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0일 목요일

올바른 역사 이해와 '국정' 국사교과서의 문제점



* 이글은 1988년 6월에 '국어교육을 위한 교사모임'에서 펴낸 『교과교육』 1호(도서출판 푸른나무)에 실은 글이다.


국사교과서의 '국정'과 문제점, 

검인정이던 국사교과서가 '국정'으로 바뀌어 중고등학교 국사교육 교과서로 쓰이기 시작한 해는 1974년이다. 국사교과서의 국정은 1972년 '10월 유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대통령 특별선언(10월 유신)을 발표하고, 곧 유신헌법안을 마련, 11월 21일 국민투표에 회부하여 유신헌법을 확정지었다. 그 헌법에 의해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구성하고, 박정희가 단독 입후보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의원 재적 2천 3백 59명 전원 참석에 찬성 2천 3백 57표, 무효 2표를 얻어 임기 6년의 '유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어 12월 27일 유신헌법을 공포함으로서 유신독재가 성립되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간접선거와 장기 임기(6년) 및 연임, 입법.사법부에 대한 막강한 권력행사(대통령이 국회의원 정원의 1/3 임명, 국회 해산권, 사법부에 대한 대통령의 인사권), 대통령의 국정 전반에 대한 긴급 조치권을 제도화했던 것이다.

유신정권은 10월유신을 '한국적 민주주의'로 분장시키고, '국적 있는 교육'을 통하여 정당성을 선전하려 하였다. '한국적'과 '국적'을 체계적으로 선전하기 위하여 택한 수단 중의 하나가 국사교과서의 '국정'이었다.

'국적 있는 교육'은 1968년의 국민교육헌장 제정.선포, 1970년부터 시행된 새마을 운동과 또한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민교육헌장과 새마을운동은, 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자 했던 식민지 교육정책과, 식민통치의 모순을 감추고 농민들의 민족해방운동을 무력화하고자 했던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을 연상시킨다. '헌장'과 '운동'은 1960년대 외국자본 주도 고도성장 경제정책의 모순을 은폐시키기 위한 집권층의 선전책이었다. 70년을 전후하여, '선성장 후분배'를 미끼로 고도성장의 그늘 아래서 저임금.저곡가를 강요당해온 기층민중들은 더 이상 '나라의 발전이 나의 발전의 근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이를 저지무마하고 장기집권의 토양을 마련하기 위한 포석이 국민교육헌장과 새마을운동이었으며 '국적 있는 교육'의 강조였다. 1968년 국민교육헌장, 1969년 삼선개헌, 1970년 새마을운동, 1972년초 '국적있는 교육' 강조, 1972년 '10월유신'이 단순히 우연한 사건의 연속이라고 할 수는 없다.

국민교육헌장은 미국식 기능주의와 복고적.국가주의적 민족주의를 하나의 틀 속에 짜넣고, 불평불만 없는 기능인으로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새역사를 창조하자"고 강조한다. 국민교육헌장에서 강조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확실하게 띠고 "새역사를 창조"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국적 있는 교육'이 본격적으로 제기되는 때는 1972년 봄부터이다.

1972년 3월 24일 대구 실내체육관에서는 건국 후 최대 규모의 <총력안보를 위한 전국 교육자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국무위원들과 전국 77개 대학의 총.학장, 전문학교장, 중고 교장, 국민학교 교장, 대학교수 및 교육관계자 8천여 명이 참석하였다. 문교부장관 주관 아래 총.학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박수치는 예행연습을 마친 자리에 박수를 받으며 등장한 박정희는 직접 '국적 있는 교육'을 '명령'하고 나섰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는 「올바른 국가관에 입각한 우리 교육을」이라는 치사를 통하여 '국적 없는 교육'에서 '국적 있는 교육'으로, '우리의 국가 현실에 알맞는 교육'을 위하여 '주체적인 민족사관'을 정립하고, '민족 주체사상'을 확립하여 '한민족 국가의 정통성이 우리 대한민국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여 '북괴의 남침 야욕을 억지'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문교부는 72년 5월 11일 국사교육강화를 위한 몇 가지 시책을 밝혔다. 그 내용은 대학입학 예비고사에 국사를 독립 과목으로 추가하여 30점을 배정하며, 현존 14개 국사 관계학회를 통합하여 한국학센터를 설치하고, 국사 연구비를 대폭 증액하며, 초중등 학교에서도 국사를 독립 교과로 하며, 국사교육 강화를 위하여 17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발족시킨다는 것이다. 이 발표 자리에서 문교부장관은 주체적이고 발전적인 사관을 확립시켜 '국적 찾는 교육'을 뒷받침하겠다고 말했다.

국사교육 강화책에 따라 문교부 자문기구로서 새로 설치된 국사교육 강화위원회는 7월 5일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독립된 교과로 국사과목을 신설하고, 대학에 교양 필수과목으로 국사교과를 설정한다는 등의 국사 교육과정 구조 개편안을 마련, 문교부에 건의하였다. 그 내용은 대학의 국사교과 이수학점을 3∼4학점으로 할 것과, 고등학교에서는 6단위 필수, 중학교에서는 2(2학기), 3(1학기) 학년에 각각 실시하고, 국민학교에서는 1, 2, 3학년에 사회과 연간 시간의 1/4 정도를 국사내용을 가르쳐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기르고, 4학년에서는 사회과 연간 시간수의 1/3정도를 가르치며, 6학년 1학기에 체계있는 국사교육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사교육위원회는 개편안을 건의하면서 국사과의 신설은 찬성하였으나 교재의 획일화, 특히 역사 교재의 국정화는 민족사적 교육의 강화보다는 엉뚱한 부작용을 초래하며, 역행적인 결과를 자초할 것이라고 반대하였으나 이 의견은 문교당국에 의하여 묵살되었다고 한다.

1973년 들어서도 박정희는 문교부 연두 순시, 제 2 회 전국 교육자대회 등지에서 계속 '국적 있는 교육'을 강조하고 다녔다. 문교부는 1973년 6월 23일, 74학년도부터 초 중.고등학교의 국사교육 강화를 위해 교과서를 현재의 검인정으로부터 국정으로 바꾼다고 발표하고, 집필자를 선정하여 국정 국사교과서 집필을 의뢰하였다. 다음해 1974년 2월 22일 문교부는 투철한 주체적 민족사관 확립을 위주로 한 중.고등학교 국정교과서를 발간, 신학기부터 쓴다고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1974년 1학기부터 중고등학교에서는 국정 국사교과서를 가지고 국사교육을 하게 되었다. 그 뒤 1979년, 1982년에 각각 한 차례씩 대폭 개편이 있었으나 '국정'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국사교육을 강화하고, 그 수단으로서 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한 정권의 직접적인 의도는 어디에 있었을까? 이는 당시 정부 측의 교육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장학방침에 잘 드러나고 있다. 문교부는 73학년도 장학의 기본 목표를 "국민교육헌장 이념의 생활화로 교육체제를 쇄신하고 '국적 있는 교육'을 강화함으로써 유신과업 수행에 앞장서는 '참다운 새 한국인상'을 육성하는 데 두었다. 그리고 그 일반방침의 첫 번째로 '민족 주체성의 함양'을 들고, 국사 및 국어교육은 마땅히 강조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74년 장학 목표 역시 "국적 있는 교육과 생산적인 교육을 추진하여 유신과업 수행에 앞장서는 성실하고 능력있는 한국인을 육성한다"는 데 두고 있으며 첫 번째 장학방침이 73년의 '민족 주체성 함양' 대신 '국적 있는 교육의 신장'으로 좀더 구체화되고 있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국사교육의 강화와 국정화의 목적은 다름아닌 유신정권 유지에 적합한 인물을 양성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국정교과서는 1974년부터 긴급조치와 발맞추어 나가면서 수백만 학생들의 한국사교육을 독점적으로 담당하는 수단이 되었다.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와 1975년 5월의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을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옹호하여 유신독재를 유지시키기 위한 폭력적 장치였다. 이에 비해 국정교과서는 10월유신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고 유신과업 수행에 적합한 인물을 만들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1974년 국정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10월유신에 대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1972년 10월,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처하고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달성하고자 헌법을 개정하고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다. 우리는 이제 한국적 민주주의를 정립하고, 사회의 비능률과 비생산적 요소를 불시하여야 할 단계에 와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유신헌법이 유신독재의 기둥이자 상징물로서 긴급조치의 보호를 받았다면 같은 선상에서 국정 국사교과서도 역시 긴급조치의 보호를 받으면서 유지되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즈음에 강조되었던 이순신의 충무공정신과 신라의 화랑정신, 화랑교육원의 설립, 1973년 경북대학교의 퇴계연구소의 창설 등도 국적 있는 교육, 국사교육의 강화 의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음은 1979년에 개편.발행된 국정 국사교과서의 개편 배경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유신체제의 모순이 심화되면서 많은 문제가 표출되자, 유신정권은 모순을 숨기고 유신체제를 더욱 강화하고자 하는 시도의 하나로 교육정책을 바꿔나갔다.

1974년부터 1976년까지는 장학방침의 첫 번째가 '국적 있는 교육의 신장'이었는데, 1977년부터는 '국민 정신교육의 강화'로 바뀐다. 이는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시키기 위한 의도라고 하겠다. 이와 더불어 1977년부터 충효상.충효교육이 집중적으로 강조된다. 1977년 2월 4일 박정희가 문교부 연두순시에서 충효를 강조한 이후 거리마다, 건물의 정문마다, 집집의 벽마다 충효의 물결이 넘쳐흐르게 된다. 충효는 유교적인 상하관계의 인간질서인 윗사람에 대한 아랫사람의 복종.순종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중세사회 이후 충효가 강조되었던 때가 1970년대 후반과 함께, 식민지 폭압통치 아래서 민족해방운동이 가열차게 전개되었던 1930년대였음을 상기한다면 그 의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충효사상.충효교육이 1977년이란 시점에서 다시 강조된 까닭은 왕에 대체되는 유신체제에 국민들을 순종시켜 유신독재를 계속 유지.강화해나가기 위해서, 그것을 방편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는 이 해에 국민정신교육 강화를 위하여 20억 원의 에산을 들여 '국민정신 교육연구원'의 준비에 착수하여 다음해 1978년 6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창설하였다.

이보다 한 해 앞서 1976년 문교부는 문교행정의 주요사업으로 '국민 정신교육의 쇄신'을 설정하고, 그를 위하여 국사교과서를 분석하기 시작하였다. 분석결과 323면이었던 1974년 국정교과서를 71면 늘려 302면으로 대폭 개편하여 1979년 발간하였다. 이 개편에 국민 정신교육의 강화라는 의도가 어느 정도 반영되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1974년 교과서와 1979년 교과서를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새마을운동과 10월유신 서술에서 어떻게 달라졌는가만을 보자. 1979년 교과서에서는 새마을운동의 목적을, 1974년에는 없던 '국민의식 혁명을 이룩하려 한 것'이라 하고, 10월유신에 대해서도 "전근대적 생활의식과 사대사상을 제거하여 한국 민주주의 정립을 추진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의식, 사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국민 정신교육의 강화'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1981년 말 새교육 과정이 공포되면서 교과서는 또 한차례 개편되어, 1982년부터 중고교의 국사교육은 개편된 국정 국사교과서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이 개편 교과서 역시 유신 이후 바뀐 제 5 공화국의 성립을 정당화하면서 국정틀을 고수하고 있다. 현행 국정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본문의 마지막을 "더우기 제 5 공화국은 정의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모든 비능률, 모순, 비리를 척결하는 동시에 국민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민주 복지 국가 건설을 지향하고 있는만큼 우리나라의 장래는 밝게 빛날 것이다"라고 하면서 끝을 맺고 있다. 이것으로서도 정권이 왜 국사교과서를 '국정'을 계속 유지하려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국정 교과서는 현재 또다시 개편작업중에 있다. 85년 11월 28일 민정당과 정부의 당정 정책조정회의에서는 "날로 격화되어가는 학원사태가 일반적으로 8.15 이후의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도 원인이 있다"고 보고, 현대사를 시대별.정권별로 재정립해야 하며 역사의식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논의하고, 문교부 및 산하단체에서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1987년 2월 문교부는 업무보고에서 국민정신교육사항으로 고등학교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좌경 급진사상 비판을 강화하기 위해 국사교과서를 재정리.개편한다고 하였다. 3월 26일 국사 교육심의회는 국사교과서 개편방향(시안)을 마련하여 발표했다. 이에 대한 의견수렴 과정을 거쳐 6월 5일 국사교육심의회는 개편 준거안을 최종 확정 발표하였다.

준거안 내용에 대한 문제점은 미뤄두고라도 74년부터 계속된 '국정'의 틀은 역시 변함없이 고수되고 있다. 1974년 국정 때와 그 뒤 두차례의 개편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앞으로 나올 국정 국사교과서의 본문 끝부분도 역시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 제 6 공화국의 찬란한 출발을 선전하는 문구로 채워질 것인가.

이상에서 국사교과서가 국정으로 바뀌는 배경과 의도, 개편과정을 살펴보았다. 국사교과서의 '국정'이 가지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국사교과서의 '국정'이란 정부가 교과서를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단 하나의 교재로 한국사 교육을 실시 강화하여 과거를 통제하고 정권을 정당화기 위한 지배이데올로기 선전장치이다. 국정이란 이름 아래 하나님이 오로지 통용될 때 획일성과 경직성, 내용의 조작이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획일성과 경직성은 자체의 불완전함을 '완전'이라 고집하게 되며, 완전의 고집은 정체에 빠지게 되고, 정체는 변화.발전과 그 가능성을 부정하게 된다. 이는 올바른 교육을 받고, 올바르게 가르칠 학생과 교사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이러한 문제는 국사뿐만 아니라 현재 국정인 국민학교 전 교과서와 중고등학교 도덕, 국어, 사회 등도 마찬가지이므로 공동 해결방안이 모색될 필요가 있다).

학생들은 가장 감수성이 풍부한 시기에 지배질서 유지를 위한 획일적이고 경직된 보수적.현실고착적 역사인식을 강요받는다. 1977년 2월 28일 부분 개정된 인문계 고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에서도 고등학생은 '가치관이 확립되어 가는 중요한 시기' '개성이 뚜렷해지는 시기'로 규정하면서, 고등학생의 "지식과 기능교육은 기본 능력을 배양하고 기본 개념을 파악하며 판단력과 창의력을 함양하는 것이 되도록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단일한 교과서의 내용을 모두가 절대적 진실과 모범답으로 믿도록 교육하고, 입시에 의하여 다시 정답으로 답하도록 강요함으로서는 그러한 교육효과를 얻을 수 없다. 올바른 역사인식과 비판의식을 가지고 주체적.창의적으로 사고하고 주인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획일적으로 사고하고 피동적으로 행동하는 고분고분 말 잘듣는 순응형 우민을 길러내기 십상이다.

그동안 국정 국사교과서로 공부해온 중.고등학교 학생수는 1974년부터 1987년까지 연인원 1천 8백여만 명, 절대인원으로도 1천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국정 국사교과서를 통하여 형성된 역사인식도 물론 고정 불변적인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현실의 구체적인 삶과 실천, 또다른 역사학습 등을 통하여 새롭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사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이 구체적 현실, 또는 새로운 학습내용과 견주어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될 때 느끼는 '속았다'는 당혹스런 혼란감은 단순히 정신적 갈등에서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현실 생활에서 일방적인 선전매체의 선전과 일상적 활동에 묻혀버릴 경우, 오랫동안 중고교에서 배운 역사지식을 가장 올바른 것으로 믿고 있게 된다.

앞에서 본 대로 중고교 시기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가치관과 개성이 형성되어 가는 시기라 할 때, 단 하나의 국정 국사교과서를 가지고 우리 역사의 정체상과 주입된 역사관을 강요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교육의 목적과 배치된다.

교사 역시 국정 국사교과서에 의해 획일성과 경직성을 강요받는다. 국정이 지니고 있는 권위주의적 요소와 정답을 잘 맞출 수 있는 주입식 교육의 반복.매몰은 교사 스스로의 인식폭을 축소시키고 현장 교육의 주체인 역사교사들의 현실인식, 풍부한 경험, 연구와 연구 성과의 흡수 등을 통한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교육은 제한받을 수 밖에 없다. 단일한 국정 국사교과서에 의해 국사교육이 계속되고 그것이 입시에 의해 재평가되는 한, 교사들은 주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학생들에게 국정 국사교과서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까지 전달해야 하는 대행자 노릇을 하게 된다.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없을 때 교사 자신도 국정 국사교과서의 대상이며 대행자라는 이중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연구자들 역시 국정의 피해자라 할 수 있다. 자신들의 다양한 연구성과를 가장 많은 '조직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는 통로가 막혀 버렸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의 연구의도와는 달리 연구성과가 왜곡.이용당하기도 한다. 정권의 의도에 영합하는 연구자들도 없지는 않았으나, 60.70년대 학계의 중요한 성과인 식민사관 비판, 내재적 발전론 등이 '민족적 민주주의' '한국적 민주주의' '민족 주체사관' 확립.정립을 정당화시키는 논리로 이용당한 점이 그것이다. 국정 국사교과서의 집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교과서 전체 속의 과거 어느 한 부분을 집필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10월유신'이나 '제 5 공화국의 성립'과 무관할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국정'이란 틀 속에 용해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편찬자인 정부당국의 의도에 거슬릴 경우 집필자와 상의도 없이 나쁘게 고쳐지는 경우도 있다.

국정 국사교과서는 학생과 교사와 연구자들에게만 관려되는 문제가 아니다. 국정의 영향이 학내 내로만 한정된다면, 국정을 통하여 지배집단의 지배질서와 기득권 유지를 위한 현실고착적 역사인식의 전파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은 마냥 학생이 아니다. 몇백만 명의 학생은 이미 사회인이 되었으며, 학생에게 강요하는 현실과 과거에 대한 통제는 학부모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전 사회적, 전 국민적으로 확산된다.

지금까지 국사교과서를 정부가 독점적으로 장악하여, 획일적이고 경직된 한국사 교육을 수행함으로써 생겨나는 문제점을 보았다. 그러한 국정이라는 형식틀에 담아 전달하고자 하는 우리 역사의 내용은 어떠한가.

문제 해결을 위하여 

지금까지 고등학교 국정 교과서의 '국정'이라는 형식(틀)과 내용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형식과 내용 가운데 내용이 형식의 문제를 압도하였다면 국정은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현실은 형식을 장악한 쪽이 훨씬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그 점에는 크게 변함이 없다. 혹시 내용이 형식에 배치될 때는 개편이나 수정이라는 형태로 형식에 맞도록 조정을 해왔다. 그러한 조정을 통하여 국정이라는 틀과 그 내용은 통일되어왔다. 형식과 내용이 통일되었다는 것은 국정 주체의 의도대로 국정 국사교과서에 의한 국사교육이 가능해왔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이러한 국정 국사교과서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첫째, 국정을 폐지하여야 한다. 국사교과서의 '국정'은 앞에서 본 대로 '10월유신'의 산물로서 유신독재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1979년 10.26 이후, 12월 12일 문교부는 초.중.고 교과서에서 유신내용을 빼기로 하였고, 제 5 공화국 등장과 더불어 개정된 현행 국정 국사교과서에서도 10월유신에 대해, "한편, 정부는 급변하는 정세에 대처한다는 명분 아래 헌법을 개정하고, 10월유신을 단행하였다"고 간략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70년대 후반 상황에서라면 유신헌법을 왜곡.비방한다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영장 없이 체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0월유신의 표현이 이렇게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10월유신의 산물인 국정은 여전히 국정인 채로 유지되고 있다. 이제 국사교과서의 '국정'도 여전히 국정인 채로 유지되고 있다. 이제 국사교과서의 '국정'도 '민주화의 일환'으로서 학문과 사상의 다양성을 살릴 수 있도록 검인정으로, 나아가 자유발행제로 바뀌어야 하겠다. 그러나 교과서를 자유롭게 발행할 수 있더라도 기업의 영리 추구대상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양한 교과서 서술에는 학회나 학술연구회, 학파와 현장의 교사가 자유롭게 참가하여 충분한 토론과 사전 검토가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그 서술양식도 사건 나열의 외우기식 교재가 아니라, 양이 좀 많더라도 읽어가면서 깨우쳐 다양하게 사고하고,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비판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써야 할 것이다.

둘째, 대상 수준, 표현 양식 등을 달리하는 다양한 대중용 교과서를 편찬하는 일이다. 대중은 읽을 만한 역사책을 원하고 있으나, 만족할 만한 역사책을 제공하고 있지 못하다. 지배층의 자기 정당화를 위한 역사가 아니라, 역사 변화.발전의 주체인 민중이 주인이 되는 역사를 서술하여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셋째로, 역사 연구자, 교사가 '국정 국사교과서' 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이의 해결을 위하여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그동안 연인원 1천 8백여만, 절대인원 1천만이 넘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국정 국사교과서로 공부를 해왔다. 지금도 4백 80여만 국민학교 학생들이 5.6학년 때 사회과목의 한 부분으로 국사를 배우고, 2백 70여만 중학생들이, 2백 20여만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한 학기.한 주일에 한 시간씩 6학기 동안 국정 국사교과서로 국사교육을 받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한번도 한국사 연구자들이나 국사교사들이 이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다. 이 문제에 대하여 조직적.집단적 관심과 대응책을 모색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연구자들은 깊은 연구실과 골방 자료더미에 묻혀 실증의 고고한 작업을 수행하다가 가끔은 일어서서 창문뒤에 숨어 바깥 세계를 소심하게 바라보는, 노신의 표현대로 한다면 단순한 소일거리에 멍하게 아침에 내린 서리 위에서 파리 발자국을 쫓는, 그런 작업을 벗어버리고 올바른 입장에서 연구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러나 실증.실증을 벗어난 드높은 연구.연구의 목탁소리가 깊은 계곡을 벗어나 과학성과 실천성을 확보하기 위하여서는 최소한 연구성과를 어떻게 보급.전달.교육.선전할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올바른 연구나마 제대로 해왔는가", "연구는 어차피 혼자 하는 것 아닌가"라는 소극적.개인적 자세에서 벗어나야 하겠다. 그러한 자세는 자칫 "마련된 공간 속에서 최소한 지배집단에 봉사하지 않는다는 학문자세"를 배태하기 쉽다. 10여 년 전에도 연구수준과 역량을 문제삼던 학자가 10년 후에도 똑같이 연구수준과 역량을 문제삼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다. 강물과 돌에 비유한다면, 강물 가운데 박힌 바윗돌은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강물의 흐름에 저항하여 흐름을 저지시키는 이치와 같다. 흐름의 속도가 느릴 때는 얼핏 눈에 잘 안뜨이지만, 속도가 빠를 때는 바윗돌이 물의 흐름을 거슬려 물방울을 튕겨내고 회오리치는 파문을 일으키게 한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지 않았다, 않는다고 강변할 수 있으나 학자, 연구자라는 위치상 자신이 연구자라는 이름으로 전체의 문제를 회피한다고 할 때, 그는 사회와 현실에 대하여 침묵으로써 지배질서 유지에 복무하게 되는 것이다. 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실 문을 닫아걸고 연구만 하고 있을 때, 수많은 대중들은 끊임없이 체제의 다양한 선전수단에 의해 이끌려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과거의 대상으로 한 연구를 현실과 연결시켜 바람직한 미래를 창조할 수 있게 하는 고리가 교육이라 할 수 있다. 역사 연구자가 연구성과를 전달.보급.교육.선전하는 일은 역사의 결과인 현실의 갈피갈피에 안테나를 치는 일이며, '해방'의 미래를 심는 일이다. 안테나에 걸리는 현실과 역사 변화.발전의 주체들의 요구를 수렴하여 다시 조직적.집단적 작업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조직적.집단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작업이 개인적 수준에서 이루어질 경우에는 언제나 자신의 명예라는 1차적 성과에 얽매이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자는 직.간접적인 방법을 통하여 역사 변화.발전의 주체인 민중과 만날 수 있다. 직접적 방법은 올바른 역사를 요구하는 민중에게 직접 다가가 스스로가 역사 변화.발전의 주인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이러한 만남을 통하여 연구자는 다시 가르치면서 스스로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연구자는 "대중들로부터 배우기 때문에 그들에게 무엇인가 줄 수 있는 것이다." 간접적인 방법은 민중에게 배운 바 민중적 정성에 입각해 민중의 언어로 민중의 역사를 서술하는 일이다. 그러한 만남 가운데 시급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이 학교교육 내의 역사교육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문제 해결을 위하여 노력하는 일이라 하겠다.

이 문제에 대한 보다 더 적극적인 해결 주체는 교육현장의 교사여야 할 것이다. 교사가 민족과 민중의 입장에서 민중의 자제와 역사 발전의 주체를 교육하는 참교사로서 꿋꿋이 서야 한다고 할 때, 자신이 가르치는 국사교육의 의도와 내용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면, 이는 스스로의 뜻과 다른 것이며, 그대로 가르친다면 잘못된 역사인식 확산의 담당자가 되는 것이다.

올봄(88년 3월 초) 어느 대학에서 교양 한국사 강의를 듣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하여 우리 역사의 이해 정도를 조사해보았다. 설문에 답한 학생수는 2백 31명이었다. 설문 가운데 고등학교 국사교사의 수업방식을 알아보기 위한 문항이 있었는데, 그 결과는 '고등학교 국사선생님은

① 시험을 위하여 교과서만 열심히 가르쳤다(134명, 58%),
② 교과서 외의 다른 역사 사실도 설명하였다(57명, 24.7%),
③ 교과서의 잘못을 지적하고 올바른 내용을 가르치려고 노력했다(16명, 7%),
④ 역사와 관련하여 오늘날의 현실 문제도 지적해주었다(24명, 10.4%)였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설문이었기 때문에 ③에 대답한 삭생 16명의 교사가 1명일 수도 있고, 16명일 수도 있어, 이러한 양상이 고등학교 교사의 일반적 수업방식이라 할 수는 없다. 어쩌면 시험을 위하여 교과서만 열심히 가르치고, 교과서만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대학에 돌 수 있게 되었을 테지만, 교과서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옳은 역사를 가르치고, 그것을 매개로 현실을 옳게 인식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교사가 많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교육현실은 교육이론을 앞질러 나가고 있다. 결국 교육이론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교사들의 실천적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최신 이론도 현장에서 교육을 온몸으로 부둥켜안고 혼신의 힘을 다해 가르치고 공부하며 싸우는 교사들의 운동성에 미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글도 현장의 교사들이 교육을 통하여 부딪치는 현장감있는 문제의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연구자들과 만나 충분히 검토한 뒤 쓰였어야 바람직한데, 간접경험만을 바탕으로 쓴 것이어서 잘못 파악된 점도 많을 것이다. 서로의 비판을 통하여 문제 해결에 동참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러기 위하여 교사와 연구자가 조직적으로 만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과목별로 교육의 내용 문제까지 고민하고 해결해나가기 위한 '국어교육 협의회'의 출범은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가운데 한 부분은 역사 쪽에도 그러한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제기하려는 데 있기도 하다.

자신이 와닿는 문제 해결을 위해 주체적 실천은 학문.사상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며, 그를 통하여 시대 과제를 해결하여 해방된 미래를 앞당기는 데 동참하는 일이다. 역사 변화 발전에 동참하는 일, 그것은 스스로 주인되는 역사적인 삶을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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