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4일 월요일

한글, 훈민정음은 창조인가 모방인가? (3) 수난과 극복

한글의 수난

왕대비가 성종의 효성을 칭찬하는 글을 한글로 썼다. "왕대비가 행장수찬(行狀修撰)에서 언서(諺書)를 내렸는데, 한문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연산군 1년 1월 2일

그러다 연산군 10년7월19일에 한글로 된 익명서 사건이 발단이 되어 한글은 대수난을 겪게 된다. 연산군은 다음날 20일에 한글 사용 금지령을 내리고 22일에는 일체의 언문이 적혀 있는 책을 불사르도록 했다.

전교하기를 "어제 예궐하였던 정부 금부의 당상을 부르라. 또 앞으로는 언문을 가르치지도 말고 배우지도 말며, 이미 배운 자도 쓰지 못하게 하며, 모든 언문을 아는 자를 한성의 5부로 하여금 적발하여 고하게 하되,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자는 이웃 사람을 아울러 죄주라. 어제 죄인을 잡는 절목(節目)을 성 안에는 이미 통유(通諭)하였거니와, 성 밖 및 외방에도 통유하라." - 연산군 10년 7월20일

전교하기를 "언문을 쓰는 자는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로, 알고도 고하지 않는 자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논단하고, 조사(朝士)의 집에 있는 언문으로 구결을 단 책은 다 불사르되, 한어(漢語)를 언문으로 번역한 따위는 금하지 말라." - 연산군 10년 7월22일

전교하기를 "경외(京外)의 언문 및 한자를 아는 자로 하여금 각각 한자·언문 4통을 쓰게 하여 책을 만들어서, 그 하나는 의정부에, 하나는 사헌부에, 하나는 승정원에 두고, 하나는 대내에 들여서 뒷날의 상고에 갖추라." - 연산군 10년 7월25일

(연산군 10년7월25일의 조치는 한글기록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요즘 표현으로 하면 필적감정을 위한 지시였다. 아에 언문을 아는 사람들로부터 글을 미리 받아 놓고 다시 언문서 사건같은 것이 발생하면 필적을 비교해서 색출하겠다는 것이었다.)

광종 1년 9월 4일에는 언문청이 해체되었다.

그래도 널리 쓰인 한글

대국민 교지와 공고문과 포고문 등은 한글과 한문으로 동시에 작성 했으며,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구황촬요 등 민간생활에 유용해서 직접 국민에게 전파해야 할 서적들은 한글로도 출판됐다.

이처럼 왕실을 비롯해 관리들 뿐만 아니라 일반에서도 꾸준히 한글을 사용했다. 아래는 왕실에서 보낸 한글 편지들이다.

"글을 보고도 더딘 것은 그 방이 [너의 역질 하던 방] 어둡고 날씨도 음[陰]하니 햇빛이 돌아 들거든 내 친히 보고 자세히 기별하마. 대강 약을 쓸 일이 있어도 의관의녀를 들여 대령하려 하노라. 분별 말라. 자연 아니 좋아지랴. 만력 31년(선조 36년) 11월19일 사시" - 선조가 정숙 옹주에게 보낸 편지

"명안공주방 전, 밤사이 평안 하옵시니잇가. 나가실제 내일 들어 오옵소서 하였삽더니 해창위를 만나 못떠나 하옵시니잇가. 아무리 섭하옵셔도 내일 부디 들어 오옵소서." - 숙종이 어머니 명성왕후에게 보내는 편지, 1680년경. 해창위:명안공주의 남편 오태주

"답상장. 장정승 댁. 신새해 기운이나 평안하옵신가 궁금하며 사신이 들어 오올제 쓰신 편지 보고 친히 뵙사오는듯 아무렇다 없사오며 청음은 저리 늙으시니 들어와 곤고 하시니 그런 (딱한) 일(이) 없사오이다. 행차 바쁘고 잠깐 적사오니다. 신사(인조 19년) 정월 초팔일 호" -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심양에 볼모로 가서 장모에게 쓴 답장. 청음: 김상헌

"글을 보니 무양하게 있으니 기뻐하며 보는듯 반가와 하노라. 사연도 보고 못내 웃으며 아무리 그만큼 하여 두면 쓰랴 한들 임자 없는 일에 뉘라서 애써 할리가 있으리. 옷감? 지금 못 얻었으니 그것이 되기가 어려울까 싶으니 하죄오지나 마라. - 숙경이는 내일 나가게 하였으니 그것조차 마저 나가면 더욱 적막할까 싶으니 가지.. 마음을 평치 못할까 싶구나. 언제 너희가 들어 올까 눈이 감기게 기다리고 있노라." - 인선왕후(효종의 비)가 결혼해 분가한 둘째 딸 숙명공주에게 보낸 편지. 한글 편지가 70여편이나 된다. (- 표시와 .. 표시는 원문에 나오는 기호다. 그 시절에 벌써 - 기호와 .. 기호를 썼다는 것도 흥미롭다.)

"숙모님께. 상풍에 기후평안 하오신지 문안 알기를 바라오며, 뵌지 오래오니 섭하고 그립사와 하옵다가 어제 봉서 보옵고 반갑사와 하오며, 할아버님 께서도 평안하오시다 하오니 기쁘기 한없나이다. 손자" - 정조가 원손 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문안 편지. 8살 이전에 보낸 것으로 추정됨.

"그새 망극한 일을 어찌 만리 외에 짧은 편지로 말하오리까. 마누라 께서는 하늘이 도우셔서 돌아가셨거니와 나야 어찌 살아서 돌아가기를 바라오리까. 날이 오래 되니 옥도가 엄정하시고 태평하시고, 상감과 자전의 안부 모두 태평하시고, 동궁마마 내외 편안히 지내기를 두 손 모아 빌고 또 비옵니다. 나는 다시 살아 돌아가지는 못하고 만리 밖 고혼이 되니 우리 집안 대 잇는 일이야 양전에서 어련히 보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다시 뵙지도 못하고 세상이 오래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으니 지필을 대하여 한심하옵니다. 내내 태평히 지내시기를 바라옵니다. 보정부 시월 십이일" - 흥선대원군이 청국에서 부인에게 보낸 편지. 

"거년의 소식 들은 후 궁금하여 매양 말하고 있었더니 설 태평히 하오신가 싶으니 기쁘며 예서도 지내오던 생각이 지난 때에 미치면 이 몸이 없어지고자 하는 말씀을 한 붓으로 다하기 어렵사옵니다. 요사이는 성후(왕) 두루 평안하시고 예후(왕세자) 걸음걸이는 끝내 불편하시오나 (그 외) 세자들 평안하오시니 축하드리옵니다. 나는 신병이 성한 날이 없사오며 내내 지리하여 대강 적사옵나이다. 정월 이십삼일" - 깊은 병이 든 순명효 황후가 위관 김상덕에게 보낸 편지. 순명효는 이 편지 후 요절했다.
한글 창제의 가치론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말은 있으나 독자적인 글이 없는 민족은 국가 생존 경쟁에서 도태되어 사라진 것을 수 없이 보아 왔다. 입으로 전해지는 지식전달의 한계성은 명확한 것이고, 독자적인 문자로 전달되는 정보에는 정보의 손실방지와 더불어 그 나라 말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정서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 문화적 부흥 뿐만 아니라 공통체 의식을 굳건히 해줌으로써 생존력까지 향상시켜 준다.

출처: http://blog.naver.com/qnwkkr/120062719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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