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3일 일요일

역사가 보여주는 절대권력의 위험한 유혹

중국은 2000년 이상 절대권력자들이 통치한 왕조국가였다. 절대권력을 손에 쥐려는 야심가들 간의 싸움과 그 주변을 맴돌며 권력을 탐하는 소인배들 사이의 암투가 끊이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상가에게 왕조체제는 비판을 넘어 항쟁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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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 어느 날, 동녘이 희붐하게 밝아올 무렵이었다. 호남성 형양(衡陽) 연화봉(蓮花峰) 아래 가시덤불 속에서 40대쯤 돼 보이는 중년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머리는 산발해 검불 같고 옷은 다 해어져 못 봐줄 지경이었다. 얼굴은 누렇게 뜬 것이 마치 한센병 환자 같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사방을 둘러보더니 은밀히 속몽암(續夢庵) 쪽으로 휘청거리며 걸어갔다. 더할 나위 없이 한적한 속몽암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벌써 훤하게 밝은 뒤였다. 그는 등에서 자그마한 보따리와 우산을 내려놓은 다음 돌의자에 걸터앉아 하늘을 바라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보따리에서 큰 붓을 꺼내 먹을 듬뿍 찍어서는 바위에 글을 썼다.

‘육경(六經)은 나를 눈뜨게 했으나, 하늘은 일곱 자 이 몸을 버리는구나!’

“제왕은 다 도적들”

이 남자가 바로 후세에 ‘위기의 사상가’로 일컬어지는 명말 청초의 애국지사 왕부지(王夫之·1619~1692)다. 멸망한 명의 잔여 세력이 세운 남명(南明) 정권에 가담한 그는 명을 멸망시킨 청에 대항해 투쟁했으나 잇달아 좌절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인적이 드문 이곳에 정착, 낮에는 숨고 밤에만 움직이는 고달픈 피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시를 다 써내려간 왕부지는 바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지러운 전세 속에서 부모 형제와 처자식들이 잇따라 세상을 등졌다. 왕부지는 천지개벽과도 같은 역사의 전환점 앞에서 놀라고 비관하고 실망했으며 의분을 금할 길이 없었다. 명 왕조의 철저한 복멸(覆滅)을 두 눈으로 지켜봤고, 가족의 파멸이라는 무한대의 고통을 경험했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고 국면을 되돌릴 힘은 없었다. 그는 조용한 곳에 은거해 칼 대신 붓으로 명 왕조 멸망의 교훈을 살펴보고 사상, 문화, 교육의 영역에서 항청(抗淸) 투쟁을 계속하려고 마음먹었다. 보따리를 얹은 돌의자에 다시 앉아 생각에 잠겼다.

명 왕조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은 정치의 부패, 정부의 무능함에 있었다. 그런 부패와 무능의 배경에는 교육의 결함이 자리잡고 있었고, 근본적으로는 권력을 멋대로 휘두른 절대권력자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국가교육의 큰 줄기는 천하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을 가진 통치자들이 장악해야지, 못된 소인배나 썩은 당파의 수중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왕부지 이후 중국에서는 절대권력을 쥔 왕조체제를 비판하는 사상가들이 속속 출현했다. 왕부지보다 10년 정도 늦게 태어난 당견(唐甄·1630~1704)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잠서(潛書)’에서 “진(秦) 이래 제왕은 모조리 다 도적들이었다”라고 쓰고 이런 주석을 달았다.

한 사람을 죽이고 옷감이며 양식을 빼앗는 자를 도적이라 한다. 그렇다면 천하 사람을 모조리 죽여 그 재물과 부를 차지하는 자를 도적이라 부르지 않고 뭐라 부를까.

도륙, 약탈, 음탕, 쾌락…

진나라 이전 하(夏)-상(商)-주(周)로 이어진 3대 국군(國君)은 어느 정도 추대의 성격이 있었다. 진 이후 황제라는 칭호가 등장하고, 황제의 강산(江山)은 싸워서, 또 대규모 약탈을 통해서 얻기에 이르렀으니 황제가 도적이 아니면 무엇인가라는 문제 제기였다. 그리고 이런 글이 덧붙었다.

천하가 평정되고 싸움은 없지만 전쟁에서 죽은 백성과 전쟁 때문에 죽은 사람이 열에 대여섯이다. 해골을 거두지도 못했고, 곡소리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고, 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곤룡포를 입고 가마를 타고 대전에 앉아 축하의 인사를 받는다. 높은 궁궐, 넓은 정원에 처첩들은 귀해지고 자식들은 살이 찐다.

황종희(黃宗羲·1610~1695)는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에서 전제 황제는 천하에 큰 피해를 주는 존재라고 했다. 이어 강산을 빼앗는 이 ‘강도’들의 열악한 심리 상태를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천하를 미처 얻지 못했을 때는 천하 사람을 도륙하고 아들딸들을 찢어놓아 저 한 사람의 산업으로 삼으면서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 듯 ‘진실로 자손을 위한 창업이다’라고 말한다. 강산을 얻고 나면 천하의 골수를 벗기고 자녀를 이별시켜 저 혼자만의 음탕과 쾌락을 받들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이것은 내 산업의 배당금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황제는 도적만 못하다. 도적은 훔치고 죽이면서 늘 죄책감을 어느 정도 갖는다. 더러 부득이한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황제는 천하의 백성을 죽이고 쥐어짜고 부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또 그렇게 해놓고도 태연자약이다. 이런 상태가 한 해, 두 해 계속되면 황제 된 자는 갈수록 교만해져 아무런 구속도 없고 법도 하늘도 없이 자기 멋대로 행동한다.

오랜 세월 억압당해온 백성들은 마지못해 억압을 견디다보니 노예 근성이 생겨 무슨 일이든 겁을 먹어 소심해지고, 구차하게 편안함만 추구하고, 진취적인 생각은 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호 영향과 악순환이 2000년 넘게 지속됐으니 백성의 우매함, 빈곤함, 낙후의 진정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비판은 명 왕조가 이민족 만주족에게 멸망당하는 위기 속에서 비롯됐다.

王侯將相이 따로 있나

사마천은 3000년 중국 통사 ‘사기(史記)’를 효율적으로 저술하기 위해 ‘기전체(紀傳體)’라는 서술 체계를 창안했다. 주로 제왕들의 기록인 본기(本紀), 연표에 해당하는 표(表), 국가의 제도와 문물을 전문적으로 다룬 서(書), 제왕들을 보좌해 천하대세의 흐름을 주도한 인물들을 주로 다룬 세가(世家), 수많은 보통사람에 대한 기록인 열전(列傳)이 그것이다. 기전체는 본기의 ‘기’와 열전의 ‘전’을 따서 만들어낸 단어다.

사마천은 제후나 공신들의 기록인 세가 편에 특별한 두 사람을 포함시켰다. 춘추시대 유가 사상가로서 고대 문화를 집대성한 공자(孔子)와 진섭(陳涉)이란 인물이다. 평민 출신으로서 제후나 공신 반열에 오르지 못한 공자를 세가에 편입시킨 의도는 그의 문화적 업적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공자의 유가사상이 훗날 국가의 배타적 지배 이데올로기로 수용되면서 공자의 세가 편입을 둘러싼 시비는 그다지 없었다. 사실 사마천은 본기나 세가에 꼭 제왕과 제후만 들어가야 한다는 원칙은 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본기에 항우도 넣고, 심지어 여태후(유방의 부인)까지 포함시켰다.

문제는 진섭이었다. 진섭이 누구인가. 신분상으로는 평민보다 못한 농민이고, 정치적으로는 최초의 통일왕조 진(秦)나라의 폭정에 반기를 들고 농민 봉기군을 일으킨 인물이다. 진 왕조의 처지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역적이다.

진섭의 봉기는 진 왕조가 무너지는 데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사마천은 진섭의 농민 봉기를 대단히 높게 평가했다. 사마천은 ‘진섭세가’를 지은 동기에 대해 이렇게 썼다.

걸(桀)과 주(紂)가 왕도를 잃자 탕(湯)왕과 무(武)왕이 일어났고, 주 왕실이 왕도를 잃자 ‘춘추’가 지어졌다. 진이 바른 정치를 잃자 진섭이 들고일어났다. 제후들도 따라서 난을 일으키니 바람과 구름이 몰아치듯 마침내 진을 멸망시켰다. 천하의 봉기는 진섭의 난으로부터 발단됐으므로 제18 ‘진섭세가’를 지었다.

사마천은 진섭의 봉기를 탕과 무왕의 역성(易姓)혁명에 비유할 정도로 높이 평가했고, 그래서 당당히 세가에 편입시킨 것이다. 백성들을 위하지 못하는 정권이나 왕조는 무너져야 한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았다. 그랬기에 사마천은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더란 말이냐”는 진섭의 외침을 그대로 전한 것이다. 누구든 부당한 권력에 대한 견제와 항거는 정당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21세기 제왕적 권력체제

‘좌전(左傳)’은 진나라 통일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책이다. 당시에는 훗날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왕조체제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미 수백 년 전에 옛사람들은 훗날 벌어질 일을 우려한 것일까. ‘좌전’ 양공 14년 조항에 보면 진(晉)의 악사 사광(師曠)이 이런 말을 한다.

하늘이 백성을 사랑하시니 어찌 한 사람이 온 백성의 머리에 올라타고 마음대로 나쁜 짓을 하게 하겠는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왕조체제에서 제왕의 수중에 있는 최종결정권, 최고권력은 그것이 주는 유혹의 힘이 너무 컸다. 왕궁 밖에서는 야심가들이 제왕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고, 왕궁 안에서는 소인배들이 제왕 주변을 맴돌며 호시탐탐 권력을 탐했다. 다른 점이라면 야심가들의 쟁탈 방식은 목숨을 건 적나라한 싸움이고, 궁중 소인배들의 쟁탈 방식은 음모와 간계를 동반한 암투라는 것이다.

야심가들의 목표는 제왕 자리고, 궁중 소인배들의 목표는 제왕의 실권 즉, ‘최종결정권’이다. 그러니 소인배는 제왕이, 제왕은 소인배가 필요했다. 어떤 때는 소인배가 제왕을 우롱했고, 어떤 때는 제왕이 소인배들을 우롱했다. 하지만 정작 우롱당한 것은 수많은 백성이다.

일각에서는 지금 우리의 권력체제를 ‘제왕적 권력체제’라고 일컫기도 한다. 부끄러운 말이다. 우리 정치가 아직 제왕적 권력체제를 청산하지도 극복하지도 못했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엄연히 국민이 직접 자기 손으로 최고권력자를 뽑는 민주제도 아래서 그런 말이 나온다면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권력자를 정점으로 하는 그 내부의 행태 또한 왕조체제의 그것과 많이 닮았다는 점이다. 권력자가 집권 후기로 접어들어 레임덕이 심하게 오거나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까지는 이 체제를 견제할 마땅한 수단과 방법이 없다.

권력자가 지닌 바로 그 최종결정권에 빌붙어 최후의 순간까지 맹목적으로 권력자에게 충성하는 소인배들이 권력자를 극력 옹호하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 권력자를 따라다니며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나라에 패거리 정치문화가 뿌리 깊게 내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9족을 다 죽여도 못해?”

물론 옛 절대왕조 체제의 권력자 주변에 소인배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정한 권력에 맞서 분연히 목숨을 내던진 이도 적지 않다.

명나라 3대 황제 주체,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는 흔히 조선시대 수양대군(세조)과 비교되는 제왕이다. 그도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를 내몰고 황제 자리를 찬탈했다.

그의 찬탈에 방효유(方孝孺)라는 학자가 극렬하게 저항하다 무려 ‘9족’이 죽는 끔찍한 보복을 당했다. 당시 도성이 파괴될 때 궁중에 큰불이 났다. 황제 건문제(建文帝)가 화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방효유는 상복을 입고 통곡하면서 대전으로 들어갔다. 방효유는 주체에게 왜 쿠데타를 일으켰냐고 물었다.

주체 : 주공(周公)을 본받아 성왕(成王, 건문제를 주나라 성왕에 비유)을 보좌하려 했다.

방효유 : 그 성왕은 어디 계시오?

주체 : 안타깝게 스스로 몸에 불을 질러 죽었지.

방효유 : 그럼 왜 성왕의 아들을 세우지 않는 거요?

주체 : 나라는 연장자에게 의지해야지.

방효유 : 그럼 성왕의 동생은 뒀다 뭐 하려고요?

방효유의 마지막 추궁에 주체는 더는 변명거리를 찾지 못하고 말문이 막혔다. 주체는 보좌에서 내려와 “이건 우리 주씨 집안일이니 선생이 그렇게 신경 쓸 일이 아니잖소?”라며 달래보려 했다. 그러고는 지필묵을 가져오게 한 다음 “천하에 알리는 조서는 선생이 쓰지 않으면 안 되겠소”라고 말했다.

그러나 방효유는 붓을 바닥에 집어던지며 주체를 향해 “목이 떨어져도 조서는 쓸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 말에 주체는 안색이 변하면서 “9족을 다 죽여도?”라고 위협했다. 방효유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10족을 다 죽인다 해도 할 수 없소이다”라고 응수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주체는 방효유의 9족을 몰살했을 뿐 아니라 그의 문생들과 친구들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이 일에 연루돼 죽은 사람만 873명에 달하고, 군대로 끌려간 사람은 1000명이 넘었다. 정말 공교롭게도, 주공에 자신을 비유하고 나선 주체의 이런 논리를 조선의 세조가 그대로 베꼈고, 사육신이 이를 비난했다.

방효유는 불의를 참지 못하고 분연히 나섰다가 당당히 죽음을 맞았으나 주체는 결코 승리자가 아니었다. 주체는 방효유의 명성을 빌려 자신의 의도를 분칠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결국 ‘역신 찬탈’이라는 오명을 역사에 영원히 남기게 됐다.

왕조체제에도 이런 지성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체제 자체가 아니라 지도자란 말인가. 아니면 그 지도자를 뽑는 백성들이 문제란 말인가. 또 한 사람의 ‘위기의 사상가’ 고염무(顧炎武·1613~1682)는 이런 말을 남겼다.

한 나라의 흥망은 백성들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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