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12일 화요일

교회, 평화로운 공동체?

'평화'를 선언하면 평화가 이뤄지는가?
지난 주말 교회청소년들에게 평화교육을 할 수 있도록 교사들을 훈련하는 워크숍을 했다. 거기서 얘기한 것을 조금 더 정리해 쓰기로 했다. 워크숍의 목적에 맞지 않아서 현장에서 다루지 못한 얘기를 좀 더 해보기 위해서다. 내가 평화학자, 평화교육자임과 동시에 기독교인인 관계로 종교공동체인 교회와 평화의 관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사실 기독교인이 아니거나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이 이슈에 제법 관심이 있다. 종교인들의 집합체인 교회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 뒤섞이는 경험을 시시때때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회와 평화에 대해 얘기하려는 것은 기독교적 관심 때문만이 아니라 한국사회 내 하나의 구성 영역 내지 주체인 교회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관심 때문이기도 하다.

흔히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평화의 종교'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기독교인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당연히 '평화가 이뤄져야 하는 곳'으로 생각한다. 또는 교회가 곧 '평화의 공동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평화를 선언하면 평화는 자동적으로 이뤄지고 교회 안에서 평화는 보장되는가? 다시 말해 구성원들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와 그것을 지원하는 평화로운 구조와 문화가 형성되는가? 답은 한 마디로 'NO!'다. 평화는 결코 선언을 통해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선언은 자기 합리화를 강화하고 비평화의 상태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평화를 왜곡하거나 평화적 성찰과 행동을 도외시하는 심각한 부작용도 낳는다. 평화를 이루는 과정은 지난하고 치열하고, 때로 갈등이 불가피한데 그 과정을 모두 거부해도 된다는 오만에 사로잡히게 만들기도 한다.

솔직히 말해 대부분의 교회는 평화와는 거리가 있다. 평화가 이뤄지려면 폭력이 없어야 하는데 교회의 구조와 문화가 폭력성을 내포하는 근본적 한계가 있음에도 대부분의 교회가 그것을 묵인 또는 부인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변하지 않고 여전히 수직적 구조와 위계질서가 실질적으로 가장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집단 중 하나가 교회다. 가장 큰 이유는 종교공동체라는 것, 그리고 공동체의 핵심에 여전히 절대 권한을 행사하는 성직자, 그리고 소수의 결정권자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구조는 외적으로는 선명한 피라미드 구조, 내적으로는 소수의 상층(성직자 집단이나 당회)과 중간층(집사, 여신도회/남신도회 임원 등), 그리고 하층(직책이 없는 평신도, 청년, 청소년 등) 사이에 평등한 관계와 소통이 아니라 힘에 의한 명령과 복종이 이뤄지는 수직문화가 형성돼 있다.

그래서 교회에서 하는 일은 거의 다 하향식이다. 그런데 피라미드 구조와 수직문화에 근거한 이런 하향식 접근은 성직자를 '하나님의 종'으로 섬겨야 하고 '믿음의 공동체'를 '은혜롭게' 운영하기 위한 핑계로 정당화되고 어떤 문제 제기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구조와 문화는 억압적인 공공기관이나 기업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더 견고하게 유지된다. 어떤 집단의 것이든 이런 구조와 문화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기회 있을 때마다 평화를 '선언'하는 교회의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 구조와 문화가 소수의 일방적 결정과 다수의 무조건 복종을 요구하고, 소수가 공동체를 움직이고 다수를 결정에서 소외시키며, 문제 제기를 '믿음이 없는 행동'으로 비난하며 억압한다면 말이다.

평화로운 공동체, 왜 만들어야 하나?
어떤 기독교인들은 교회는 원래 그렇다고 말한다. 성직자를 중심으로 소수의 사람들이 교회를 움직이고 다수는 '믿음'을 가지고 따라가는 것이 신앙공동체인 교회의 미덕이고 그렇게 해야 교회공동체가 별 탈 없이 유지된다고 말한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인정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폭력적인 구조와 문화로 보여도 문제를 제기할 명분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런 구조와 문화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고 변화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거나 꾸역꾸역 견디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 자체가 교회 안의 강요와 억압의 폭력을 보여준다. 현재 대부분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와 문화의 폭력성을 규명하고 제거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리 신앙에 근거해 생각해도 그런 구조와 문화를 수용할 수 없는 사람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수용하는 자신이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고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 그래서 교회에 가는 것이 힘들고 끊임없이 절망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모른 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폭력의 문제를 지적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폭력에 의한 피해를 중단시키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더 이상 폭력에 희생당하면서 비통해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교회 구조와 문화에 내포된 폭력성에 대해 얘기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편안하고 밝아야 할 교회공동체 안에서 하찮은 자신의 존재를 억지로 자각하게 되고, 용기를 내어보려다 다시 엎어지고, 결국 신앙에 대한 회의 때문에 자신에게 잘못을 돌리고 자신을 의심하게 되는 힘든 사람들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들 중 대부분은 나이가 어리고, 직책이 없거나 낮고, 결정권이 없는 상대적 약자들이다. 그들은 세상 갖가지 폭력의 희생자들과 놀랍도록 닮은 모습이다. 약자의 희생 때문에 평화를 얘기해야 하는 것처럼 교회의 평화도 그렇게 약해서 말도 행동도 할 수 없는 사람들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폭력을 교회와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 껄끄러워 한다. 마치 높은 도덕성을 갖춰야 할 집단에게 도덕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교회가 '평화'를 선언하면서도 교회를 진정한 평화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제대로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고 당연히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희망은 있다. 교회는 결코 평화를 포기할 수 없다는 당위성이다. 비록 아직 걸맞은 변화와 행동을 취하고 있지 않아도, 그리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 폭력에 희생되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도 평화를 얘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앙꼬 없는 찐빵처럼 될 것이고 장기적으로 교회의 건강한 생존이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평화롭지 못한 교회공동체'라는 껄끄러운 문제를 다루는 아주 사적인 이유는 교회 안의 폭력적인 구조와 문화 때문에 힘들어하고 상처를 입는 기독교인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프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절망감과 무기력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에도 같은 일을 겪었다. 사실 나는 그런 문제를 너무나 잘 분석하고 있고 현실적 도전이 있지만 최소한 돌파할 이론과 방법까지 나름 정리해 가지고 있다. 이런 나도 힘든데 문제를 제기하는 자신이 '정상'인지부터 점검해야 하는 그 사람들은 얼마나 절망적이고 막막하겠나. 교회가 진짜 평화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이다. 뭐 더 할 말이 있겠나.

출처: http://peaceconflict.or.kr/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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