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4일 화요일

살女주세요, 살아男았다’라는 말의 의미

그녀들의 외침을 무시하는…범죄만큼이나 치명적인

심란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17일, 서울 서초구에 있는 한 공용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낯선 남성에게 여러 차례 칼로 찔려 살해당했다. 가해자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그랬다”라고 진술했다. 사건 이후 수많은 여성들이 ‘여성혐오’ 범죄의 희생양이 된 피해자를 추모하며,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과 살인을 멈추라고 사회를 향해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향해, 이 사건은 여성혐오와 관련 없으며 젠더 문제로 몰고 가지 말라는 여론도 거세다. 오늘 경찰은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여성에 대한 피해망상을 가진 정신분열증 환자에 의한 ‘묻지마 살인’으로 규정했다. 정신질환에 의한 범행이니까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는 논리다.


▶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는 이번 살인사건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많은 행렬이 이어지고 있으며,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의견을 적은 포스트잇을 붙여 사회적 발언을 하고 있다.   ⓒ출처: 페이스북 <강남역 10번 출구> 페이지

나는 강남역 살인사건과 이에 대한 반응들을 살펴보던 끝에, 내가 왜 자식의 사생활까지 글의 소재로 삼으면서 이 칼럼을 시작했던가 하는 질문으로 향했다.

초딩아들 성교육!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니고, 내 손으로 어설픈 제목을 지어 올렸다. 나는 왜 ‘아들’이라는 대상을 놓고 ‘성적인 것’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결심했던가, 겁도 없이. 잘 소화하지도 못하면서 이 틀을 밀어붙였다. 여러 우려를 제쳐버릴 정도로 어떤 절실함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성교육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실천이어야만 한다는 절실함. 일단 밀어붙이자. 날것 그대로인 고민이더라도 공유하는 게 그나마 낫다. 그러니까 나는 ‘적어도 아들 하나씩만 맡아 가르치면 뭐라도 바뀌겠지’ 이런 생각을 한 셈이다.

직관적이었다. 한국사회에서 ‘남성’과 ‘여성’라는 생물학적 집단이면서 혹은 재현된 주체들이면서 혹은 상징적인 가치들인, 그 무엇이건 이 짧은 두 음절인 남성/여성 사이의 젠더 문제에 대한 엄청나게 다른 시간차, 무지막지한 온도차를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소통이 될 수 없는 대화들을 누적시켰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통해 한국의 가부장제, 성차별주의, 여성혐오, 솔직히 그 무엇이라 부르든 비슷한 의미지만 일단 최대한 가볍게 젠더 문제라고 부를 만한 거의 모든 것들의 민낯과 그 결과들이 그늘 하나 없는 한낮의 아스팔트 광장 위에 등장한 것만 같은 기분이다. 이를 응시하면서 많은 이들이 자신의 과거 속, 여성이어야만 했던 경험들을 불러오고 인식을 새롭게 해가고 있다. 그리고 화를 내고 있다. 여성들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다. 나는 화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싶지 않다. 세상을 바꾸려면 잘못된 사회에 대해 제대로 화를 내는 것이 필수적이니까.

현재, 그녀들의 감정을 부인하는 일들이 화를 더 돋운다. 하물며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희생자를 추모하며 적은 포스트잇에 그녀들이 화를 내는 다양한 이유를 명징한 말들로 기술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이마저도 부인한다. 젠더 문제를 ‘명징한 언어’로 기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남성적 지배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은 추측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게 힘든 일을 해내고 있는데, 그녀들의 그 명징한 언어마저 부인당해야 하는 이유는 ‘여성이 화를 낸다’는 사실 자체를 용납하고 싶지 않아서일 테다. ‘화는 미친 가해자에게나 쏟아 부으라’는 회피적인 생각이나, ‘이런 식의 화가 남녀 대결구도를 만든다’는 게으른 인식 등, 그 노력들은 실로 강력하다. 모두 화의 근원은 보지 않겠다는 의지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여성들은 어느 개인 남성에게 화를 내는 게 아니다. 이 사건을 가능하게 한, 누적된 젠더 불평등과 문화 전반을 문제시하고 있다. 여성혐오라는 개념까지 불러오지 않았나. 그러므로 그녀들의 외침을 무시하거나 왜곡하려는 시선 속에서 불평등한 젠더 체계의 공범자들과 그 지지자들, 그리고 그 논리를 확인하게 된다. 그동안 젠더 위계가 어떻게 공고해져 왔는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실제 이 사건에서 받는 충격이라면 살인 행위만큼 치명적인, 공범자들의 강고함이다. 이들을 보며 나는 다시금 성교육의 절실함을 느낀다.

젠더 권력의 파괴력을 지금 보고 있지 않은가

많은 이들이 자신이 불평등한 젠더 관계와 잘못된 성문화, 여성혐오에 해당하는 인식들을 생성하고 유통시키는 공범자라고 여기지 않는다. ‘나는 면죄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대체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아마도 여성차별이나 여성혐오라는 것을 하나의 체계라고 여기고 싶지 않아서는 아닐까? 그런 것은 그저 어떤 개인의 속성, 기질, 한 명의 가치관 정도에 불과하다고. 나는 좋은 사람이므로 무관하다고.

우리는 성교육을 받은 일도 흔치 않지만, 대부분 개인과 개인의 만남 속에서 참으로 자유롭고 권력과 무관한 인간들의 만남을 상상하고 배웠다. 그나마 젠더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할 만한 교육에서조차 권력 관계는 삭제되기 쉬웠다. 성교육이라면 다들 그들에게 주어진 어떤 성별에 고착하여 그것을 완수하기 위한, 대개는 재생산 기능을 완수함으로써 끝이 나는 그런 식의 완수를 상상한다. 성을 체계라고 배우지 않고 그저 개인의 특질처럼만 배웠다는 말이다. 만약 체계라면 그것은 인류 재생산을 위한 기능적 체계로서만 이해되었던 것 같다. 그럴 때 요구되는 것은 그저 에티켓 정도일 뿐이다.

정말이지 이제부터는 성교육에 대해 매우 진지한 자세를 취할 때이다. ‘성’이라는 단어의 굴레와 경계를 의심할 수 있는 힘을 길러내는 일, 그런 질문들에 대한 포용력을 배양하기 위해 성교육이 필요한 것 아닐까. 제대로 된 성교육이라면 성을 완수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성적 체계를 의심하라는 메시지를 줘야 하지 않을까.




▶ 여성혐오, 성차별, 여성폭력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자유발언대. ⓒ페이스북 <강남역 10번 출구> 페이지

내가 성교육을 이성애 남녀 간의 성관계와 그때 필요한 에티켓 정도로만 여겼다면 나는 이 문제를 이렇게 어려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 인간이 어떤 성별/젠더 테두리 안에 갇혀야만 인간이거나 반대로, 그래서 부족한 인간이 된다면 우리가 어떻게 함께 인류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성관계에서의 에티켓은 매우 중요하고 반복해서 강조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라면 우리는 영원히, 아이를 출산할 수 있는 여성이거나 혹은 남성으로서만 인간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에티켓을 설정하려면, 관계를 맺는 성적인 인간들 사이를 흐르는 권력에 대해 고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을 근거로 에티켓을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오로지 성 관계의 순간에만 현미경을 들이대는 성교육은 실제 그 교육이 어떤 모래 위에 지어져 있는지 고심하지 않는 셈이다. 아들에게 성교육을 하려했을 때 그제서야 나는 성교육이 서있는 그 ‘모래’의 성질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그저 외우고 따르면 될 뿐인 ‘강간하지 말라’, ‘성관계시 피임하라’, ‘상대를 성적 대상화시키지 말라’, ‘NO는 NO를 의미한다.’ 같은 성관계 에티켓은 왜 그리 지켜지지 않는가? 왜 어떤 집단은 이 지침들을 무시할 수 있는데, 어떤 집단은 무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를 요구하기도 힘든가. 에티켓을 요구하는 집단과 무시하는 집단은 어쩜 이리도 일관되게 성별/젠더에 따라 나뉘는가. 그리고 이런 간단한 지침도 지키지 않아 일어나는 결과들은 얼마나 파괴적인가. 왜 그 파괴력은 한쪽 집단에만 거의 일방적으로 치명적인가.

실제 한 집단의 생사를 가늠할 정도의 파괴력을 지금 보고 있지 않나. 하물며 이번 사건은 일면식도 없던 ‘관계’에서 그저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으니, 에티켓을 요구할 수 없는 집단은 그 존재만으로도 죽을 수 있는 집단이 되었다. 가해자는 여자들이 자신을 무시했다고 말했지만 정확히 하자면 자신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부터 무시를 받았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딸들은 대개 에티켓을 요구하는 입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아들을 가르치려 보니 이 녀석이 이 지침들을 배운들 그런 것을 요구하는 입장이기보다 ‘무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이런 말을 무시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에게는 더욱이, 성관계 지침의 중요성을 넘어 요구와 무시를 가르는 권력의 지대를 강조해야만 했고, 네가 그 지대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을 인지시켜야만 했다.

젠더 체계 내 면면히 흐르는 힘의 무게를 인정하지 않고 그 전체를 의심할 수 없다면 성교육이라는 것은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특히 아들에게! 게다가 그 유리함이란 정말이지 환상과도 같아서, 그걸 위해 타인을 짓눌러야 하는 쓸모없는 일에 얼마나 많이 동참해야 하는지도 알려야 한다. 그러니까 아들더러 더 인기 좋은 남자나 되라고 성교육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다.

가부장제 사회의 대기 속에서 예기된 살인

어떤 살인자가 자신의 행동의 이유이자 그 대상으로 여성을 언급하기까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일조했다. 그들은 대개 남성이지만, 남성만 있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숨 쉬듯이 남녀의 젠더 위계를 옹호하고, 남성성을 정상성이라고 여기고, 피해여성에게는 피해를 당할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우리의 사회적 대기는 정말이지 그렇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대기를 형성하는데 최소 하루 한 숨 이상씩 기여한다. 그동안 충분히, 건실히, 튼튼하게 짜여 온 이 대기 속에서 강남역 살인사건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예기되었던 사건이다. 그러니 묻지마 살인사건이라고, 우발적 범죄라고 치부할 수 없다.



▶  20일 저녁, 서울 신촌 유플렉스 앞에서는 한국여성민우회가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 < 나는 OOO에 있었습니다>를 진행했다.   ⓒ출처: 한국여성민우회

이것은 명백히 젠더 체계에 대한 고민없음과 성차별 인식의 포화들이 만들어낸 사회적 결과이다. 특히 이번 사건에서 내가 주목하는 바는 젠더 위계에서 안정성을 얻기 쉬운 자들의 무지와 게으름이다. 그들은 유독 자신들의 공모 자체를 부인하고 싶어 한다. 아마도 남성성의 위치가 주는 안정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히는 남성성의 위치에서 그런 안정감을 보상받아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현실에 대한 화풀이를 애먼 곳에 하는 것이다.

지금, 더는 참지 않겠다며 화를 내고 있는 사람들은 남성성의 논리 안에서만 안정감을 얻으려는 사람들로부터 타자화된 사람들이다. ‘타자화된 경험이 없어 공감하기 어렵다’는 말도 슬슬 지겹다. 한국남자라면 군대에서 고생하고 온다고 늘 강조하지 않나. 남성성 논리 한가운데에서 쉬이 인권이 무시되고, 타자화되는 모멸감을 겪었음이 틀림없다. 이러한 경험을 권력을 사유하고 남성성을 의심하며 타자에 대해 공감하는 원초적 경험으로 이용할 법도 하건만, 어째 ‘나는 복종과 모멸을 견뎠으니 너도 견뎌라’는 식의 논리들이 더 많은가.

이 사회는 바뀌어야만 한다, 젠더를 성찰하라!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붙은 포스트잇 중에서 ‘살女주세요, 살아男았다’는 굉장히 직관적으로 작금의 젠더 체계를 똑바로 응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문구에서 사내 남(男) 글자가 쓰인 것은 살인자는 남자들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내 남(男) 자는 살인의 대상으로서, 어떤 분노의 타자로서 설 일이 없던 이들의 총칭이다. 젠더 권력의 안정적 점유라는 신기루 속에서, 무차별한 타자화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이들의 총칭이다.

더불어 이 말은, 그런 남성성의 논리를 수긍하고 전파할 때만 살아남은 자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성혐오 발언을 유통시키는 자가 ‘단지’ 성별적 남자만을 지칭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말은 성찰을 촉구하고 있다. 그들이 저지르는 ‘인식’들이 누군가를 생사의 공포 속으로 몰고 있다고.

우리가 젠더 권력이나 그 위계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수시로 이를 의심하고, 젠더라는 이름의 억압과 규범에 대하여 다양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고 배웠으면 어땠을까? 타자를 만날 때 늘 상호간의 힘의 차이가 있다는 걸 배웠으면 어땠을까? 타자에 대한 태도가 성적 윤리를 구성한다고 배웠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일일이 성관계 에티켓을 외우라고 시키는 일이 도리어 거추장스러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타자를 억압하면서까지 남성성에 열광하도록 만드는 사회가 모두에게 족쇄임을 배웠다면 어땠을까?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소환해냈지만 나는 성별이 남자인 내 자식이 남성성을 지향하기 위하여 자신의 너무 많은 것들을 버리기를 원치 않고, 사람들을 쉬이 타자화하지도 않기를 원한다. 그런 방식으로는 너 역시 자존감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남성성으로서의 ‘남성’이라는 명명을 쫓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몸을 사랑하라고 말할 거다.

만약 가능하다면 나와 녀석의 우습고, 미숙한 일상들이 서로를 좀 더 성찰적인 인간으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즉, 어떤 젠더의 완수를 위한 성교육이 아니라 젠더 자체를 성찰할 수 있는 성교육을 고민한다. 현재로서는 잘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무조건 최선을 다해 ‘해야만 한다’는 긴급함이 더 크다. 나 역시 더는 이런 불평등한 세상을 살고 싶지 않아서이다. 아무리 봐도 이 사회는 바뀌어야 한다. 나에게도, 아들에게도, 물론 딸에게도.

마지막으로 그녀의, 그리고 세상에 알려지지도 못한 채 젠더 폭력으로 인해 생을 달리했을 무수한 그녀들의 명복을 빈다.

▣ 김서화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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