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0일 토요일

히틀러를 초대한 평화론자들-1

전에 읽었던 2차대전 책을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 초반 부분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있어 그 부분만 다시 보았는데, 내가 다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개다.

첫째, 당시 유럽에 넓게 퍼진 ‘평화 지상주의’가 양보를 거듭하게 하여 히틀러의 간땡이를 붓게 만들었다는 점과 둘째, 그 많던 국가 간의 ‘조약’이 모두 쓰레기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조금 길어지겠만 내가 이해한 부분을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얘기와 곁들여 설명해 보겠다.

내가 읽은 책은 가볍지 않다. 부록까지 포함하면 950 페이지나 되고 9명의 전문가가 저술했다. 그래서 그런지 서문을 쓴 사람은 자부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무리 재능이 있는 역사가라 하더라도 자신의 일생 동안 세계대전의 정치적ㆍ군사적ㆍ인간적 복잡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세계대전의 다른 부분은 포기하는 대신 특정 부분의 전문가가 되는 쪽을 선택한다.”

나는 2차대전의 그 복잡한 배경과 수 많은 전투를 자세히 기술할 생각이 없으며 그럴 능력도 없다. 다만 서두에서 얘기했듯이 2 개의 어이 없던 현상에 대해서만 쓰고자 한다. 이건 남북이 정전상태에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정신 자세’와 평화협정을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하는 ’평화 지상주의’에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먼저 ‘제1차세계대전’의 최종 산물인 ‘베르사유 조약’부터 보아야 한다. ‘베르사유 조약’(1919.6.28)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 31개 연합국과 패전국인 독일이 맺은 조약으로,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체결. (1871년 ‘프로이센’이 ’독일제국’의 성립을 공식 선포한 곳이 그 방이었음을 감안하면, 독일 국민들은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것)
-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승전국들의 땅 따먹기에 불과. (그 때는 그게 당연한 시대니까…)
-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이태리ㆍ일본이 ‘연합국 이사국’으로서 협상을 주도. (이 조약으로 일본은 ‘산동반도’를 먹었고 태평양 ‘저먼 군도’를 영국과 나눠가졌다. 일본이 이 정도였으니 당시 국제질서에 까막눈이었던 조선의 독립 열망이 얼마나 허망한 몸부림이었던가?)
- 1차대전이 몽땅 독일의 책임임을 명시. (이게 말이 되나?)
- 독일에게 엄청난 전쟁배상금(66억 파운드)을 물리고 독일의 모든 해외 식민지를 박탈. (그 땅을 영국ㆍ프랑스ㆍ남아공 등이 나눠 가짐)
-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보장. (오스트리아와의 합병 금지!)
- ‘라인란트’ 지대를 비무장지대화 하는 등 독일 국토와 국민을 각각 13%, 10% 씩 박탈 (그 땅과 국민을 프랑스ㆍ벨기에ㆍ덴마크ㆍ폴란드ㆍ리투아니아가 나눠 가짐)
- 독일의 육군병력을 10만 명 이내로 제한(1차대전 말 독일 육군은 400만 명이었음), 군함 보유량은 10만 톤 이내로 제한, 징병제 금지, 전차ㆍ중포ㆍ잠수함의 건조 및 보유 금지, 항공기나 공군의 보유 금지. (이건 최약체 군사소국으로 만들겠다는 심뽀)
- 그 밖에 연합국 이사국들 최혜국 대우, 연합국 상품 불공정 규제 철폐, 주요 산업시설과 탄광 양도 의무화 등.
- 이상의 내용을 보고 열 받지 않는다면 독일국민이 아닐 것임. 물론 그 후 ‘도스 안’(Daws Plan, 1923)과 ‘영 안’(Young Plan, 1929)이 비준되어 독일의 배상금은 상당히 경감되었지만, 이미 울화통이 터진 독일 국민들의 마음을 돌리기엔 늦음.

다음엔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은 배경을 알아야 한다.

- 1차대전 패배에 따른 독일국민들의 상실감과 무력감. (엄청난 땅과 인구를 뺏김)
-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함. (1차대전 때의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 – “이 조약은 평화조약이 아니라 20년 기한의 휴전조약에 불과하다.”)
-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독일국민들의 배신감. (공산주의자들이 등에 칼을 꽂아 패배했다는 의식. 히틀러는 이를 이용하여 공산주의자들을 탄압)
- 1차대전 후 등장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 (국민들은 자유를 만끽했지만 그만큼 무정부 상태에 가까워 빈번한 좌우 충돌과 반란)
- 전쟁배상금을 물지 못하는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독한 대응. (마지막 한 푼까지 받아내겠다는 의지로 배상금 지급이 지연되자 1923년 독일의 ‘루르 공업지대’를 점령)
- 이상에 추가하여, 미국 ‘월 스트리트’ 발 대공황(1929.10.29)으로 인한 경제 불황. (미국이 돈을 회수하자 세계경제는 엄청난 타격. 1 파운드 = 100억 마르크)

열 받은 독일국민들은 하도 절치부심해서 이빨이 아플 지경이 되었다. 독일국민들은 독일국민 답게 ’한스 폰 젝트’라는 유능한 상급대장의 지도 아래, 1차대전 패인을 연구하는데 엄청난 시간을 들였고 철저하게 연구했다. 그 결과 혁신적인 전쟁 교리(敎理)를 개발했다.

대표적인게 보병ㆍ기갑병ㆍ공병ㆍ해병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제병합동전술’, 전문 기갑사단을 운영하고 이를 이용한 ‘기동전(전격전)’ 전술, 그리고 일선 지휘관들에게 자율성과 유연성을 부여한 ‘임무형지휘체계’를 들 수 있다.

그 때까지만해도 전차는 보병을 보조하는 역할만 했었다. 전차는 보병의 행군속도에 맞추어야 했으며, 그나마 전선을 돌파하는데만 쓰였기에 필요에 따라 찔끔찔끔 투입되었다.

독일은 고정관념에서 탈피했다.

전차와 장갑차로만 구성된 사단을 만들고, 모든 전차에 무전기를 부착하여 유기적 협조체계를 갖추었으며, 보병을 전차의 속도에 맞추게 함으로써 순식간에 주요 거점을 확보하는 기동전술을 창안했다. ’전차의 아버지’라는 ‘하인츠 구데리안’의 작품이었다.

‘임무형지휘체계’도 혁신적이었다. 그 때까지 전투는 최고 지휘관의 돌격명령에 따라 일제히 진군하여 서로 부딪히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현장 하급 지휘관에게까지 상황에 맞추어 임기응변할 수 있는 자율성과 유연성을 주었다. 독일 제3기갑사단의 어느 보고서에 있는 ‘기갑부대가 원하는 장교상’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기동부대의 지휘에 있어 고정된 공식을 원하는 학자 타입의 장교는 즉시 기갑부대의 상징인 검은 전투복을 벗어야 할 것이다. 그런 장교는 기갑부대의 정신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독일은 새로 개발한 교리를 열심히 연습했다.

연습 때는 ’베르사유 조약’의 규제를 피하기 위해 모형 전차를 이용하기도 했고, 소련과 ‘라팔로 조약’을 맺어(1922.4) 소련에서 유능한 장교와 항공기 조종사를 양성하기도 했다. 실제 2차대전 때 독일의 유명한 지휘관들은 이 때 양성된 경우가 많았다.(소련 역시 똑같이 유능한 지휘관들을 배출했지만 1936~8년 스탈린의 대숙청 때 모조리 숙청되어, 독ㆍ소 전쟁 초기에 소련군이 호되게 당한 원인이 되었다.)

이상이 당시 독일의 사정인데 연합국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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