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16일 토요일

시민과 선비

한국사회에서 과연 '시민사회'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져본 사람은 나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가사회와 구별되는 광의의 (시민)사회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419, 518, 6월항쟁을 거치며 어찌되었든 국가사회, 정치사회와 변별되는 어떤 기저의 사회적 에너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좋든 싫든 강력하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진보적 식자들이 상정하는, 유럽식 시민윤리, 씨빌리테라는 것이 결핍되어 있다는 불평은 여기저기서 쉽게 들을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런 것이다. 한국사람들은 일단 억울한 일, 피해를 당하면 목소리를 내고 항의하는 것에는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다. 대한항공 박창진씨처럼 모두가 거기에 응원을 보낸다. 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규칙이 있다. 피해자는 어디까지 피해자로 남아 있어야 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권력'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일정한 사법적 권환을 진상조사위에 부여하도록 요구했던 세월호 유가족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너무 정치적이다'는 둥의 이중잣대에서 엿보이듯이.

또 한가지, 피해자에 대한 동정여론은 강해도, 각자는 그 자신이 가해자가 될 것이라는 가능성은 절대로 상정하지 않는다. 등심위에서 학생들이 막되게 굴면 우리가 보이콧하고 피켓 들어야 한다, 는 교직원의 발언에서 인상적이었듯이 권력을 가진 사람도 종종 자신을 피해자의 입장에 놓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나도 학생 때 운동해봐서 아는데"는 단골메뉴이다. 책임 질 사람은 없고 문제상황이 되면 스스로를 피해자나 불쌍한 위치에 놓고 말하는 한국사회를 가만히 보면 피해자만 존재하고, 아무도 스스로 가해를 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위치에 스스로를 두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은 역으로 말해서 그 누구도 권리의 주체, 책임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전전 일본사회를 두고 말한 "무책임의 체계"에 가깝다. 물론 한국에서는 일본사회와 달리 공적 도덕성, 명분우위의 지사적 태도가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정작 그러한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정치인'은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다.

결국 한국 시민사회의 미성숙이란 절대적 정의, 대의명분에 대한 유교적 관념은 강하지만, 권력관계에 대한 감수성의 결여로 특징지어질 수 있을 것 같다. 가해자가 된다는 것과 가해자가 될 가능성을 추문(scandal)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나는 그에 관한 적절한 여성주의적 문제제기를 '일다'에서 방금 보게 되었다. 예컨대 성폭력 예방교육은 피해방지 중심이 아니라 가해방지 중심으로 가야 하는데, 그 경우 공동체에 긴장을 (예컨대 남자아이를 둔 부모)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여성주의 이데올로기 전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타자에 대한 괴롭힘은 성적 교섭의 본질이기 때문에, 이런저런 괴롭힘의 가능성들을 끝없이 폭로만하는 것은 성인에게나 아이에게나 바람직하지 않다. 여자아이들 치마를 들추고 아이스께끼를 하지 말라고 꾸중을 할 수 있어도, 그것을 일종의 성폭력이라고 불러야 할까? 애매하다. 아이들 세계의 순진무구한 잔인성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는 근대적 인권개념과 별개의 척도가 필요하다. 나는 동기간의 '성폭력' 고발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성인이 된 이후 고정된 상하간의 권력관계 아래서 그런 일이 일어날 때의 그 함의를 생각할 때 여성주의적 고민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컨대 대학원사회의 교수 학생간 성폭력은 실수나 아이들끼리의 장난이나 싸움이 아니라, 한쪽의 일방적 폭력이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반복'되는 구조에서 폭발하는 문제이다.

한편 여성주의와 무관한 나름의 입장을 정위해보자.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것은 남녀노소를 떠나서 내가 그만한 권력관계의 우위에 있다는 점을 상정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그만한 이니셔티브가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원리상 은밀하게 가해자가 될 가능성과 그에 대한 문제제기를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그때 가해자로 있을 수 있는 위치임을 상정하는 것은 권력의 주체 혹은 담지자로서 자신의 책임을 자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자신이 그러한 권력을 의욕하는 당사자라는 자각이 결여되어 있으면 이 모든 논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피해자 담론만이 횡행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피해자로도, 가해자로도 양쪽에 놓고 볼 수 있는 시점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여성주의가 받아들여질 리도 만무하다.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남자가 남자다운 사회에서만, 마쵸이즘이 일종의 미덕으로 통용될 수 있는 사회에서만, 예컨대 여성을 유혹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문제제기를 (실제로 그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거리낌 없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수용하는 사회에서만 여성주의는 근거를 가질 수 있다. 성적 차원에서 '유혹' 혹은 '추파던짐'이 하는 역할을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권력의지로 치환해서 생각해 보자.

남녀구도를 넘어서 말한다면, 결국 시민성, 씨빌리테 시민윤리는 권력이라는 폭력적 수단 그 자체를 흠모하는 미학적 전통(딱히 마키아벨리즘으로만 돌릴 수 없는, 발터벤야민과 데리다의 '게발트' 논의)이 희박하고, 행위의 정당화의 원천으로서 유교적 대의명분관이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양자에 각인된 지금 이 실정에서, 오히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들어서기 힘든 지점이 있다. 즉 공론에서 발언한다 해도 봉건적인 의미에서의 '선비'와 '우국지사'만 있고, 실제 생활세계 내에서 권력의지의 주체와 대상으로 스스로를 표명하는 '시민'은 없는 셈이다.

따라서 나는 한국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시민운동 혹은 교육과, 계몽 등이 아니라(사실 그러한 자기교육, 자기계몽이라는 민간의 전통은 서양보다는 한국의 유교적 전통이 훨씬 우수하다고 생각한다), 그 필요성을 인식하는 당사자들이 직접 행정권력을 잡는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사회는 그 스스로가 시민사회로서 조직되기 위해서라도 강한 권력을 필요로 한다. 재벌, 거대언론, 사학, 공직부패 등의 혁파도 필요하지만 기존의 혈연, 지연, 종교, 학교 중심의 사회적 연관을 단절시키는 데에는 일정한 폭력과 강한 국가의 힘이 필요하다. 당장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은 과거 브라질 룰라정권이 사업장에 노동조합을 설립하도록 의무화한 것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그러 종류의 강제력이 필요한 사회적 영역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최저임금 문제도 그렇지만, 노사관계법도 손 볼 게 한 두개가 아니고, 학생회도 의무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그러한 필요성을 위해서는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지상명령이 선거기간마다 진보진영에서 강박처럼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해악과 폐단은 물론 두 말할 나위 없지만 적어도 '우리가 다시 돌아가야할 현장'으로 생각하는 기층의 시민사회에 대한 관념을 일정부분 다시 돌아볼 필요는 있다.

무엇보다 한국사회에서의 시민교육은 결국 권력의지를 고취시키는 교육이어야 한다. 그것을 우회한 착한시민 만들기, 이 모든 것이 만악의 근원이다.

[출처] 시민과 선비|작성자 박가분
http://blog.naver.com/paxwonik/220321931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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