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2일 토요일

한글, 훈민정음은 창조인가 모방인가? (2) 한글 창제의 목적

한글 창제는 사대주의인가 나라 사랑인가?

불행하게도 한글 창제의 목적은 한자 읽기에서 중국 본토 발음을 위한 발음기호적 의미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워낙 한글의 능력이 뛰어나 아에 독자적 글자로 자리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國귁之징語 音이
나라 말씀이
(國귁ㅇ 나라히라
국은 나라이라.)

異잉乎 中듕國귁ㅎ야
중국과 달라
(中ㄷ國귁ㅇ 皇 帝ㄷ 겨신 나라히니 우리나랏 常쌍談땀애 江ㄱ南남이라 ㅎㄴ니라.
중국은 황제가 계신 나라이니 우리 나라에서 늘 하는 말에 강남이라 하느니라.)

與영文문字ㅉ로 不ㅂ相ㅅ流ㅉ通통ㅎㅆ
이 문자로 서로 유통하지 못하므로
(文문字ㅉ와로 서르 ㅅㅁ디 아니ㅎㅆ
문자가 서로  사뭇지(같지) 아니 할쎄)

故고로 愚民민이 有 所송言 ㅎ야
고로 어리석은 백성이 아뢰고자 하는 말이 있을지라도
(이런 젼ㅊ로 어린 百ㅂ姓ㅅ이 니르고져 ㅎ 배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해도)

而 終ㅈ不ㅂ得득伸신其ㄲ情ㅉ者쟝 多당矣ㅇ라
끝내 뜻 펴기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ㅁㅊ내 제 들 시러 펴디 ㅁㅎ 노미 하니라
마침내 자기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느니라)

予영 爲윙此ㅊ憫민然 ㅎ야
내 이에 가여운듯 하여 위하여
(내 이ㄹ 爲윙ㅎ야 어엿비 너겨
내가 이를 위하여 어엿비 여겨)

新신制ㅈ 二十씹八ㅂ字ㅉㅎ노니
새로 만든 스물 여덟 글자라 하노니
(새로 스믈 여ㄷ 字ㅉㄹ ㅁㄱ노니
새롭게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欲욕使ㅅ人 ㅇ로 易잉習씹ㅎ야 便ㅃ於 日 用ㅇ耳니라
쓰기를 원하는 사람이 쉽게 익히게 하여 편하게 날마다 사용하게 할 뿐이니라
(사ㄹ마다 ㅎㅊ 수 니겨 날로 메 便ㅃ安 ㅋㅎ고져 ㅎㄹ미니라.
사람마다 하게하여 쉽게 익혀 날마다 쓰기에 편안하게 하고자 함 이니라.) - 월인석보

한음은 중국 소리라. 두는 머리라. 별(別)은 가리는 것이라. 중국 소리의 잇소리는 치두음과 정치음을 분별함이 있나니 이 소리는 우리나라의 소리보다 얇으니 혀의 끝이 윗니 끝에 닿느니라. ~ - 월인석보



보다시피 의미적으로 한글을 통해 누구나 쉽게 중국 정통 발음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글에 있어서는 중국 한자이지만 한자를 읽는 발음에 있어서는 원나라 때 붕괴되어 뒤죽박죽된 결과 중국 정통 발음이 아니라서 어려움이 있었다. 더구나 애초부터 한자를 둘러싸고 조선어와 중국어가 다르니 더욱 힘들었기 때문이다.

명나라가 세워지면서 중국어 정통발음 회복운동이 일어나자 조선도 이런 변화에 대응해야 했다. 세종은 요동으로의 중국어 요원 파견교육을 논의 했으며(세종21년12월4일), 강이관과 별재학관을 증설하면서 학생들에게 생활비를 지급하며 중국어 교육을 독려했다(세종23년8월11일). 명나라 사신 예겸의 방문 때는 통역사 손수산이 운서로 중국어교육 논의를 하고, 정인지와 신숙주는 홍무정운으로 중국어에 대해 담론을 했다(세종32년1월3일).

"소방(小邦)이 멀리 해외에 있어서 바른 음을 질정(質定)하려 하여도 스승이 없어 배울 수 없고, 본국의 음은 처음에 쌍기학사(雙冀學士)에게서 배웠는데, 기(冀) 역시 복건주 사람입니다." (정인지)

"복건 땅의 음이 정히 이 나라(조선)와 같으니 이로써 하는 것이 좋겠소." (예겸) - 세종실록, 세종 32년 1월 3일

세종 26년 2월에 명나라 발음기호 정리 서적인 운회를 한글로 풀어 내고, 세종 29년 11월에는 조선 자체 중국어 발음서인 동국정운을 반포했다.

"옛사람이 글을 짓고 그림을 그려 음으로 고르고 종류로 가르며 정절과 회절로 함에 그 법이 심히 자상하매 배우는 이가 그래도 입을 어물거리고 더듬더듬하여 음을 고르고 운을 맞추기에 어두웠다.
훈민정음이 제작된 이후 만고의 소리가 한 소리처럼 되어 털끝만큼도 틀리지 아니하니 실로 음을 전하는 중심줄이라.
전하께서 전해오는 문적을 널리 상고해 각각 고증과 빙거(憑據)를 두어 바른 음에 맞게 하시니, 옛날의 그릇된 습관이 이에 이르러 모두 고쳐진지라."(동국정운 서문)

(성종 12년에는 동국정운의 치두와 정치 구분이 취약하다는 단점이 지적됐다. "동국정운을 살펴보니, 사(私)와 사(思)는 치두음(齒頭音)이고, 사(師)와 사(獅)는 정치음(正齒音)이여서 합해서 하나의 음이 되고, 비(卑)와 비(悲)는 순중음(脣重音)이고, 비(非)와 비(飛)는 순경음(脣輕音)이어서 합해서 하나의 음이 되며, 방(芳)자는 전청음(全淸音)이고 방(滂)자는 차청음(次淸音)이지만 역시 혼돈되고 분별되지 않아서 권인의 말과 같습니다." 성종실록, 성종12년12월22일)

동국정운의 효과는 매우 뛰어 났다. 정인지가 훈민정음해례에 밝힌 "지혜로운 자는 아침 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안에 배울 수 있다"라는 호언대로 였다.

최만리 일파는 "27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할 수 있다면 누가 고심노사하여 성리의 학문을 배우려 하겠습니까?"(세종26년)하고 반발했다. 실제로 세종 28년에는 이과와 이전의 과거시험 과목으로 훈민정음을 추가함으로써 최만리 일파의 우려는 현실화 되는 것으로 보였다.

이조에 전지(傳旨)하기를, "금후로는 이과(吏科)와 이전(吏典)의 취재(取才) 때에는 훈민정음도 아울러 시험해 뽑게 하되, 비록 의미와 이치는 통하지 못하더라도 능히 합자(合字)하는 사람을 뽑게 하라." - 세종 28년 12월26일

예조에서 정문에 의거해서 "일찍이 교지를 받들어서 과거에 있어서 동국정운을 쓰게 되었으나, 아직 인쇄 반포되지 않았으니, 청컨대 옛날에 쓰던 예부운(禮部韻)에 의거하도록 하소서." -단종 원년 12월24일

강제적 훈민정음 사용 확대 추진은 계속되지 못했지만 꾸준히 사용이 증가했다. 세종은 이러한 반발 때문인지 동국정운을 각 도와 성균관, 4부학당에 비치하면서 "본국의 인민들이 속된 운을 익혀서 익숙하게 된지가 오래 됐음으로 갑자기 고칠 수 없으니, 억지로 가르치지 말고 배우는 자로 하여금 의사에 따라 하게 하라"고 하교했다.(세종 30년 10월17일)

송사 문서의 개선

행정 사법 체계에 있어서 관리계층의 한자와 당시 글이 없던 민중이 쓰는 언어가 달라서 발생한 폐단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한자로 문서 작업을 하고 하위 관리직 문서 문자로 이두를 사용하고 있지만 심리과정과 판결에 대해 글을 모르는 백성들은 사또의 부조리한 판결이라도 억울해도 그대로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판결을 내리는 관리조차도 사건의 곡절을 이해하지 못했다.

"옛날에 신라의 설총(薛聰)이 처음으로 이두(吏讀)를 만들어 관부(官府)와 민간에서 지금까지 이를 행하고 있지마는, 그러나 모두 글자를 빌려서 쓰기 때문에 혹은 간삽(艱澁)하고 혹은 질색(窒塞)하여, 다만 비루하여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사이에서도 그 만분의 일도 통할 수가 없었다. ~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 - 훈민정음 서문, 정인지

재판 과정에서 이두문자를 통해 한자와 민중을 연결시키고 있었지만 이두의 비효율성은 사건의 핵심에 대한 이해는 커녕 이두문자로 작성한 서류마저 그 뜻을 알기 힘들었기에 개선책으로서 훈민정음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최만리 일파는 상소문에서 이러한 뜻이 부당하다고 했다.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옥송(獄訟) 사이에 원왕(?枉)한 것이 심히 많습니다. ~ 이것은 형옥(刑獄)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이 옥리(獄吏)의 어떠하냐에 있고, 말과 문자의 같고 같지 않음에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으니, 언문으로써 옥사를 공평하게 한다는 것은 신 등은 그 옳은 줄을 알 수 없사옵니다"라고 하고 있다.(세종26년2월20일)

이 부분에 있어서 최만리 일파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러함에도 주장의 본래 목적이 한글의 폐지에 있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유교이념 충효의 전파

"삼강행실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서울과 지방의 양반 사대부의 가장 마을대표 또는 가르칠 만한 사람들로 하여금 부녀자 어린이들을 가르쳐 이해하게 하고~" -경국대전

성종은 언문삼강행실도, 언문열녀도, 언문효경, 언문내훈 등을 통치이념의 확대를 위해 널리 펴냈다. 기존에는 이두문자를 사용하거나 관리를 현장에 동원해 말로 전달해서 통치이념을 전파 시키는 방식을 개선하겠다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어려운 한자를 공부할 수 있을만큼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는 일반인들에게 쉬운 한글을 가르쳐서 한글로 쓴 통치이념 서적들을 읽게 하여 자발적으로 받아 들이도록 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세종 13년에 발간된 삼강행실도는 한자어였지만, 한글 삼강행실도 발간을 둘러싸고도 최만리 일파와 세종간의 설전이 벌어 진다.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 효자 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세종)

"삼강행실을 반포한 후에 충신 효자 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 여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정창손)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세종) -세종실록, 세종26년2월20일

출처:  http://blog.naver.com/qnwkkr/120062719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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