 점령했다(1936.3.7). 역시 ‘베르사유 조약’ 위반이었지만, 이번에도 영국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영국 눈치만 보았다.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두려워 한다고 간주했다. (이 때의 영국과 프랑스의 무대응은 아직도 최악의 실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라인란트’를 점령하자 히틀러는 고향 ‘오스트리아’에 눈독을 들였다. ‘오스트리아’의 나치 당원인 ’잉쾨르트’ 총리가 독일군을 초대하는 형식으로, 독일군은 ‘오스트리아’에 진주하여 두 나라를 합병시켰다(1938.3). 역시 ‘베르사유 조약’ 위반이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지식인들은 ‘한 민족이나 다름 없는 두 나라의 합병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자신들의 무대응을 합리화했다.(핑계는 언제나 있다!)

다음은 ‘체코’였다.
체코의 ’주데텐란트(Sudetenland)‘는 체코와의 국경선 지역으로 300만 명의 독일계 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자치권을 요구하며 소요사태를 일으키고 있었다. 히틀러는 ‘체코’에게 ‘주데텐란트’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서유럽은 고민했다.

그러자 히틀러는 “저는 단지 체코에 있는 350만 명의 독일인들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뿐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서유럽 지식인들은 히틀러의 말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맞다고 생각했다. (핑계는 언제나 있다!)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도 히틀러의 말을 믿고 히틀러를 달래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프랑스와 협력하여 체코 총리를 설득하기로 했다. 영국 입장에서는, 히틀러가 ‘주데텐란트’에 군대를 진주시키더라도, 폴란드와 루마니아 영토를 지나 체코를 지원할 수도 없다는 현실인식도 있었다. 프랑스 입장에서도 체코와 ‘상호 방위조약’이 체결되어 있었지만, 프랑스는 체코를 위해 전쟁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두 나라 모두 전쟁공포증에 빠졌음을 기억하시라.)

드디어 당사국 체코는 초대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영국ㆍ프랑스ㆍ독일ㆍ이태리가 참석한 가운데 ‘뮌헨회담’이 개최되었고(1938.9.29), 독일에게 ’주데텐란트’를 넘겨준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여기서 잠깐! 당사국이 배제된 채 이루어진 조약이라면… 그렇다. 앞에서 기술한 ‘로카르노’ 조약도 그랬다. 폴란드의 운명이 걸린 회담이었는데도 폴란드는 그 조약 협상 테이블에서 배제되었었다. 이게 국제질서다. 국제적으로 왕따 당하면 이렇게 된다. 우리끼리 우물 안에 모여 삿대질하며 남의 나라 암만 욕해봐야 국제적인 지지가 없으면 이렇게 당한다.)

‘뮌헨회담’에서 히틀러는 “‘주데텐란트’를 받으면 이후 체코와의 국경선을 존중하겠다”고 서명했다.(아시다시피 이것도 나중에는 휴지조각!). 뮌헨에서 돌아온 ‘체임벌린’은 영국 공항에서 히틀러가 서명한 합의문을 흔들어 보이며, “이 시대의 평화를 보장 받았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다음 해에 체코를 침공하며 프라하에 입성했다.(1939.3.15). 당연히 뮌헨회담은 ‘실패한 유화책의 대명사’가 되었고, 체임벌린은 ‘바보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나는 그를 ‘바보벌린’이라고 호칭하겠다.).

이제 폴란드 차례다.
체코가 점령당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그제서야 전쟁이 불가피 하다고 보았다. (정말 둔하리만큼 늦었다!) 영국국민들도 분노했고, 이런 분노를 반영하여 영국은 폴란드에게 군사적 안전보장을 약속했다.

바보벌린은 1939.3.31 하원 연설에서 ”폴란드 독립을 명백하게 위협하는 어떤 행동이 발생할 경우 …….. 영국정부는 온 힘을 다 해 폴란드 정부를 도와야 한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영국정부는 이를 위해 폴란드 정부에게 보증을 했다. 나는 프랑스 정부도 이 문제에 관해 영국정부와 입장이 같다는 것을 공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라고 말했다.(바보라 그런지 말도 배배 꼬아서 한다!).

이어서 바보벌린은 1939.4.6  폴란드와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이것도 나중에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정말이지 국가 간 협정은 국익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걸 느끼자는게 이 글의 목적 중 하나다!) 이태리가 발칸반도의 ‘알바니아’를 침공하자 바보벌린은 ’루마니아’ 및 ‘그리스’와도 군사동맹을 체결했다(1939.4.13). 징병제도 도입했다. (이제 와서 뭐하겠다는건지…?)

과연 히틀러는 폴란드에게 ‘단치히’가 있는 ‘동프로이센’으로 가는 길(‘폴란드 회랑’)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당시 독일에서 동프로이센으로 가기 위해서는 ‘폴란드 회랑’을 지나야 했다. ‘폴란드 회랑’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폴란드에게 뺏긴 독일 땅이다. 바다로 가는 유일한 길을 폴란드가 내놓을 리 없었다.

히틀러에게는 폴란드가 말을 듣던 안듣던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치기로 했지 않은가? 히틀러는 사기로 체결했던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1934.1.26)의 무효화를 선언했다.(1939.3.28). 이제 히틀러가 폴란드를 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히틀러는 폴란드를 치기 전에 소련의 ‘스탈린’을 꼬셨다. 그래서 양국 외무장관의 이름을 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 일명 ‘독ㆍ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는 ‘폴란드를 둘이서 나눠먹자’는 조항도 있었지만 비밀로 했다. (이 조약 역시 2년 후 히틀러가 소련을 치면서 쓰레기가 되었다).

물과 불 같은 존재의 두 나라가 조약을 체결하자 세계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독ㆍ소 불가침 조약’은 두 놈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히틀러로서는 나중에 서쪽(프랑스와 벨기에)을 치기 위해 동쪽(폴란드와 러시아)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스탈린으로서는 히틀러의 공격을 늦추고 폴란드까지 먹고 싶었던 것이다.

동쪽을 정리한 히틀러는 드디어 50 개 사단을 동원하여 폴란드를 치고 들어갔고(1939.9.1), 이 날이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일이 되었다.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 ‘작전명령서’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독일 동부 국경지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을 평화적인 수단으로 해소할 수 있는 모든 정치적 가능성이 무산되었기에, 마침내 무력에 의지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멋진 문장이지만 원래 사기꾼의 문장은 아름답다.)

바보벌린은 독일군이 1939.9.3. 09:00 까지 철수하지 않으면 전쟁에 돌입한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히틀러는 바보는 그만 벌리라며 무시했다. 철수기한이 지나자 바보벌린은 이렇게 말했다.

“독일은 최후통첩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영국은 독일과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제야 정신 차리고 말을 간단하게 하는군!)

프랑스도 비슷한 최후통첩을 보냈다. 역시 마감기한(17:00) 까지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도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래봐야 프랑스는 나중에 개박살이 난다. 영국은 개박살 나지는 않았지만 개박살 나기 직전까지 몰린다. 모두 자신들 탓이다. 그렇지 않은가?)

폴란드는 나름대로 분전했지만, 멋있고 고풍스러운 기마부대로 최신예 독일탱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설상가상까지 덮쳤다. 1939.9.17 스탈린이 “소련 정부는 더 이상 ‘소련-폴란드 불가침조약’(1932.7.25)의 구속을 받지 아니한다”고 말하더니 동쪽에서 소련군까지 쳐들어온 것이다. (‘조약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라고 말한 자가 바로 스탈린이다.)

이건 폴란드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과 같았다. 폴란드는, ‘동서 양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한다’는 안드로메다 같은 계획 따위는 아예 세워놓지도 않았었다.

결국 한 달도 못 버티고 1939.9.27 ‘바르샤바’는 독일군에게 함락되었고,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이 나누어 잡쉈다. 폴란드 정부는 바르샤바를 탈출하여 프랑스에서 망명정부를 세웠다가 나중에 프랑스마저 무너지자 런던에 자리를 잡았다. 폴란드군 병사 9만 여명도 탈출했다.  

여담이지만 나중에 폴란드는 ‘카틴 숲 대학살 사건’도 겪는다.
이는 1940년 소련 비밀경찰이 포로로 잡은 폴란드군 장교, 교수, 경찰, 의사 등 폴란드 지도층 인사 22,000여 명을 처형한 다음 ‘카틴 숲’에 암매장한 사건이다. 꼭 그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그 후 똘똘한 지도자들이 사라진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한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이 대량 학살됐던 1921년 ‘자유시(알렉셰프스크) 참변’과 유사하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이렇게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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