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7일 토요일

[성소수자와 장애] 정신질환과 성소수자

성소수자들은 정상성 규범으로부터 일탈되고 배제되고 삭제압력을 받지만 그렇기에 정상성규범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저항하고 새로운 윤리와 제도를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 장애와 접점을 갖는다. 장애로 취급되거나 장애 당사자로서 권리를 주장하기도 한다. 성소수자로서 장애를 대하는 경험은 어떨지 여러 분야에 걸쳐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어떤 집단에서든 사람은 정신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정신질환을 말할 때 우리는 사회적 소수자들이 정신질환 관련 문제에 더 밀접하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는 소수자들이 더 많은 사회적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사회에서 받는 여러 차별적인 상황이 스트레스가 되고 이것이 정신질환이라는 형태로 발현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의 정신질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사회적으로 강구되기 보다, 당사자들이 그들에게 내재적 문제가 있다고 책임을 전가당한다. 예를 들어 여성에 대해서는 아주 오랫동안 "히스테리컬하다", "감정적이다", "나약하다"등의 진단 및 스테레오타입이 반복되어 왔다. 차별선동세력이 성소수자들에 대해 "영혼이 (하나님의 규율을 어겼기 때문에) 병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도 다른 예이다.

이런 작업은 세 가지 효과를 수반한다. 첫째, ‘정상’이라고 포장되는 사람들의 정신질환 발병률을 삭제하고 축소화한다. 정신질환이 터부로 인식되는 한국에서는 더욱 강하게 작용한다. 우울증 관련 기사가 나올 때마다 보이는 "현대사회에서 우울증은 감기 같은 것이다, 흔하다, 어쩔 수 없다"등의 댓글은 현장에 대한 무관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둘째, ‘나’와 다른 타자의 정신질환 발병률을 과장하고, 이들을 위험하고 통제되지 않는 존재로 상정함으로써 소수자들을 사회악으로 포장한다. 같은 우울증 관련 기사여도 성소수자와 관련된 기사라면 성소수자들의 타락과 비참한 말로를 강조하는 댓글이 달린다. 마지막으로 ‘정상’인 ‘나’는 ‘타자’를 구원하고 도와주는 시혜적인 존재로 포장된다. 아무것도 안하거나 심지어 하대하는 태도를 가지면서도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차별선동세력들이 ‘우리는 성소수자들을 구원하고 싶다/궁휼히 여긴다’고 말하는 것은 이제 너무도 익숙하다.

이런 식으로 성소수자들의 정신질환은 부풀려지고 과장된다. 비참한 성소수자들의 자살 서사는 대표적 예이다.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을 고민하면서 자신이 잘못된 존재라고 마구 자책하다가 자살을 한다는 서사인데, 여기서 자신의 성소수자성때문에 내적 갈등을 겪는 외적맥락은 은폐된다. 어떤 사람도 누군가 자기 몸에 붉은 피가 흐르는지에 대한 심각한 내적 갈등을 겪으며 자살하는 서사는 들은 적이 없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피가 붉은색"이라는 명제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즉, 성소수자성으로 인한 내적 고민과 갈등은 실제 성소수자성 그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성소수자를 일반적이지 않고, 자연스럽지 않은, 괴물로 그리는 사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는 비단 성소수자들이 겪는 일상적 차별발언 뿐 아니라 성소수자성과 맞물린, 열악한 경제상황에서 나오기도 한다. 성소수자의 경제적 열악함은 커뮤니티 전체보다 특정 집단이 취약한 경우가 많다. 가령, 트랜스젠더의 경우 성별정정을 하지 않으면 직업을 가질 수 있는 폭에 한계가 있다. 그러나 성별정정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는 수술이 필요한데, 이 수술은 몇천만원이 드는 비싼 수술이다. 그런데 수술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직업이 필요하다. 또 다른 예로는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있다. 미국의 노숙자연합에 따르면 청소년 노숙자 중 성소수자들이 큰 비율을 차지하는데, 이들이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나는 경우가 높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장기간의 치료를 요하는 정신질환 치료는 쉽지 않을 때가 많다. 성소수자들의 성별위화감과 성적지향은 오랫동안 정신질환으로 취급받았다. 그 상황에서 성소수자에 대해 무지한 발언을 정신과 진료과정에서 듣는 경우도 있으며,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자기의사와 상관없이 정신병원에 넣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런 요인은 성소수자들의 정신질환을 한층 더 악화시키며 정신질환자 비율을 높이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정신질환을 가진 성소수자들이 삭제되는 환경도 문제이다. 이는 어떤 커뮤니티에나 있는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큰 영향은 사회적 소수 집단이 자신의 권리를 토로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우리는 너희와 다르지 않다"라는 목소리는 ‘너희와 다른’, 즉 성소수자 집단의 특수성을 삭제하기쉽다. 더불어 오랫동안 지속된 ‘성소수자 비참 서사’는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부에서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의 호소를 침묵케하는 요인이 된다. 성소수자들은 늘 행복해야 하고, 늘 당당해야 한다는 긍정의 강박이 우리를 구속하는 하나의 틀이 되는 것이다. 성소수자가 인터뷰를 할 때 나오는 "사진을 밝은 것으로 고르고, 웃는 표정으로 해라"라는 지시는 성소수자 자긍심이 고양되는 상황에서 흔히 지목되는 내용이다. 해당 인터뷰 대상자의 사진이 유포되면 그 사람이 처할 수 있는 경제적, 개인적 위험에 대해서는 차치하더라도, 왜 성소수자들은 늘 밝고 웃고 있는 모습으로만 그려져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오히려 성소수자들의 일상적이고 다양할 수 있는 모습을 지워버리는 것 같다. 우울할 수도 있고, 우울해서 침대에서 쉰 다음날 카페에 가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한숨을 쉴 수도 있고, 우울증 약을 먹은 다음 3시간 후 친구들과 만나서 수다를 떨고 집에 와서 다시 저녁약을 먹을 수도 있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은, "우리 모두 행복하다" 대신 "우리 모두 행복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므로 우리 커뮤니티 내부에서 뭘 할 수 있는지 고민해 보자"가 더 좋지 않을까? 정신질환을 가진 성소수자들이 ‘성소수자 비참 서사’에 이용당하는 것이 무서워서 우리의 현실을 외면하고,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모두가 행복한 무지개빛 파티장'으로 설정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않다.

이 또한 정신질환을 갖고있는 성소수자들에게 지인의 정신질환은 자신의 탓이라고 은연 중에 암시하며 행복해지기를 강권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는 행복하지 않은 성소수자 때문에 성소수자 비참 서사가 통용된다며 책임을 다시 다른 성소수자에게 돌리는 것과 같다. 성소수자 비참 서사를 소비하고 만들어내는 것은 차별선동세력임에도 이 모든 것이 성소수자 개인의 문제로 소비되고, 이 개인이 성소수자 커뮤니티 전체의 발전을 저해한 듯 묘사되는 것은 진정한 문제해결이라고 할 수 없다.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을 해소하고 우리를 소외시키지 않으면서 성소수자 운동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참고자료:  http://nationalhomeless.org/issues/lgbt/

겨울(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http://lgbtpride.tistory.com/1193
POSTED AT 2016.04.10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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