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1일 금요일

북한 시절 경험했던 ‘나의 평양 과외 체험기’

인터뷰 날짜 : 2012년 11월
장소 : 북한개혁방송 사무실
증언자 : 김청솔(가명/함경북도 청진시 거주)
탈북일자 : 2011년 7월
출처 북한개혁방송 : 홈페이지 바로가기

나는 2008년 청진에 있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평양을 오가며 공부했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약 3년 6개월 정도 평양에서 머물렀던 것이다.

2005년 10월, 처음 평양에 가게 되었을 때가 중학교 6학년 나이인 17살이었다. 그때는 대학 입학을 위한 공부(과외) 때문에 평양을 가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공개적으로 대입 공부 때문에 평양에 간다고 할 수가 없어서 당시에는 엄마 친구 딸로 위장해서 가게 되었다. 엄마 친구를 따라 평양에 도착했는데, 그 집 세대주가 김책공대 직원이었다. 그를 통해 (과외)선생을 소개받았고, 그 집에서 하숙하며 공부를 시작했다.

■ “요새 대학 가려면 지방에서 공부하면 절대로 안 돼”

북한에서는 일반중학교 3학년 때 1고등중학교 시험을 친다. 나는 1고등중학교 시험에 떨어졌는데 그 이유가 나이가 많아서였다. 당시 청진만 특별하게 그런 규정이 있었다. 그때는 1고등중학교를 못 가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방황도 했고 다시는 공부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4학년을 보내고 나니까 남는 것이 없었다. 문득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생겨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2005년 3월에 나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학교에 다니면서는 도저히 공부할 수가 없었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일하고 청소하고 집에 온다. 집에 오면 힘들어서 공부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학교를 관두고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2005년 4월, 해운대학을 졸업한 학생에게 처음 과외를 받았는데, 그는 8월에 군대에 가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서 우리 집으로 찾아와 과외를 해주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모두 수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1고등중학교 교재를 가지고 공부했는데, 해운대학 출신 과외 선생이 1고등중학교 교재를 못 풀더라(1고등중학교 교재는 일반 중학교 교재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다른 과외 선생을 구했다. 새로 구한 선생은 도 1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산대학을 나온 후 은행 직원으로 있는 사람이었는데, 수재인 것은 알겠는데 가르칠 줄은 몰랐다. 수학 문제를 모르겠다고 하면 내가 이해하게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풀이한 것을 보고 하라는 식이었다. 하루에 한 시간 과외 하는데 5만원(15달러) 정도 주었다. 나로서는 시간은 가는데 실력이 늘지 않으니까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원산경제대학을 가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평양에 있는 대학에 가라고 했다. 그러던 중에 우리 엄마가 평양에 있는 친구가 생각이 나서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그분이 우리가 청진에 살고 있다고 하니까 잘 산다고 생각했는지 대학을 가려면 지방에서 공부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며 요새는 다 (평양에) 올라와서 대학을 직접 체험해야지만 붙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래서 2005년 10월 평양으로 가게 된 것이다.

나처럼 대학 입학을 위해 지방에서 평양으로 공부하러 오는 사람이 몇백 명은 될 것이다. 일반중학교는 100명 중 1명 정도, 1고등중학교는 100명 중 2명 정도는 될 것이다. 나 역시도 평양에서 공부할 때 나 같은 학생들을 꽤 많이 보았다.

■ 평양서 하숙하며 과외 시작, 한 달에 100달러 소비

엄마 친구 집은 3칸짜리 집으로 사는 수준이나 환경은 깨끗했다. 한 달에 30달러씩 숙식비를 내고 살았는데 평양에서도 비싼 편에 속한다. 당시 평양에서 하숙한다면 평균 20달러 정도선이었다. 그런데 내가 머물던 집은 먹는 것도 괜찮았고 과외 선생도 소개해주어서 30달러를 달라고 했다. 하숙비에는 먹는 것과 자는 것이 포함되고 기타 간식은 내 돈으로 사 먹었다.

나처럼 공부하러 올라온 사람들은 대체로 생활이 비슷하다. 대게 평양으로 올라온 사람들은 돈 있고 잘 사는 사람들이다. 하숙비가 20~30달러 정도인데, 그것을 제외하고 돈 쓰는 것을 보면 꽤나 돈이 있는 아이들만 올라오는구나 생각했다.

당시 평양에서 과외공부를 하면서 소비한 액수가 80~100달러는 될 것이다. 30달러는 하숙비를 냈고, 20달러는 과외비에 사용했다. 나머지 30달러는 먹을 것을 사서먹거나 참고서, 책을 사는 데 사용했다. 집에 있다면 간식이나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었지만 남의 집에 있으니까 배가 더 고팠던 것 같다.

책이나 참고서, 연필 등을 사는데 만도 한 달에 10달러씩 나갔다. 장마당이나 책방에 가면 대학 입학 참고서가 있다. 종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시험 문제가 그 범위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것만 보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정도는 된다. 장마당에 나온 책 중에 중고도 있겠지만 많지는 않았다. 내가 본 것은 다 새것이었다. 그 책을 합법적으로 내놓고 팔지 못하기 때문에, 학습장 매장에 가서 “참고서 없어요?”하고 물어봐야 했다. 참고서는 한 권에 만원 아래였던 것 같다. 책뿐만 아니라 필기도구, 학습장(노트)도 비싼 편이다.

■ 김책공대 박사원생 기숙사로 찾아가 수학, 물리, 영어 등 배워

대체로 대학교수들은 과외를 잘 안 하고 대학생이나 지방에서 올라온 박사원생들이 주로 했다. 내가 과외받던 선생도 그런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김책공대 기숙사로 매일 과외를 받으러 다녔다. 박사원들에게 과외받는 것이 어쨌든 비법이기 때문에 김책공대 건물 안으로 마음대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숙사로 찾아가야 했는데, 내가 수업받던 곳은 여자 박사원생들만 이용하는 기숙사로 5층에 따로 몰아 있었다. 10명 정도가 같이 생활하는데 깨끗한 편이었다.

북한에서 박사원들은 논문을 쓰면 할 일이 없다. 나를 가르쳤던 선생은 남포 사람으로 논문을 내고 배치만 기다리고 있어서 남는 시간에 과외를 한 것이다. 24세 여자 선생님으로 그녀에게 수학, 물리, 영어, 화학을 과외받았다.

나를 가르친 선생은 석사과정이었지만 북한에서는 다 박사과정이라고 말한다. 거의 8달 동안 매일 가서 배웠는데, 나는 시간이 무한대였기 때문에 오라고 할 때 갔고, 한번 가면 보통 2시간씩 수업을 받았다. 토요일, 일요일도 매일 공부하러 간다고, 했지만 선생이 일이 있거나 명절에는 가지 않았다. 과외비로 20달러를 줬는데, 그녀는 나 말고도 3명 정도 과외를 했기 때문에 부수입이 좋은 편이었다.

박사과정은 3년이다. 박사과정을 하는 이유는 평양에 거주하기 위해서다. 학사 학위를 받아서 평양에 있는 연구소에 배치를 받으면 평양에 거주할 수 있기 때문에 박사과정을 하는 것이다. 내가 과외를 받던 당시 박사원생 여자 10명 모두 지방 사람이었다. 평양 출신 중에도 박사원(대학원)에 다니는 사람이 있기야 하겠지만 20~30명 중 1명꼴이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공부 아니면 안 되는 수재들이지,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박사원을 다닐 이유가 없다.

■ 배식용 500원짜리 빵 팔아 용돈 쓰는 박사원생도 있어

박사원생들은 기숙사에서 스스로 식사를 해결한다. 기숙사는 전기가 잘 들어오는 편은 아니었지만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 켜놓거나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수돗물은 공동위생실에서 받아서 사용했다.

그렇지만 박사원 학생들의 생활상은 악조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방이 작다. 5평 남짓한 곳에서 두 명이 함께 밥도 해먹고 공부도 하고 잠도 자야 한다. 방이란 것이 아무것도 없고 방만 있는 식이다. 방이 작아 침대도 하나 놔두고 사용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물 한 번 쓰려고 하면 위생실에서 길어다 사용해야 하고 버릴 때도 가져다 버려야 한다.

김책공대 대학생들 사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잘 사는 집 아이들은 나처럼 하숙하거나 아니면 동거 식으로 집만 빌리고 나머지는 자기가 해서 먹는다고 한다. 잘사는 집 아이들은 기숙사 생활을 버틸 수가 없다. 돈이 없는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사는데 김책공대와 종합대학은 매일 빵을 준다. 그 빵이 500원인가 하는데, 적은 돈임에도 그것을 먹지 않고 팔아서 용돈 쓰는 학생도 있었다.

2005년에 100달러면 20~30만원 정도였다. 20달러면 5~6만원 정도인데, 박사원생들은 대체로 10만원 이하로 사용한다고 보면 된다. 박사원생들이 기본적으로 생활하려면 30달러만 있으면 되겠지만, 옷도 사 입으려면 50달러는 있어야 한다. 대학생활도 잘 사는 아이들은 괜찮지만, 지방에서 공부 잘해서 오거나 돈이 없는 아이들, 농장에서 운 좋게 폰트(자금)를 받아서 온 학생들은 힘들 수밖에 없다.

나를 가르친 과외 선생은 엄한 편이어서 별다른 대화는 없었는데, 어떤 선생들은 아이들이 공부 안 해 와도 상관 안 하는 사람도 있고, 학생들이 성적이 떨어지거나 하면 속상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평양에서 8개월간 과외공부를 하다가 2006년 6월 다시 청진으로 내려왔다. 왜냐면 대학시험을 치려면 추천을 받아야 하는데, 추천을 받으려면 다시 학교에 들어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일반중학교에서 대학시험 추천을 받으려면 715최우등상을 받아야 한다.

715최우등상은 김정일이 7월 15일 졸업했는데, 그때 최우등으로 졸업했다고 해서 만들어진 상이다. 715최우등상 시험은 11월에 실시하는데, 이 상을 받아야만 대학 추천을 해주었다. 715우등상을 받자면 미리 들어가 명단도 넣어야 하므로 9월에 입학할 예정으로 청진으로 내려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동창생들보다 나이가 한 살 많았다. 친구들은 91년생이지만 나는 90년생이다. 운이 나빴던 것이, 당시 나이가 많은 아이들은 대학시험을 칠 수 없다는 규정이 생겼다. 때문에 공부할 이유가 사라져 버렸고 중학교에도 가지 않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 청진에는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손풍금 치는 사람에게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손풍금과 피아노는 주법이 다르다. 2004년 중학교 2학년 때인가, 평양사람이 와서 말하는 것이 내가 치는 피아노 주법이 틀렸다고 하더라.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 피아노를 배우러 평양에 간 일이 있었다. 그때는 학생한테 배웠는데 주법 고친다면서 8개월 동안 음계훈련만 했다.

2006년 8월에 대학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청진에 왔는데, 시험을 못 친다고 하니까 좀 쉬자 하고 있던 와중에 다시 피아노를 쳐봤다. 그런데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마침 엄마 친구가 청진에 음악대학을 졸업한 할아버지가 있다고 해서 그 할아버지한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분은 작곡학부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피아노가 서툴고 몇 달 동안 배우니까 기술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나 혼자 평양에서 하숙하며 공부한 경험도 있고 또 역시 모든 것은 평양에서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에 2008년 2월, 다시 평양으로 올라왔다.

2007년 평양으로 올라올 때는 숭암으로 전학 가는 것처럼 전학증을 떼었다. 그리고는 전학증을 부치지 않으니까 청진에서는 나를 보지 못하고 숭암에서는 나를 받지 못하니까 내 거처에 대해 관여할 그 무엇이 없었다. 그래서 그 사이에 평양에서 피아노를 배운 것이다.

평양에 올라와 처음에는 엄마 친구 누나네 집에 있었다.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김원균명칭음악대학 교수한테서 피아노 수업을 두 달 동안(2008년 4월까지) 받았다. 당시에도 30달러씩 내고 하숙을 했다. 김원균명칭음악대학은 2005년에 생긴 것으로, 원래는 ‘김정일음악대학’이라고 간판까지 붙였는데, 김정일이 싫어해서 그랬는지 김원균명칭음악대학으로 바뀌었다.

평양음악무용대학이 있었는데, 이것이 음악대학과 무용대학으로 분리되면서 음악대학은 김원균명칭음악대학이라고 이름 짓고 동대원구역 문수거리에 건물을 새로 지어 만들었다. 무용대학은 본래 음악대학이 있던 자리에서 이름만 평양무용학원으로 바뀌었다. ‘김원균’은 김일성 또는 김정일 찬가를 지은 사람으로 알고 있다.

나를 가르친 사람은 30대 후반 여자 교수로, 피아노를 배울 때는 음악대학에 들어가서 배웠다. 내가 청진에서 피아노 배울 때 과외를 해준 할아버지 선생의 친척이 김원균명칭음악대학 학장이었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가 편지를 써주었다. 이 편지를 가지고 가면 학장이 반가워할 것이고 선생을 소개해달라고 해서 배우라고 했다.

그래서 편지를 들고 찾아갔는데 학장이 나 같은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그 편지만 주고 결론 없이 나온 상태였다. 다음날 학장을 찾아갔는데 학장이 없었다. 그래서 학장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 했는데, 어떤 여자가 있길래 그 여자한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음악대학 음악당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이었다. 이야기가 잘 되어서 그녀를 통해 과외 선생도 소개받고 음악대학을 드나들 수가 있었다.

원래 김원균명칭음악대학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다. 그녀는 아침 일찍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나를 데리고 들어갔고 나올 때도 같이 나오곤 했다. 그런 것도 모두 보위대하고 짜고 하는 것이다. 당시 그녀에게 한번에 15달러 이상 줬는데, 처음부터 준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힘들다며 돈을 달라고 할 때마다 줬고 옷도 달라면 줬다.

그렇게 두 달 정도 과외를 받았는데 당시 내가 음악당에서 피아노를 치면 교수가 와서 봐주는 식이었다. 음악당에는 피아노 전공이 아닌 방에도 피아노가 있었다. 그 방에서 아침 7시부터 저녁 8시까지, 점심 도시락을 싸가며 두 달 동안 피아노를 쳤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소문이 났고 그 일로 나를 봐주던 교수가 문제가 될 뻔하여 과외를 그만두게 되었다.

나를 가르쳤던 교수는 잘 가르치는 편이었고 나 말고 다른 사람 과외 하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교수들이 대학에서는 가르치지 못하지만 퇴근해서 외부에서는 많이 가르친다. 음악대학 교수들도 2~3개씩 과외를 하므로 먹고사는 것은 괜찮다.

북한에서 피아노 과외를 한다고 하면 그 사람들은 좀 사는 집에 속한다. 만약에 피아노는 있는데 과외는 안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왜 그러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가 되었다. 북한에서 유통되는 피아노는 주로 러시아제와 일본제다. 러시아제는 700~1,200달러, 일본제는 1,800~8,000달러까지 했고 중국산이나 한국산은 없었다. 김원균명칭음악대학에 있는 피아노는 일본 ‘야마하’ 피아노였다.

■ 북한 고위층 피아노 과외 선호, 과외비 30∼50달러선

김원균명칭음악대학 교수들은 과외를 많이 한다기보다, 적게 하면서 돈 많이 버는 과외를 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일단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김원균명칭음악대학으로 갈라지면서 수재 양성 기관으로 급이 높아졌고 특히 피아노는 북한에서는 알아주는 악기다.

예술학원이나 음악당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김정일 현지지도를 동행한 사람들의 손자나 손녀, 무역회사 사장 딸 등 최고위층만 다닌다. 내가 만난 아이들 중 굉장히 높은 간부집 손녀가 있었는데, 예술학원에 다니면서 자기 과목 선생한테 따로 과외도 받았다. 대체로 과외비가 30~50달러로 정해져 있는데, 이들은 선생한테 고맙다며 더 대우해서 쳐주기도 하고 혹은 집을 전부 꾸며준다거나 하므로 교수들도 고위층 과외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김원균명칭음악대학 직원들이나 연주자들 생활 수준을 이야기하면 한심하다. 최고 대학이지만 기관에서 주는 것 하나 없다. 김원균명칭음악대학에 있는 사람 중에 60~70%는 힘들다고 봐야 한다. 잘 사는 사람들은 교사(과외)해서 잘 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음악당 연주자들 중에 소해금 연주자가 있다. 그런데 소해금 같은 것은 아무도 개인 교습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만약에 그 부모들이 간부라면 상관없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런 악기 연주자들은 힘들 수밖에 없다. 그 사람들은 밥을 싸오지 않고 300원짜리 국수가 있는데 그것을 먹는다. 먹어 보지는 못했지만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어떻게 맛이 없으면 저렇게까지 없을 수 있나?” “한 달만 먹으면 허약해진다”고들 한다.

악기도 고위층 자제들이 찾는 악기를 전공하면 과외를 많이 해서 잘 벌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힘들다. 만약에 피아노를 전공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돈이 많은 것이다. 과외로 버는 것이 아니더라도 돈이 있는 사람만이 피아노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했고 또 시집도 잘 간다. 또 이런 사람들은 버는 것이 많으니까 옷도 잘 입고 다니고 비싼 물건만 산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돈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뒤처지는 것이 싫으니까 버는 족족 옷 사 입는 데 사용한다. 그래서 남는 것도 없고 먹지도 못한다.

대체로 예체능 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무역부문 사장 또는 간부집 자제들이다. 평범하게 사는 집 자녀들도 있지만 그런 아이들은 피아노를 전공하기 어렵다. 해금이나 손풍금 정도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돈은 없지만, 실력은 뛰어난 사람들이다. 김원균명칭음악대학에 오는 사람들을 보면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거나 돈이 많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 실력이 있으면 과외를 하겠지만 돈 있는 아이들은 그런 것을 할 필요가 없다.

2007년 4월까지 김원균명칭음악대학에서 피아노를 배우다 소문이 나서 그만두고, 그 해 5월부터 12월까지 평양예술학원 피아노 선생 집에 있었다. 그곳에서 지내다가 2009년 3월에(북한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치르기 위해 청진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4월에 평양으로 올라왔다.

평양예술학원 선생 집에 한 달 정도 있었는데, 그녀가 임시 중이어서 많이 예민해 있었다. 그래서 더 머무를 수가 없어 평양의 사촌 언니네 집에다가 800달러짜리 러시아제 피아노를 사다 놓고 평양교향악단 피아노 연주자에게 1주일에 2~3회씩, 2009년 2월까지 과외 수업을 받았다. 평양교향악단 단원은 사촌 언니가 소개해주었는데, 평양교향악단이라고 하면 북한에서는 최고로 쳐준다.

원래 지방 사람이 오면 숙박등록을 해야 하고, 또 피아노를 치면 옆집에서 항의할 수도 있는데 그런 것은 사촌언니가 인민반장과 잘 상의해서 처리했다. 돈을 얼마나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평양교향악단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창광유치원, 예술학원, 음악대학 피아노 전공을 거쳐서 국립교향악단 연주자가 된 사람들이다. 내가 음악대학에 가려고 한다면 반드시 예술학원 졸업장이 있어야만 시험을 칠 수가 있다.

나를 가르쳤던 선생은 31세 여성으로 그때 당시 7~8년 경력을 가지고 각종 행사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에게는 과외비로 30달러를 지급했다. 평양교향악단 피아노 연주자들은 대부분 과외를 한다. 바이올린도 과외를 하지만 피아노만큼은 아니다. 악기 중에 과외를 제일 많이 하는 것은 피아노, 손풍금(아코디언), 바이올린 정도다. 다른 악기들은 과외를 하지 않는다.

북한에서 악기 과외를 받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대체로 공부하면서 악기를 더 한다든가 하는 사람들이다. 어느 정도 경제력이 되고 악기가 집에 있으면 80%는 과외를 받는다. 그런데 인기 있는 악기가 아닌 다른 악기들은 전문성을 띄거나 학교에서 음악소조를 하면서 배우기 때문에 과외를 할 필요가 없다. 학교에서도 전과(전공)가 있고 부과(부전공)가 있는데, 만약에 성악을 한다면 전과가 성악이고 부과로 피아노를 하는 식이다. 부과로는 피아노나 손풍금 정도는 해야 한다.

처음 피아노를 배우려고 한 것은 그저 시간이 있어서였는데, 하다 보니까 흥미가 생겼고 그래서 대학도 안 가고 배웠다. 그런데 중국을 오가는 친척이나 사람들을 통해서 중국에서 피아노 배우는 데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청진에서 한 달 동안 피아노를 배웠을 때 과외비가 인민폐 100원(15달러)이었는데, 중국에서는 한 시간에 인민폐 200원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이, 북한에서 공부도 할 수 없고 자유도 누리지 못하고 살 바에는 차라리 중국에 가서 잘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피아노만 잘해도 중국에서 피아노 가르치며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에 한국 라디오를 듣게 되었고 탈북자들이 한국에 정착해서 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국에 가면 자유를 누릴 수 있고 하고 싶었던 경영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 좋은 대학 가려면 1만 달러 필요, 그것도 운 따라야

평양 시내에서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사람들은 100% 과외를 받는다. 평양에서 과외를 받지 않고 대학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지역 대학도 50%는 과외를 받아야 갈 수 있다. 1고등중학교에 다녀도 졸업하기 6개월 전부터는 모두 과외를 받는다. 과외비용은 20~50달러이고 대체로 저녁 시간에 과외가 이루어진다. 선생이 방문하거나 학생이 찾아가는 식이다.

평양 시내 일반중학교 한 학급 학생 수가 40~50명 정도 된다. 그들 중에 2명이 대학 갔다고 하면 잘 가는 것이다. 1고등중학교의 경우에는 40명 중 20명 정도가 대학을 가는데, 만약에 과외를 하지 않고 뇌물로 대학을 간다면 1만 달러 정도는 필요하다.

물론 대학입학 시험을 쳐야지 대학을 갈 수 있다. 그러나 점수가 낙제 수준이라면 학장이나 그 주변 사람들에게 접근하지 않으면 가기 어렵다. 만약에 나에게 돈이 있다면 대학 학장에게 다가갈 수 있는 주변인들을 찾을 것이다. 주변에 운전사나 다른 사람들에게 줄을 놔서 부탁하는 것이다. 학장이 모든 것을 관리할 수 없서 학장 밑에 관리하는 여러 사람에게 청탁하는 것이다.

제일 좋은 대학에 가려면 1만 달러는 필요할 것인데 좋은 대학이라도 학과마다 차이가 있다. 김책공대는 1만 달러 내고도 못 들어가는 학생도 있고 500달러만으로도 들어가는 학생이 있는 등 운에 달렸다. 과외를 받는 이유는 돈을 적게 들여서 대학에 가기 위함이다. 대학 합격 점수 안에 들기 위해서 대학 시험을 잘 아는 박사 선생이나 교수들한테 붙는 것이다.

평양에서 가장 일러주는 대학은 김책공대다. 예전에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최고로 쳤는데 최근 들어서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몇 년 전 김정일이 김책공대를 몇 번 방문한 일이 있었다. 김정일이 김책공대를 인재양성 기지라고 치켜세우니까 가고 싶은 대학 1위가 김책공대가 되어버렸다.

북한에서는 보도할 때 어느 사람이 나와서 “이 기계는 어쩌고저쩌고”하며 설명하는 것이 많다. 그런데 그 설명하는 사람에 대해 ‘김책공대 졸업’이라고 자막 처리를 해주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가 더 좋아질 수밖에 없다. 학생들에게 어디 가고 싶으냐고 물으면 김책공대라고 말한다. 만약에 외국어대학 졸업생과 김책공대 졸업생이 있다면 김책공대 졸업생을 더 쳐주는 분위기다. 만약에 외국어대학 졸업생과 김책공대 졸업생이 있다면 김책공대 졸업생을 더 쳐주는 분위기다.

김책공대나,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대학이 인기가 있고 상업대학은 내림세다. 상업대학을 졸업했다고 하면 지방에서는 좋은데 평양에서는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가기는 어려운 반면 졸업하고 나서는 그다지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이다. 학생들이 제일 좋아하는 학과는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 법학부와 김책공대 공업경영학부, 정보학과, 재료학부다.

2006년 12월에 평양에 올라갔을 때 그 이듬해 2월에 대학 시험이 있었다. 내가 하숙하던 집에 나보다 한 학년 위인 아이가 있었는데, 당시 김책공대를 시험 봐서 붙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커닝을 해서 합격했다. 시중에 나가면 커닝 자료를 따로 판다. 그런데 커닝 자료만 사면 누구나 시험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혁명시험 시간에 A방 시험감독이 누구인지 간부들은 알 수가 있다. 그러면 그 간부에게 뇌물을 주어 감독으로 들어가는 선생한테 “수험번호 00번 학생 좀 봐주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학생은 대놓고 보고 써도 선생들이 아무 제지를 하지 않는다. 2007년까지만 해도 커닝 하는 것이 굉장했다. 공부 못하던 아이가 시험 보면 1등 나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커닝 하면 무조건 시험장에서 내보낸다고 해서 커닝 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 그래도 부정하게 시험을 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할 것이다. 시험지를 바꾸거나 하지는 않지만, 점수를 바꿀 수도 있고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불가능한 것이 없다.

어찌어찌해서 대학에 입학하더라도 학생들은 공부할 시간이 없다. 기본으로 공부해야 할 것이 전공 외에도 영어, 컴퓨터 등이 있는데 노작 발췌(김일성 또는 김정일의 연설이나 발언을 학습하는 것) 점수가 높게 나와야지 대학에 있을 수 있으니까 그것 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한번 하려고 하면 새벽 5시까지 해도 다 못한다. 다른 사람 시켜서 하기도 하지만 글씨체가 비슷해야 하니까 대체로 자기가 직접 한다.

■ 평양시 빈부격차 심해, 중구역은 분위기부터 달라

평양은 빈부격차가 대단히 심하다. 평양 시내 여자들 옷차림을 보면 굉장히 잘 입는다. 내가 평양에서 지냈던 곳은 만경대구역이었는데 중구역에 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만경대구역에서는 10명 중 1명이 옷 잘 입는 사람이라면, 중구역에서는 10명 중 9명이 옷을 잘 입고 다녔다.

평양사람들은 못 먹고 못 써도 입는 것은 잘 입고 다니려는 경향이 강하다. 청진 사람들도 옷을 잘 입는다. 내가 한국에서 입고 다니던 옷보다 더 예쁜 것을 입고 다녔다. 그런 것 보면 잘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옷 입는 것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평양 시내 아파트라도 수돗물이 잘 나오는 편이 아니어서 아침이나 저녁에 40분 정도 시간물 나오는 것을 매일매일 받아서 사용했다. 전기는 하루에 5시간 정도 들어왔는데,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전지를 켜놓고 있을 때도 가끔 있었다. 아파트는 중앙난방 시설이 다 되어 있었지만 사용할 수가 없어 구멍탄(연탄)을 이용했다. 평양에서 남한 TV를 본 적은 없었지만, 남한 DVD나 대북라디오를 들었다.

■ 대북 라디오에서 나오는 탈북자 이야기에 신뢰감 갖게 돼

평양에 있을 때 대북라디오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 기간에 화폐교환을 했는데, 화폐교환 실정도 라디오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평일에는 남남북녀라는 소설도 했고 탈북자 수기도 나왔다. 토요일에는 소설이나 탈북자들의 남한 정착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보도가 끝나면 북한 정치에 대해서 알아보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가장 흥미가 있었던 것은 탈북자들이 직접 나와서 읽는 것이었다.

내가 청진에 있을 때 많은 중국인들이 청진을 오가곤 했다. 그때 중국 사람들이 하는 말이 한국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말을 들어와서 그런지 남한 라디오를 들으면서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100% 신뢰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라디오에서 나오는 이야기의 80%는 옳다고 생각했다.

물론 재미가 있으니까 많이 듣게 되었는데, 거짓말일 수 있다고 생각해도 몇 달 동안 듣다 보면 믿음이 생기게 된다.

라디오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탈북자들 말 중에 대학에서 공부도 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나는 원래 조직 생활을 싫어한다. 생활총화 할 때도 지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런 이야기에 많이 유혹을 느꼈다.

북한에서는 남한으로 갔다고 하면 반역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라디오를 통해서 말하는 탈북자들은 진짜 자유를 말했고, 그 자유를 당신들보다 앞서서 체험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 것인지 모를 것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강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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