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14일 목요일

조선통신사는 민페사절단이었다

 

[닭서리에 여념이 없으신 조선통신사 수행원들]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공식적으로 모두 12회 왕래되었다. 명칭상의 문제는 있지만 일본에 외교사절이 파견된 것은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일반적으로 통신사라 함은 조선후기에 에도막부 정권의 경조사를 챙기고, 국서를 전달할 목적으로 파견되던 사절을 의미한다. 에도 막부는 정권의 위세를 드높이고 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이유로, 다이묘들은 막부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통신사를 경쟁적으로 융숭하고 호화롭게 대접했다.

James B. Lewis 교수는 당시의 일본측 외교문서인『通航一覽』연구자료를 인용하여 조선통신사를 호위하고 먹이고 재우고 에도까지 모시기 위해 약 100만냥의 비용이 들었다고 하는데, 1706년 에도 막부의 1년 소요예산이 76만냥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비용이 소요된 셈이다.

이 비용은 막부가 전적으로 부담한 것이 아니라, 각 지방의 다이묘에게 할당을 했고, 다이묘는 다시 그 지역 농민들에게 비용과 노동력을 전가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조선통신사 행로는 한성-부산-쓰시마-이키-아이노시마-시모노세키까지 간 후 내해를 거쳐 강을 타고 교토를 지나 수도인 에도로 입성하게 된다. 이처럼 조선통신사가 머무는 중간중간 기착지마다 엄청난 물량이 동원되었는데, 만일 비바람이라도 불어 통신사 일행이 몇 십일이라도 머무르게 되면 그 지역 다이묘는 시밤 좆되는 셈이다.

중간 기착지의 하나인 이키(壱岐)의 향토사에 따르면, 조선통신사를 위한 연회 준비에 소요되는 물품리스트가 보이는데,  단지 2~3일 동안 이들이 먹고 마시는데 소요된 일부라고 한다.

① 참마: 1,500개 ② 달걀: 15,000개 ③ 전복: 2,000貫目(약 7,500kg) ④ 오징어: 5,000斤(약 3,000kg) ⑤ 쌀: 50석(약 7,500kg)) ⑥ 고급 사케: 15석(약 2,700리터)

이키에 도착한 뒤 원래는 하루만 묵을 계획이었는데, 이 단 하룻밤을 위해 후쿠오카에서는 1년 전부터 조선인들이 쓸 숙소와 연회장을 짓기 위해 건물을 지을 자재들을 섬으로 옮겼다. 도자기류와 그릇을 옮기기 위해 선박이 제조되었고, 부두가 건설되었다. 1년 동안 이 섬은 3,500명의 노동자들로 분주했다. 6개의 인근 섬과 육지에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봉화대도 세운다.

도착날이 다가오면, 통신사들에게 대접할 물고기들을 생포해 연회장 주변에 호수를 파서 풀어놓는다. 이 물고기들은 장기간 활어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염도와 탁도를 유지할 수 있는 전문기술을 보유한 어부가 관리한다. 사슴을 잡고 막대하게 소요되는 달걀을 생산하기 위해 수천마리의 닭을 모은다. 사절단은 쇼군을 위해 25마리의 매를 가지고 왔는데 이 매들만으로도 하루에 100마리의 닭이 필요했다. 값비싼 금과 은 그릇들은 에도, 오사카, 나가사키의 시장에서 각 지역 상인들이 구해온 것이다.

시모노세키를 지나 내해로 접어들면 교토까지 강을 타고 와야하는데, 배가 들어와야 하므로 수심이 낮은 강은 모두 인력을 동원하여 강바닥을 파내야 했다. 1711년에는 이처럼 강바닥을 치우는데, 20,644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노동력이 사용할 괭이, 횃불, 대나무 등 자재는 물론이고 품삯에 식대까지 감안하면 추가로 엄청난 비용이 든다.

당시 에도 막부는 안보상의 이유로 강에 교량을 설치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단 두가지 예외가 있었다. 하나는 쇼군이 여행을 할 때이고, 또하나는 조선에서 외교사절이 방문할 때다. 예컨대, 후지강의 부교는 125척의 배를 동원하여 등나무 덩굴을 써서 배를 교착시킨 다음 널판을 대서 배와 배사이를 잇고 그 위에 흙을 뿌린다. 그리고 소금을 뿌려 흙을 굳힌다. 덩굴을 모으기 위해 2,250명이 투입되었다. 다리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6,781명이 동원되어 총 9,031명이 노역을 해야했다. 이렇게 어렵사리 막대한 물량과 인력을 동원하여 교량을 만들지만, 조선통신사가 강을 건너자마자 바로 없애버리므로 통신사가 조선으로 귀환하는 날에 맞춰 이짓을 한번 더 해야 한다.

이렇게 융숭하고 호화로운 대접을 받았으면, 기본적으로 대접받는 사람들도 거기에 걸맞는 예의와 답례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실은 그러지 못한듯 하다. 소중화 사상에 쩔어있던 예부터 우리는 일본을 하대하는 이상한 자부심으로 충만했는데, 문화적으로 미개한 쪽바리에게 이런 융숭한 대접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고, 다이묘의 대접을 다른 곳과 품평하는가 하면, 접대가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그릇을 훔치거나 종사자를 폭행하는 불미스러운 일들이 종종 일어났다.

일례로 통신사로 갔던 최천종은 자신의 거울을 칠칠 맞게 잃어버리자, 일본인 역관이 훔쳐갔다고 의심하다 짜증이 폭발하여 "미개한 왜놈들의 절도근성" 운운하며 역정을 냈는데, 이에 분개한 역관이 "그릇이나 훔쳐가는 조선인"이라며 반격을 하자, 그만 이성을 잃고 달려들어 자신의 지팡이로 역관을 마구 폭행하게 되었다. 무사 출신인 역관이 이에 앙심을 품고 최천종이 잠이 든 사이에 살해하고 달아나는데, 결국 자수하여 공개처형을 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생겼다.

홍우재의『동사록』中 임술년 6월 29일자에  따르면, 대마도주가 친히 5조목으로 된 족자를 보내 단속을 요청한 사실을 적고 있다. 그 중 첫째로 지적한 내용을 보자면, 일행의 上官이하에 있어서 마땅히 정숙하고 조심해야 함이 요망되며, 술에 취하여 문이나 기둥에 흠집 내거나, 돗자리나 병풍을 베어 내거나, 벽에 침을 뱉거나 오줌을 계단에 누는 것이나, 말을 몰다가 사람을 치여 죽이거나, 여러 관속들이 심부름할 때 높은 곳에 앉아 오만하게 내려 보는 일들을 금한다는 것이다.

김지남의『동사일록』에서도 말을 탈 수 없는 下官이 멋대로 타고 가버려, 정작 말을 타야할 사람은 말이 없어 왜인에게 말을 내놓으라 하고, 우물쭈물하면 줜내 싸다구나 날리고 그러는 모양이니, 앞으로는 상, 중, 하 비표를 나눠줘서 소지자한테만 말을 내주도록 단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조선통신사는 한일 양국간의 소통창구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가질지는 모르지만, 그 역할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던 반면에 외형과 규모적인 과시에 집착하여 결과적으로는 일본 민중에게 과도한 부담과 민폐를 끼친 사례이기도 하다. 사실이 그러한데도, 우리 역사교과서나 매스컴에서는 원조 한류니 뭐니 하면서 마치 우리가 조선통신사를 통해 일본에 크나큰 문화적 시혜라도 준 것인냥 착각하게 만드는 왜곡을 일삼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오늘날 마트마다 넘쳐나는 형형색색의 고구마가 없었다면, 조선이란 나라는 한일합방 이전에 이미 기근으로 사라졌을 나라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 고구마나 수차시설은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것이라는 것도 알아야 하는데, 아직도 임란때 납치된 도공이 수십만명이라는 낭설이 버젓이 교과서에 실려있는 한, 이 나라에서 제대로 역사를 배울 길은 묘연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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