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26일 화요일

5.18 에 북한군 잠입을 믿는 몽상가들을 반박하다


광주 사태(5.18 에 대해서는 ‘광주 민주화 운동’ 에서 부터 ‘광주 폭동’에 이르기 까지 진영에 따라서 명칭이나 평가가 다양하기 때문에 본 글에서는 가치 중립적인 ‘ 광주 사태 ‘ 로 편의상 부르기로 한다) 시에 인민군이 광주 현지에 투입되었다. 라는 근거없는 음모론의 실체는 보수 우익  일부 인사들에 의하여 제기된 사례로, 이 역시 실체가 없는 것으로 점차 드러나고 있다.

광주 사태시에 인민군 개입설에 대해서는 지난 35년간 몇몇 필진들에 의하여 기정사실화하는 글이 올라온 반면에,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취지의 글들도 여러 차례 꾸준히 게재가 되었다.

최근 박주신 군의 징병검사용 신검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 중에는 북한군 광주 투입이 사실이 아니라는 견해에 대해서도 틀렸다는 시각을 보이고 있기에 이들이 광주에 투입되지 않았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필자가, 광주 사태시에 인민군 현지 투입 주장의 설득력이 없음을 상식선에서 논지를 펼쳐보고자 한다.

광주 사태에 인민군의 투입을 주장하는 사람도 실제로 목격하거나 대면하여 교전하거나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한 사람은 없다. 풍문으로 들었다거나 막연히 개입했을 것으로 상식선에서 추정하는 것처럼,  이에 대한 필자의 반박 역시 과거 북한의 도발 양상이나 드러난 선례들을 검토한 상식선에서의 주장임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1980년 5월 18일부터 광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지역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 기간 중에 1개 대대 약 600 여명 규모의 북괴 정규군이 암암리에 남반부 모처로 상륙하여 광주에 진입하여 시위 군중들 속에 숨어들어서 국군과 교전을 벌이는 작전을 수행하였다는 것이 인민군의 광주 투입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사건 개요다.  그 중에는 1 개 대대가 아니라 50 명 규모가 침투했다는 어떤 탈북자의 소수 의견도 있었다.


인민군이 투입됐다는 주장이 현실성이 없음을 다음 몇 가지 이유를 분석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1. 가장 결정적인 부정 이유는,  그 많은 병력이 광주에 진입했다면 북괴군의 침투시에 타고 온 선박이나 이동할 때 사용된 차량(육상 운송수단), 그리고 인민군 중 어느 것 하나라도 결정적인 증거가 대한민국 국민 누군가에게는 목격되었을 텐데 5천만명 국민 중에서 직접 목격했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이다.

당시는 12.12 사태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소요의 기운이 감돌고 사회가 안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계엄령이 선포되어 있는 상황으로, 우리의 영해와 간첩들이 주로 출몰하는 지역의 해안선 경계는 평소보다  삼엄했고 도로의 요소요소에는 군/경 합동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600여명의 전투 병력과 무기,탄약, 보급품, 지상 운송 차량 등을 탑재한 선박이라면 수천 톤은 족히 나가는 대형 선박이거나 중소형 선박이라면 여러 대가 선단을 이뤄서 NLL 을 넘고 최소한 5시간 이상 항해를 해야 변산반도나 군산 인근 모처에 도달할 수 있는 데 북괴의 대형 함정이 항구가 아닌 해안에 바로 접안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대의 소형 상륙정에 분승 상륙했을텐데 그 과정에서 우리 해군이나 전탐 레이더, 또는 해안 초병 등에게 포착 가능성이 높았음에도 어느 누구도 적발된 바가 없고 상륙 후 그 많은 인원이 무려 50 km 를 도보로, 아니면 군용 트럭으로,  그것도 아니면 민간 교통수단(버스)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단 한 곳에서도 전혀 노출 됨이 없이 흔적을 남기지 않고 광주로 진입하는 것이 가능할까?


2. 무장한 600 여명의 병력이 광주에 출몰했다면 불과 50 m 간격으로 산개해 있었던 국군(계엄군)과 조우하는 것과 쌍방간 무력 충돌은 필연이었을텐데 교전을 벌였다고 밝힌 아군 부대도 없었고 치열한 교전을 목격한 시민도 없었으며 사살되거나 부상, 혹은 생포된 인민군은 왜 단 한명도 없단 말인가?

과거 북괴군의 남한으로의 대량 침투한 사례는 3 차례가 있었는데, 1968년 1.21 무장공비 청와대 침투 사건시에는 31명의 공비들을 섬멸하기 위하여 1월 31일까지 작전을 벌여서 침투 공비중 28명이 사살되고 1명은 생포되고 2명이 북상, 북으로 복귀했고 아군은 23명 전사, 52명이 부상을 입었다.

120명의 무장공비가 침투한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에서는 우리 국군이 무장공비를 섬멸하는 데 1968년 10월30일부터 같은 해 12월 28일까지 무려 59일이 소요되었으며 무장공비 사살 107명, 4명 생포, 3명이 투항하고 6명은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휴전선을 넘어서 월북하였으며 우리 군도 34명 전사, 부상 50명외에 민간인도 31명이 피살되었다.

마지막 사건은, 1996년 9. 18 일 26명이 승선한 북괴의 잠수함이 동해안으로 침투하여 승조원들과 북괴군들이 내륙으로 잠입하였는 바, 이들을 섬멸하기 위하여 같은 해 11월 5일까지 계속된 작전을 통하여 인민군  25명은 사살되거나 퇴로가 막혀서 육상 도주가 불가하게 되자 일부는 자살을 하였고 단 1명만이 생포되었다.  이 작전에 투입된 아군 중 12명의 군인, 경찰관과 예비군 각 1명이 전사하고 민간인도 4명이 피살되었다.

과거 3 차례의 인민군 수십명 내지 100 여명이 침투한 경우에도 각각 아군 병력 1 만여명 이상이 투입되어 장기간에 걸친 섬멸 작전을 펼쳐서  피아간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일부는 생포나 투항을 하고 극소수 인원만이 월북에 성공했음에 비추어 본다면,  광주에 600 명의 인민군이 들어온 것이 사실이라면, 이들의 섬멸을 위하여 6 개월 이상의 기간이 요하고 교전 과정에서 최소한 500 명 이상이 사살되고 50 여명 정도는 생포(주로 부상 상태에서), 20~30 여명은 투항하였을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다.

600 여명의 북괴 정규군과 교전해야 했다면 아군도 많게는 전사 300 여명, 부상 700~800 여명, 도심지에서의 교전임을 감안하면 민간인도 인민군이나 유탄에 의한 사고사 등도 1,000 여명 정도가 죽거나 부상자가 족히 발생할 것임을 쉽게 예견할 수 있다.

마지막까지 쫓기다가 북으로 탈출 장도에 오르는  북한군의 인원도 20 여명 정도는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면,  생존자들은 휴전선과 상당히 거리가 먼 남부지방이라는 지형적 특성을 고려할 때 약속된 일시와 지정된 해안에 집결해서, 대한민국 영해로 다시 침투한 북한 선박이 접안하면 접선해서 대동 월북하거나, 6.25 때 패주하던 인민군의 도주로였던 지리산을 통하여 태백 준령을 넘어서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육상 노선을 택하여 어렵게 월북을 시도하였을 것이다.

과거 불과 수십명이 침투한 경우에도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음에 비추어 보면, 그보다 20 배 이상의 대 병력이 투입된 광주 사태에서는 교전 과정에서 발생한 그 많은 인민군과 국군, 민간인 시신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으며, 아니면 그들은 단 한 차례의 교전을 한 흔적도 없고 단 한명의 인명 피해도 없이 혹시라도 금남로에서 열병식만 거행하고 바람과 함께 사라졌단 말인가?

3. 한국인, 특히 국군을 속이기 위하여 인민군도 국군 복장과 국군과 동일한 화기를 사용했을 것이기 때문 아군으로 오인하여 교전이 필요 없었다는 궁색한 주장이라도 할 참인가?  김신조 일당이 침투시에도 무장공비들은 국군 복장을 했지만 결국에는 발각이 되고 말았다.  말 몇 마디만 섞어봐도 한국인인지 북한인인지 구별할 수 있음은,  탈북 10년차가 되어도 여전히 남한 말씨가 어눌한 탈북인들의 말투나 억양으로 미루어 보면 쉽게 식별이 가능함에 비추어 수백명 인원이 국군으로 가장하는 것은 쉽지 않고 금방 들통나게 마련이다.

4. 전투 요원을 운송하는 선박이라면 군용 선박이라야 하고 접안이 용이한 상륙정이어야 한다.  인민군 600 명 + 50명 이상의 해군 승조원과 무기, 식량, 보급품, 군용 트럭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수송선이나 상륙정이 북한에는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무슨 배를 동원했으며, 게다가 들키지 않고 우리 영해를 12시간 이상(왕복 및 하선 소요시간) 항행을 할 수 있었을까?  상식을 초월한 주장이다.

5. 광주 사태는 대한민국 국민들도 예상치 못했던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우리 국민들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북한이 광주 사태가 마침 그 시기에 발생할 것을 알 수 있으며, 사전에 준비하고 있다가 어떻게 그리 신속하게 그 많은 병력과 아군 군복,  M-1 소총이나 칼빈 소총, 혹은 경기관총(기관단총)과 같은 국군 무기를 준비하고 30 대 이상의 트럭(1대당 20명 탑승 환산), 준비된 대형 선박에 탑승하여 때 맞춰서 광주에 투입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북한의 여건으로는 대형 선박을 외국에서 구입하거나 임차하는 데 최소한 3 개월(외국에서 출발해서 해주항이나 남포항까지 도착하는 기간을 포함하면 3개월로도 부족할 것 같다),  국군 복장,  군화의 제작, 아군 무기 확보하는 데 걸리는 기간 등을 감안하면 광주 사태가 촉발된 5월 18일 부터 남파를 추진하더라도 아무리 빨라야  같은 해 8월 중순 이후에나 출항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6. 인민군이 광주에 침투했다면 단기 침투 공작이든,  장기간의 작전을 계획하고 침투했든 한국 땅에서 본인들의 의사에 따라서, 아니면 의사와는 무관하게 삼엄한 경비때문에 퇴로를 차단당해서 상당 기간 남한 땅에서 숙식을 해결했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 곳에도 노숙이나 취사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600 명의 대 부대가 며칠을 머물렀다면 하다 못해 배출한 배설물 흔적이나마 늦게라도 발견될 터인데 왜 흔적도 없었을까?

7. 600 명 이상의 북한군이 남한 땅에 상륙했다면,  호남 지방에 당도한 인민군 부대와 인민무력부나 주석궁간에 오가는 정체 불명의 안착 보고나 일일 보고 등 휴전선을 월경하는 통신 전파나, 아니면 남파 병력 총 지휘관(대대장 급)과 중대장, 혹은 중대간의 교신을 하는 워키토키 교신 등 어느 것 하나라도 국군의 통신 감청망에 포착이 되었을 터인데 왜 아무런 교신 근거가 포착되지 않았을까?  

8. 600 명 이상의 대병력이 승선한 군함이 해상 분계선 이남에서 아군의 감시망에 포착되어 격침되거나  아군에 나포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데 전면전을 각오하지 않은 이상, 성공 가능성이 별로 높지 않은 이런 무모한 작전을 수행할 정도로 북한의 수뇌부가 어리석을까?

9. 정말로 인민군 600 명이 광주에 침투했다가 인명 피해 없이 북한으로 복귀했다면 북한은 침투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유공장병들에게 대대적인 포상식을 거행하고 경축하는 행사를 하고 언론에도 보도했을 터인데  왜 그런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았을까?  자신들의 소행을 부인한 천안함 격침 유공 장병들에 대한 훈장 수여식까지도 은밀하게 거행했음을 보도한 것이 북한이 아닌가?

10. 정부(국방부 및 대간첩 대책본부)는 인민군 침투설을 왜 부인하나? 우리 정부가 은폐하는 것인가?

11. 우리 국민, 특히 호남인들 중 왜 단 한명의 목격자도 없나?


12. 28,000 명 이상의 탈북자 중에서 당시 광주에 침투군으로 들어왔던 인민군 출신자나,  자기 부대에서 동료 군인들 중에 광주에 침투한 부대명이나 침투 장병의 명단을 제공하는 사람이 왜 단 한명도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모든 정황은 광주 사태시에 인민군이 현지에 투입됐을 가능성이 다 방면에서 희박하다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인민군 광주 침투설을 믿는 사람들은 필자가 언급한 내용에 논리적으로 반박하지는 못하면서도 아마 필자가 잘못 아는 것이라고 비난하지 않을까 싶다.  고명하신 지만원 박사의 주장을 거명하면서 말이다.  타블로가 미국의 유명 대학을 졸업했음을 증명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 5 가지 이상의 증거(졸업증 및 학위증), 지도 교수 인정서,  해당 대학이 발급한 확인서,  함께 수학한 동창들의 증언,  졸업 앨범 사진 등을 제시해도 허위라고 주장한 타진요 회원들 중 맹동분자 몇 명은 명예훼손으로 옥살이를 하고서도 여전히 그의 학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아직도 펴고 있는 것을 보면 광주 사태시에 인민군 광주 침투라는 황당한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맹신하는 사람이라고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런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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