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20일 일요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이야기

유럽사에서 상당히 독특하게 발전해온 국가로 프로이센이 있습니다. 중세에 독일 기사단의 정복 활동으로 발생하였고, 신성로마제국의 일원으로 존속하다가 17세기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이 되었지요. 그리고 1701년에 왕국이 되었습니다.

사실 프로이센의 지리적 입지는 국가로서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우선 영토는 대부분 황무지나 늪지로 매우 척박하였고 자원도 부족하였습니다. 그리고 1700년 당시 인구는 300만으로 폴란드의 절반에 불과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인구는 2천만이었지요. 영토도 곳곳에 흩어져 있는데다가, 동쪽 국경으로는 사실상 폴란드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트인 평원이라 자연방어선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약소국의 조건을 두루 갖춘 나라였지만, 프로이센은 18세기에 유럽의 강대국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프로이센의 부상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왕이 바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입니다. 유명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버지입니다.

17세기 30년전쟁의 폭풍을 가장 심하게 맞은 곳이 아시다시피 독일지역이지요. 프로이센 역시 땅이 황폐화되고 인구가 격감하였습니다. 베를린 같은 경우는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고 하니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알 수 있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프로이센인들은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강력한 군대"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프로이센이라는 국가가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기에는 악조건이 많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이때부터 프로이센은 국가경제의 대부분이 군대육성에 집중됩니다. 이러한 작업은 30년 전쟁 직후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즉위했을 때, 이 작업은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우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병력을 두배로 늘렸습니다. 이제까지 4만에 불과하던 군대를 8만명으로 증강했던 것이지요. 물론 인구도 부족하고 돈도 부족했던 프로이센에게 이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병력 수를 채우기 위해서, 프리드리히의 모병관들이 전 유럽을 돌아다니게 됩니다. 그리고 갖가지 방법으로 입대를 장려했습니다. 물론 필요하다면 강제력 동원까지 마다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입대한 병사들은 엄격하면서도 혹독한 규율을 통해서 효율적인 전쟁기계로 조련되었습니다.

문제는 돈이었지요. 이를 위해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극도의 근검절약을 시행합니다. 우선 국왕 자신부터 왕실 경비를 기존의 4분의 3을 줄였습니다. 그리고 사회분위기 전체를 이렇게 바꾸어 놓습니다. 선왕이던 프리드리히 1세는 각종 문화를 후원했는데,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그 모든 것을 싸그리 없애버렸습니다.(이러니 아마추어 플룻 연주자이기도 했던 아들과 안 맞았던 것도 당연하지요) 이때부터 프로이센은 '북방의 스파르타'로 불리게 됩니다.

"프로이센 군주국은 군대를 가진 국가가 아니라 국가를 가진 군대다. 이 나라는 병영을 차리고 있는 군대일 뿐이다."

하지만 군인왕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당시 유럽의 전쟁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구두쇠인 만큼, 애써 키운 군대가 상하는 것이 싫었고, 또 성격상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요.

그래도 프로이센 군대의 존재는 주변국들을 겁먹게 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따라서 전투 없이도 외교적 목적은 얼마든지 달성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1740년에 사망합니다. 27년에 걸친 구두쇠 짓의 결과로 아들 프리드리히 2세가 물려받은 것은 7백만 탈러의 자금과 유럽 제일의 정예병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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