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2일 월요일

히틀러를 초대한 평화론자들-2

앞에서 2차대전 전(前) 독일의 사정을 살펴 보았다. 이제 서유럽의 사정을 보자.

1차대전 초기에 행진하는 각국 군인들의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대부분 웃거나 떠들면서 마치 소풍가는 기분으로 참전했음을 알 수 있었다. 모두들 몇 개월이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은 4년 4개월이나 끌면서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

1차대전은 ’산업화’와 ‘과학화’의 성과가 본격적으로 전쟁무기에 활용된 최초의 전쟁이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많은 적군을 가능한 한 뻘리 죽이는 무기가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그러자 인류가 상상하지 못했던 규모로 사람들이 죽었다. 군인과 민간인이 각각 700만 명씩 총 1,400만 명이 죽었다.

너무나 참혹한 전쟁이 문명세계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게다가 2차대전 직전 각국의 정치지도자들은 대부분 1차대전의 참호 속에서 비참한 전쟁의 현실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반전(反戰)ㆍ염전(厭戰) 의식이 온 유럽을 지배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반성했다. 그래서 ‘평화 지상주의’, ‘협상 우선주의’가 절대선(善)으로 등장했고, 사람들은 1차대전이야말로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믿었으며 또 희망했다. 그런데 불과 20년 만에 1차대전보다 훨씬 더 큰 인적ㆍ물적ㆍ도덕적 대가를 치러야 하는 2차대전이 일어났다.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평화 지상주의’다.
 
영국을 보자.

영국의 문학계는 반전(反戰)ㆍ염전(厭戰) 서적이 압도적이었다. 영국군 병사들의 참전기가 봇물을 이루었지만, 대부분 1차대전의 비참한 상황을 묘사했을 뿐이었다. 빛나는 승리로 간주한 책은 거의 없었다. 그러자 영국인들은 무조건 평화를 원했다.

질문 형태의 평화투표(Peace Ballot)가 있었고 압도적인 숫자가 평화를 주장했다. 예를 들어 ‘국제협정에 의한 전면적인 군축을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1,000만 명이 찬성했고 반대는 77만 명 밖에 되지 않았다. 옥스퍼드 대학생들은 ‘옥스퍼드 유니언 토론회(Oxford Union Debate)’를 통해 “우리 학생들은 더 이상 왕과 국가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다”라고 결의했다.

1차대전 발발 전, 영국에게 빚을 지지 않은 나라가 없을 정도로 유수의 채권국 가운데 하나였던 영국은,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세계 최대의 채무국으로 전락했다. 대공황까지 몰려오자 국방예산은 대폭 삭감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전쟁을 위한 무기나 전략ㆍ전술 개발에 소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영국은 히틀러의 독일에 대항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요약한다면 반전ㆍ염전 의식에서 비롯된 ‘평화 지상주의’와 빈약한 국방 투자, 이게 영국의 사정이었다..

지정학적으로 영국보다 불리한 프랑스는 어땠을까? 

프랑스는 1차대전 때’ 진지방어전’의 성과, 즉 ‘결국 이겼다!’는 생각에 만족하여 생각이 진지방어전에 꽂혔다. 그래서 독일이 공격해오면, 1차대전 때처럼 막대한 희생을 치루게 하여 공격을 포기하게 만들겠다는 ‘방어주의’ 전략을 세웠다. 그 전략의 절정이 ’마지노 방어선’이고, 그런 정신이 ‘마지노 정신’이다.

하지만 ‘어떠한 공격도 물리칠 수 있다’는 ‘마지노 정신’은 오히려 전략선택의 폭을 크게 제한했다. 막대한 비용(70억 프랑)을 들여 건설한 ‘마지노선’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공격전ㆍ기동전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드 골’이 기동전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프랑스 국방장관은 “수 십 억 프랑을 들여 구축한 요새 방어선을 버려두고 어떻게 공세로 나설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마지노 방어선’에는 병영ㆍ병원ㆍ탄약고ㆍ연료창고ㆍ환기시스템까지 있어, 설사 적에게 포위되더라도 항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프랑스가 히틀러에게 항복한 후에도 ‘마지노 방어선’에 남아 저항하던 병사들이 있었다.) ‘페텡’ 원수는 “전쟁이 터졌을 때 전사하게 될 병사들의 목숨과 맞바꾼 강철과 돈”이라고 자랑했다. 유지비도 엄청 들었다. 당연히 다른 쪽 국방예산은 삭감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마지노 방어선’에도 약점이 있었다. ‘아르덴’ 숲 쪽과 ‘벨기에’ 쪽에는 건설되지 않았던 것이다. 예산문제도 있었지만 다음과 같은 전략적 고려가 있었다.

먼저 ‘아르덴’ 숲에는 소로(小路) 밖에 없어 독일군 전차가 일렬로 길게 들어와야 했다. 따라서 프랑스는 그 숲이 독일군의 침공로로는 사용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반면 ‘벨기에’ 쪽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건설되지 않았다.

“독일이 공격한다면 (1차대전 때처럼) 벨기에를 경유하려고 할 것이고, 그러면 벨기에는 (1차대전 때처럼) 즉시 중립을 선언할 것이다. 벨기에가 중립을 선언하면 프랑스군은 벨기에로 진입할 수 없다. 따라서 벨기에를 중립국이 아닌 연합국으로 만들어 놔야 한다. 그러면 독일이 벨기에를 칠 때, 프랑스군은 동맹국인 벨기에로 들어가, 거기에서 독일군을 막을 수 있다.”

이 개념은 유일한 공격전략이었지만 막상 히틀러가 벨기에를 쳐들어가자 실행되지 못했다. 공격을 포기하고 방어에 치중하는 ‘전쟁 공포증’에 빠진 나라가 그런 공격전략을 실행할 리 없었다. 나중에 히틀러는 ‘벨기에’를 치면서 주력은 ‘아르덴’ 숲을 통과하게 하여 ‘마지노 선’을 우회, 프랑스를 점령한다.

게다가 프랑스에는 하나의 약점이 더 있었다. 비판을 능사로 여기고, 소련을 조국으로 생각하며, 평화 만을 외치는 프랑스 특유의 좌파들이 득세했던 것이다. 독일의 천재 선전상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그런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괴벨스는 프랑스의 좌우 대결을 부추기고 영국과 프랑스 간의 동맹을 이간질시키는 심리 공작을 했다.

독일 선전부는 “영국의 대(對)독일 강경책 때문에 프랑스마저 전쟁에 휘말릴 것”이라며 반전(反戰)ㆍ반영(反英) 사상을 선동했고 결국 프랑스는 분열되었다. 이런 분열은 정치권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는 독일이 침공해 왔을 때 항전파였던 ‘폴 레노’ 수상과 온건파였던 ‘가므랑’ 총사령관의 정쟁(政爭)을 들 수 있다.

하지만 ‘폴 레노’도 그렇게 강단있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후일 얘기지만 ‘폴 네노’는 영국수상 ‘처칠’의 항전 설득에 동의했다가. 이내 정부(情婦) ‘포르트’ 백작부인의 설득에 다시 뒤집곤 했다. 그래서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여자는 내가 낮 동안 열심히 해놓은 일을 밤에 다 돌려 놓는다. 나는 그녀를 설득할 수 있지만 그녀와 잠을 잘 수가 없다.”

프랑스 우파는 좌파들의 분열책동과 쌈박질만 하는 정치권에 신물이 났다. 어느 정도냐 하면 공산주의의 씨를 말린 나치 독일에 은근히 호감을 가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히틀러가 쳐들어 왔을 때도 열심히 싸우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프랑스 지도부가 항복하는 모습을 보고 일부 국민들은 “패전은 안된 일이지만 저런 놈들이 당하는 걸 보니 속이 다 시원하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고 한다.

프랑스는 이미 좌우로 분열되어 정신적으로 패배한 상태였던 것이다.

벨기에는 어땠을까?
1차대전 때 혼쭐이 난 벨기에는 전쟁이 끝나자, 영국ㆍ프랑스와 ‘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했고 징병제까지 실시했다. 하지만 1926년 무렵이 되자 벨기에 정부에는 “독일이 쳐들어오면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할텐데 뭐하러 강력한 상비군을 유지하느냐?”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그러다가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자 다시 국방에 투자하여 60만 명의 육군을 보유했다. 하지만 벨기에 역시 침범당할 경우에만 방어전을 한다는 수비 위주의 전략을 유지했다.

폴란드는 어땠을까?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있는 폴란드는 지정학적 영향으로 역사 자체가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1차대전 중에는 많은 폴란드인들이 독일군ㆍ러시아군ㆍ오스트리아군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비극까지 연출했다. 그래서 1921년 프랑스와 ‘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이 조약은 나중에 휴지조각이 된다.)

게다가 독일ㆍ영국ㆍ프랑스ㆍ이태리ㆍ벨기에가 모여 ‘로카르노 조약’을 체결하자(1925.10.16) 불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로카르노 조약’은 독일과 독일 주변국인 프랑스ㆍ벨기에ㆍ체코 사이의 현 국경선을 존중하며 침범하지 않겠다는 조약이었다. (물론 이 조약도 나중에 휴지조각이 된다.)

‘로카르노’ 조약으로 서부 쪽의 국경선이 안정되면, 히틀러는 동부에서 잃었던 영토 회복에 전념할 것이다. 동부란 바로 폴란드다. 더구나 폴란드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 땅(폴란드 회랑)을 차지하고 있었다. 폴란드는 그 ‘회랑’ 덕분에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폴란드 회랑(Polish Corridor)’이란 ’베르사유 조약’으로 떨어져 나간 독일 영토인데, 그 때문에 독일은 동프로이센으로 가기 위해 폴란드 영토를 지나야 했다. 그 끝에는 국제연맹의 보호를 받는 자유도시 ‘단치히’가 있다.

[여기서 잠시 강조하고 싶은게 있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는 자기나라 군사력만으로 전쟁하는게 아니다. 어느 나라를 정복하면 그 나라의 무기와 자원 뿐 아니라 국민들까지 자국의 군대에 편입시킨다. 이런 식으로 전력을 확충해 가면서 전쟁을 계속한다. 칭키스칸도 그랬고 히틀러도 그랬고 모두가 그랬다.

전쟁의 속성이 그러하므로, 만약 최초의 정복국이 어느 나라를 지나갔다가, 전황이 역전되어 후퇴하면서 또 그 나라를 지나가게 되면, 그 나라 국민들은 불가피하게 양쪽으로 나뉘어 싸운 전과(前科)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국민들 간에 갈등이 야기된다.

이런 피해를 본 대표적인 나라가 폴란드다. 2차대전 때 독일은 폴란드를 거쳐 소련을 침공했고, 후퇴하면서 다시 독일군과 소련군이 지나갔다. 사실 폴란드 뿐 아니라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이 그런 비극을 겪었을 것이다. 그런데 워낙 전쟁이 자주 일어났던 지역이라 그런지, 유럽은  별로 그런 갈등이 없었던 것 같다. 우리의 친일파 논란과 관련해서 음미해 볼 일이다.]

이제 히틀러의 침공 과정과 그 과정에서 있었던 서유럽의 어이 없는 대응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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