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30일 목요일

한글, 훈민정음은 창조인가 모방인가? (1) 창조와 모방


기본용어

언문(諺文): 일반적으로 한글을 지칭하나 한자 외의 다른 나라 문자들을 오랑캐 글이라 하면서 비하해서 부르는 말

전문(篆文): 옛글. 한자에서는 진나라 이전의 한자

운서(韻書): 한자의 중국 표준발음을 표시한 책

운회(韻會): 명나라의 운서

사성(四聲): 육조 수 당나라 시대의 중국어 성조. 고저(장단과 강약). 평성(平聲) 상성(上聲) 거성(去聲) 입성(入聲)

칠음(七音):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의 다섯 음(音)과 반치(半徵) 반상(半商) -홍무정음 서문

운(韻): 모음부분 이하. 예)산- ㅅ를 뺀 안(an) 부분. 시조에서 중요시하며 중국본토 발음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기준

운의 예 - 삼(싼)자운
일접상과삼(日接常過三) - 명나라 사신 예겸이 뗀 운
세간과비자 이진덕이삼(世間퉫毘子 利盡德二三) - 정인지
의도별전철 입취사무삼(意到瞥電立就思無三) - 신숙주

반절법(半切法): 한 글자를 읽을 발음기호로 다른 두 글자를 선정해서 각각 절반씩 발음을 가져다 합쳐 읽는 방법. 예) '동', 도종절. 동을 읽을 발음기호로 도와 종을 적고 도에서 ㄷ(d) 발음을 가져오고 종에서 ㅗㅇ(ong) 발음을 가져와 합쳐서 동(dong)이라 읽음

용음(用音): 소리의 운용법. 반절법과 한글조합법

합자(合字): 반절법과 한글조합법(예:ㅇ+ㅗ+ㅏ+ㅇ) 같은 글 조합법

1. 한글, 창조인가 모방인가?

한글창제에 세종을 빼고 누가 참여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달에 상께서 언문 28자를 친히 제정하였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라고만 쓰여 있다.(세종실록-세종 25년 12월조)

한글창제 이후 편찬된 훈민정음예의본과 훈민정음해례본(모두 세종28년)에서 훈민정음해례본 집필에는 정인지,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최항,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이 참여했다. 석보상절(세종28년)과 월인천강지곡(세종31년)을 수양대군이 관장했다. 용비어천가(세종29년)를 정인지, 안지, 권제 등이 쓰고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이 주석을 달았다.

운회(韻會)의 번역작업(세종26년)에는 동궁, 진안대군, 안평대군이 관장하여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선로, 이개, 강희안 등이 참여했다.

이로 보아 한글창제에는 정인지(대제학), 신숙주(부수찬), 최항(집현전 교리 정5품), 박팽년(집현전 부교리 종5품), 성삼문, 이선로, 안지, 권제, 이개(집현전 부수찬 종6품), 강희안(돈녕부 주부 종8품) 등이 참여했을 것이다.

언문청과 훈민정음 창제와는 전혀 무관하다. 훈민정음은 세종 25년에 창제되었지만 언문청은 세종 28년에야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글은 집현전을 중심으로 창제되었다고 할 것이다.

"~드디어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여 사적(事迹)을 상고해서 용비시(龍飛詩)를 첨입(添入)하게 하니 ~" ~遂置諺文廳 考事迹 添入 龍飛詩~-세종 28년11월8일


 
전문(篆文)모방설

我朝自祖宗以來 至誠事大 一遵華制 今當同文同軌之時 創作諺文 有駭觀聽 曰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若流中國 或有非議之者 豈不有愧於事大慕華 (언문 반대 상소문 중 일부- 세종26년2월20일)

한글 반대 상소문 서명자는 최만리(집현전 부제학:정3품), 신석조(집현전 직제학:종3품), 김문(집현전 직전:정4품), 정창손(집현전 응교:종4품), 하위지(집현전 부교리:종5품), 송처검(집현전 수찬:정6품), 조근(집현전 저작랑:정8품) 등이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조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曰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라는 대목을 가지고 중국의 전문을 모방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상소문의 전체 흐름과 문맥들의 뜻을 살펴보면 오히려 '왜 중국의 한자를 따르거나 모방하지 않고 새로운 오랑캐 글자를 만드느냐?'라고 하고 있다.

"(몽골 서하 여진 일본 서번 등 지방 문자는) 오랑캐의 일이므로 화하(한자)를 써서 오랑캐를 변화시킨다 하였는데 화하(한자)가 오랑캐로 변한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제 따로 언문(오랑캐 글)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신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야비한 이언(俚言)이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서 글자 만들어(어조) 사용하였기에, 문자가 원래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므로"
"언문을 시행하여 임시 방편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디고 느릴지라도 중국에서 통용하는 문자를 습득하여 길고 오랜 계책을 삼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할 것입니다."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하물며 언문(한글=오랑캐 글)은 문자(한자)와 조금도 관련됨이 없고 오로지 시골의 상말을 쓴 것이겠습니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는 것은 고금에 통한 우환이온데, 이번의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서"

이렇듯 최만리 일파는 기본적으로는 한자를 중국발음으로 읽기 위한 발음기호 정비는 찬성했다. 막상 발음기호가 (최만리가 보기에는) 중국의 전문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성질의 문자임을 알고 반발했다.

당시에는 반절법을 이용한 한자음훈표기법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이두 조차도 한자의 영역을 벗어 나지 않았지만 세종이 만든 발음기호는 한자에 예속되지 않으면서 발음기호 수준을 뛰어 넘어 완전히 새로운 글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최만리 일파는 한글이 한자를 보조하는 한자를 모방한 발음기호 수준에 머물지 않고 한자의 영역을 벗어나 조선의 독자적인 글이 되는 것에 반대한 것이다.

상소문을 둘러싸고 정전에서 세종과 최만리 일파가 나눈 대화에서도 확인된다. 최만리 일파는 "설총의 이두는 비록 음이 다르다 하나, 음에 따름과 해석에 있어서 글자 조합(語助)과 문자(한자)가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사온데, 이제 언문은 여러 글자를 합하여 함께 써서 그 음과 해석이 변한 것이고 글자의 형상이 아닙니다."(세종26년2월20일)라고 한글이 한자와 닮지 않았기에 글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였다는 뜻은 한글의 자모음의 모양이 비슷하게 보인다는 것이지 고대 한자인 전자(篆字)를 베끼거나 변조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글에 대해 최초로 언급하고 있는 세종실록 세종25년12월30일자 기록에는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라고 적고 있으나, 세종28년 9월29일의 훈민정음 어제 서문에서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고"라고 하면서 고전을 모방했다는 것은 물건의 형상을 본딴 것이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근거는 없지만 다른 시각에서 몇 가지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자음과 모음의 구성에 있어서 중국에서 유입된 육서론(문자학), 운성학(발음과 발성), 주역(음양오행론)의 이론들도 살펴 봤을 거라는 점이다.

자음에 있어서는 한글 28자 중에서 9개가 입모양을 본떠 만들었다고 하고 있는데 육서론(6가지 글씨 구분) 가운데 상형문자론에서, 오행설에 따른 음운론에서 각각 이론적 틀을 얻었을 수도 있다. ("아음(牙音) ㄱ(기윽)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습을 본뜨다" "설음(舌音) ㄴ(니은)은 혀가 잇몸에 닿은 모습을 본뜨다" "치음(齒音잇소리) ㅅ(시읏)은 치아의 모습을 본뜨다" "후음(喉音목구멍소리) ㅇ(이응)은 목구멍의 모습을 본뜨다" - 훈민정음 제자해)

제자해에서 밝히고 있는대로 천지인의 삼재 도리를 따라  '  · '는 하늘을, 'ㅡ'는 땅을, 'ㅣ'는 인간을 본떳다고 적고 있다.(이 3개의 기본 모음을 바탕으로 초출자 재출자 등으로 모음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처럼 기본 모음 구성에 있어서는 주역의 음양오행에서 이론과 철학적 의의를 얻었을 것이다.

발음기관 분류에 있어도 오행의 원리에 따라 어금니 소리, 혀 소리, 입술 소리, 칫소리(앞니소리), 목구멍 소리로 다섯 부위로 나눴다. (역시 마찬가지로 자음의 형태는 모음의 확대처럼 모양에 추가적인 모양이 더해지면서 발전했다.)

천지의 도는 음양오행일 뿐이다. ~ 그러므로 사람의 소리도 모두 음양의 이치를 가지고 있건만 사람이 듣고 살펴서 돌아보지 않는다. 天地之道 一陰陽五行而已 ~ 故人之聲音 皆有陰陽之理 顧人不察耳 -훈민정음해례 제자해 서문

또한 세종이 운성학(음운론)에도 식견이 있었고, 4성7음을 기반으로 하고 소리의 맑고 탁함을 논한 것은 오행론적 관점에 더해서 운성학적 관점에서도 접근했다고 할 것이다. 즉 한글창제에 있어서도 중국의 운성학 이론도 참고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연히 중국의 것만을 참조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전자(篆字)를 모방했다는 것은 당시에서의 고대 한자를 그대로 옮겨 쓰거나 흉내낸 것이 아니라 이론적 틀을 구성함에 있어서 중국에서 형성된 이론들(원나라 때의 파스파 문자 포함)도 다양한 참고자료로 활용했다고 보는게 더 타당하다.

"전하께서 전해오는 문적을 널리 상고해 각각 고증과 빙거(憑據)를 두어 바른 음에 맞게 하시니, 옛날의 그릇된 습관이 이에 이르러 모두 고쳐진지라."(동국정운 서문)

한편으로 한글을 또 하나의 언문(오랑캐 글)으로 취급하며 거세게 반발하는 신하들을 다독거리기 위해 새로운 글자가 아니라 중국의 고전 문자인 전자(篆字)를 모방했다고 함으로써 무마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추정된다.

한글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부분에서 "정음(正音)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 행위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대체로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가 오래 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사람이 아직 알지 못하는 도리를 깨달아 이것을 실지로 시행하여 성공시키는 큰 지혜는 대개 오늘날에 기다리고 있을 것인져"라고 말하고 있다.(세종실록 세종28년 9월29일의 훈민정음 어제 서문)

즉 '한글창제는 옛날 것을 모방하지 않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이룬 것으로 새로운 이치를 깨달아 실제로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파스파 문자와 지구라트 문자 모방설

한글이 지구라트 문자와 유사하다는 주장은 거론할 가치조차 없기에 생략한다. (자음과 모음의 구성에서 기본조차 갖추지 못하고 그저 자음과 모음에 상관없이 조금이라도 모양이 비슷하면 한글과 연관지었다.)

파스파문자(八思巴文字)와의 유사설에 있어서도 역시 자모음의 구성원리를 따지면 전혀 연관성이 없다. 모음과 자음에 있어서 한글의 자음모음과 상관없이 어쨌든 몇 개라도 모양새가 같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몽골이 중국 땅에 세운 원나라 초기에 쓰이던 파스파 문자는 저 멀리 티벳의 문자를 약간씩 변형시켜 수용한 것이다. 건국초기 티벳 승려 파스파가 명령에 따라 제작해 쿠빌라이가 1269년에 배포했으나 널리 쓰이지 않고 사장됐다.

파스파문자는 중국어를 중심으로한 티벳어, 산스크리트어, 투르크어를 발음기호로 표기하는 자음30자와 모음 8자, 9개의 기호로 구성됐다. 이렇듯 어느 정도 효과적인 발음기호 역할을 했지만 독립 문자로서의 역할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한글의 파스파문자 모방설을 주장하는 콜롬비아대 명예교수 게리 레드야드는 1966년부터는 한글이 파스파 문자를 표절했다고 주장해 오고 있다. (파스파 문자가 저 멀리 그리스 문자와도 연관이 있다고 한다.)

'세종 당시 전서(篆書)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파스파 문자와 한글은 모두 전서(篆書)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예로 파스파 문자가 조선시대 1496년까지 통역교육기관인 사역원에서 교재로 사용됐다는 점도 한글이 파스파 문자를 모방했다는 증거로 삼고 있다.

흔히 말하는 전문(篆文)이라는 것은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왕의 명령에 따라 진나라 이전의 고대한자를 수집 정리한 것이다. 사역원에서는 매월 전문(篆文) 시험을 봤다. 전문은 도장 비석 등에도 쓰였고, 전문으로 작성된 책도 인조 때 복원했으며, 연산군은 공사장 인부들의 통행패도 전문으로 새겼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이후이기는 하지만 사역원의 몽골어 교육에 주로 사용된 교재를 보면 몽골어 원문에 한글로 적어 발음을 익혔다.

하지만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 원나라가 망하고 건국된 조선에서 쓰인 발음기호는 반절법이라는 한자음훈표기법이 주류였다는 면에서도 그렇고, 원나라 멸망 후 사역원에서 일시적으로 파스파문자로 몽고어를 익혔다는 주장만으로 한글이 파스파문자를 모방했다는 단정은 설득력이 없다.

역시 몇 개의 한글 자음이 모양과 발음에서 비슷하다고 하여 한글의 파스파문자 모방 주장도 납득하기 힘들다.

함부르크 대학 출신 도멜스는 고금운회거요에서의 자모음이 몽고자모운음과 많이 일치한다는 면에서 명나라 초기에 발간한 홍무정운을 단종 3년에 역훈했다는 것을 들어 한글의 파스파 문자와의 연관설을 말했다.

고금운회거요는 원나라에서 발간됐다. 세종 16년(1434)에 경상도관찰출척사 신인손은 고금운회거요가 사라지고 없다면서 역사자료 확보차원에서 다시 발간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받아 들여져 경주부와 밀양부에서만 간행했다. 동국정운의 참고 자료가 됐다는 면에서 사료적 가치를 지니기는 하지만 중앙관청에서 발행한 것도 아니고 사역원 교재로 쓰인 것도 아니다.

몽골은 이미 멸망했고, 명나라는 중국어 발음 회복에 나선 때라서 세종도 역시 명나라 초기 간행 발음서인 운회를 들여 왔고, 단종은 홍무정운을 들여와 명나라가 정비한 중국어 발음 변화에 호흡을 같이 했다.

도멜스는 이런 상황에 대해 '명나라가 들어 선 이후에도 여전히 몽골식 중국어 발음 교재 때문에 부끄러웠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 것을 벗어나기 위해 한글을 창제했다'라고 말했다.

분명하게 결론은 한글은 다양한 자료를 참고하여 이론적 검색과정을 통해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한글 각 모음이나 자음의 모습에 있서서의 모방논란과 다르게 한글은 세계 문자 역사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계획되어 발명되고 활성화된 문자 창조였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문자가 500년 넘게 이어져 민족의 중심 글자가 됐다.

자음과 모음의 분류에 대한 뚜렷한 체계와 그 자모음의 구성에 대한 철학을 처음부터 제시했다는 것은 역사상 모든 문자 발생에 있어서 단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던 사건이다. 중성을 독립시켜 초성과 더불어 제자하는 원리로 인류 최초의 자모문자를 만든 것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qnwkkr/120062719071

댓글 1개:

  1. 한글은 분명 한자와 음가나 구조가 다르지만 자음자의 형태 중 치음과 순음은 해당 조음기관에 해당하는 한자의 고전자에서 따온게 맞다고 봅니다.口와 齒의 고전자는 파스파처럼 피상적으로 닮은 정도가 아니라 조음부위인 입술과 치열의 형태를 그린 상형자이고 이는 훈민정음에 언급된 제자원리와도 일치하니까요. 나머지 후음,아음,설음의 형태는 간단하니까 모방 없이도 만들 수 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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