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3일 금요일

이제, 우리의 차례다: 혐오 사회의 중심에서, '일베 조각상'에 대한 단상

이제, 우리의 차례다
혐오 사회의 중심에서, ‘일베 조각상’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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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익대학교 정문에 거대한 조각상이 등장했다. 극우 커뮤니티 사이트인 ‘일간베스트 저장소 (이하 ’일베‘)’를 상징하는 손모양을 조각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조소과 4학년 홍기하 씨가, ‘환경조각연구’ 수업의 과제로 제작해 출품한 것으로 알려졌다. 5월 30일 설치된 이 작품은 6월 20일까지 전시될 예정이다.



 조각상은 설치 직후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인터넷 상에서도 논쟁이 벌어졌고,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계란이나 음료수를 던지기도 했다. 자진 철거를 요구하고 조각상을 비판하는 종이쪽지도 붙었다. 홍익대학교 총학생회는 “작가는 작품의도를 설명해주기 바란다”며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홍기하 씨는 곧 인터뷰를 통해 입장을 밝혔다. 홍 씨는 “‘일베’를 옹호하려는 것이냐, 비판하려는 것이냐 논란이 있는데 그런 단편적이고 이분법적 해석을 위한 작품은 아니”라며, “‘일베’는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돼 있는 현상이고, 부정할 수 없는 실재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실재하지만 실체를 보이지 않는 ‘일베’를 실체로 만들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처음 작품이 설치된 직후, 설치 뒤에 부수는 퍼포먼스가 예정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홍 씨는 “작품을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며, “학생들이 철거를 요구할 수는 있겠지만, 작가로서 작품을 철거할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사람들이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느끼는 감정은 어떨까. ‘일베’가 어떤 커뮤니티인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일베는 여성에 대한 혐오, 특정 지역에 대한 폄하, 정치적 평향성, 민주화 운동에 대한 모욕, 역사 왜곡이 일상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이다. 심지어 이런 행동이 범죄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베를 상징하는 거대한 조각상은 그 존재만으로도 불쾌감을 일으킨다.

 사람들에게 일베는 불쾌한 존재다. 드러내서 보여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캠퍼스 한복판에 세워진 작품을 보고 얼마든지 불쾌해할 수 있다. 큰 피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고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다면, 작품에 계란과 음료수를 던지는 행위도 심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홍익대학교 학생들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철거하라는 요구도 가능하다.

 흔히 이 작품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표현의 자유는 반드시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가 ‘표현에 대한 비판을 받지 않을 권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불쾌하면 불쾌하다고, 옳지 않으면 옳지 않다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또한 ‘표현의 자유’와 ‘공연의 자유’는 다르다. 이 작품이 설치된 곳은 홍익대학교 교정 한복판, 지나가는 사람 모두가 ‘봐야만 하는’ 공간이다. 공공장소다. 이런 경우, 다수의 불쾌감이 유발된다면 공동체 차원에서 얼마든지 제재를 가할 수 있다. 그것이 사회 공동체의 역할이고, 그것이 윤리가 존재하는 이유다.

 작가는 이것을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일베’를 표현한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 작품이 표현하고 있는 ‘일베’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강렬하다. 불쾌감에 가려 작가의 의도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일베’라는 강렬한 이미지를 대중 앞에 세울 때는, 의도를 표현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어쨌든 감상자의 몫이다. 그리고 감상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 작품은 불쾌하다. 작가가 불쾌감이 아니라 성찰을 의도했다면, 이 작가는 무능하다. 작품 앞에 서서 성찰할 수 있는 기제가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 작품은 불쾌하며, 무능하고, 모욕적인 작품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다른 시선을 선택해 보자. 작품이 사회에 던져진 이상 작품은 감상자의 몫이라고 말했다. 이 작품에 느껴지는 불쾌함은 온당하지만, 그 불쾌함을 조금 억누르고 작품의 의미에 대해 생각을 조금 더 진행해 보자.

 말했듯, 사람들에게 일베는 불쾌한 존재다. 지역 폄하, 정치적 편향성, 혐오발언 등은 누구에게나 불쾌감을 일으킨다. 특히 이것이 범죄로 이어지며, ‘실재하는 공포’로 확대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베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어두운 면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우리 곁에 있는 일베”를 부정할 수 있을까. 일베 회원이 범죄를 저지른다면 그것은 사법 당국에 의해 처벌받아야 한다. 일베 회원이 혐오발언을 한다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비판받아야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안의 일베’를 부정할 수 있을까.

 우리 ‘안’에는 혐오가 존재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성찰하고 반성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누군가를 혐오하고 있다. 언제나 혐오하는 자는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다.

 여성에 대한, 소수자에 대한, 약자에 대한 차별을 우리는 은밀하게 자행하고 있다. 무의식에 깔려 있는 혐오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자각하고 인정해야 할 문제이며, 늘 고민하며 고쳐가야 할 문제다.

 우리 ‘곁’에도 혐오가 존재한다. 그렇지 않아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혐오를 자행하고 있다. 작가의 말처럼 일베는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존재하지만 우리 곁에선 그 민낯을 감춘다.

 대체 왜 그렇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이 혐오의 늪에 빠질까. 그들은 어째서 누군가를 증오해야만 삶의 만족을 얻을까. 대체 어디에서 분노의 에너지가 기인하는 것일까. 우리는 제대로 질문조차 던질 수 없다. 그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흔적조차 알 수 없으므로.

 ‘우리 안의 일베’와 ‘우리 곁의 일베’는, 타인과 함께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입장에선 반드시 성찰해봐야 할 문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혐오하지 않았는가, 내 곁의 누군가가 실은 혐오범죄의 가해자가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져봐야만 한다.

 성찰하지 않는다면 일베와 우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렇게 보면 작가가 일베를 옹호하느냐 옹호하지 않느냐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니, 애초에 이 작품은 일베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일베를 하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 사회에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상대에 대한 혐오, 그리고 그 왜곡된 분출에 관한 문제다.

 일베 사이트에 아이디를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누군가를 혐오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성찰이 중요하며, 어디 있는지 알 수조차 없는 혐오범죄의 가해자가 주변에 있을 수 있다는 반성이 중요하다. 일베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말했듯 우리는 얼마든지 이 작품을 보고 불쾌할 수 있다. 일베의 상징이 대학 캠퍼스 한복판에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대단히 모욕적이기도 하다.

 불쾌함을 느끼고, 이 작품을 비판하고, 계란을 던질 수 있다. 철거를 요구하는 것도 온당하다. 하지만 그런 만큼, 이 작품에 대해 고민해볼 수도 있다. 우리 안의 일베에 대해서 불쾌해볼 수도 있다. 우리 곁의 일베에 대해서 모욕감을 느껴볼 수도 있다. 작품 자체가, 그런 고민을 끌어내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상황에 적절하지 않은 방향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인정해야겠지만 말이다.

 일베가 실재하는 상황에서, 일베의 상징을 교정 가운데 세운다는 것은 일베 회원들에게는 오히려 응원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회에 만연한 혐오를 오히려 조장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동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일베가 실재하지 않았더라면 이 작품이 탄생할 이유도 없다. 결국 그것조차 그 작품을 바라보는 공동체가 껴안아야 할 문제다. 단지 일베 회원이 작품을 보며 인증샷을 찍고 낄낄대며 즐긴다면 작품의 의미는 딱 거기까지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일베의 장난감에 불과하다. 하지만 작품을 보며 일베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성숙해진다면, 작품은 거기까지의 의미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일베에 대한 성찰을 담은 작품이 된다.

 작품의 의미는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결정한다. 이 작품이 그 정도의 역량을 가졌는지는 다른 문제겠지만 말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다>이다. 일베란 어디에 있는가. 대체 이 사회에 만연한 ‘일베성’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일베는 대한민국 인터넷 사이트 중 30위권의 트래픽 순위를 유지하고 있다. 커뮤니티 사이트 중에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그 증오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탄생했는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일베의 에너지를 진지하게 분석하려는 시도가 우리 사회에 몇 번이나 있었는가. 그런 의미에서라면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다’는 작품의 제목이 일베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석일 수 있다. 그들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더 많은 고민과 분석이 필요하다. 일베의 원천을 알아야 대책을 세운다. 폐쇄든, 처벌이든, 보다 장기적인 해결책이든 말이다. 그리고 그 제대로 된 분석과 대책을 통해야만 일베와 그 뒤에 숨겨진 사회 전반의 혐오를 해소할 수 있다.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다>라는 제목의 이 작품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을 내려도 좋다. 고민과 성찰을 할 수도 있고, 불쾌해할 수도 있다. 계란이나 음료수를 던질 수도 있고, 책임을 질 수 있다면 망치로 부술 수도 있다. 학교 입장에선 공식적으로 철거할 수도 있다. 혹은 그저 일베 회원들이 사진이나 찍고 즐기기나 하는 작품으로 남을 수도 있다.

 감상자가 이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작품의 의미를 규정한다. 규정하기에 따라 이 작품은 대단히 불쾌한 작품이 될 수도, 일베를 상징하는 작품이 될 수도, 혹은 사회적 논의를 성숙시키는 작품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감상이 작품을 완성시킨다.

 이 작품이 가진 그릇은 대단히 작다. 하지만 그 위에 넘치도록 성숙한 논의를 부어내는 것도, 대중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무능하고 불완전한 작품을 어떻게 완성시킬지는, 이 작품을 바라보는 사회의 몫으로 남아 있다.


출처: http://widerstand365.tistory.com/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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