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24일 화요일

목숨건 탈북 후 처음 만난 한국 외교관 여권 없으니 돌아가라고?

러시아에서 탈북해 한국까지 오기까지

이국 땅에 흘린 피

저녁 7시쯤 되었을까. 감방문 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간수가 나더러 나오라고 한다. 웬일일까. 저녁에는 찾을 수 없는데 ….

나가보니 웬 낯선 조선인 한 명과 러시아인 한 명, 그리고 감옥소 경찰 두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낯선 조선 사람이 조선말로 나에게 물었다.

『앉으시오. 북조선공민 김영권지요?』

말투를 보니 조선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 그래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하바로프스크 경찰서 상급 지도원 김와실리요, 내가 당신을 호송하려고 왔소.』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긴 축인데 말투는 건방지고 어딘가 모르게 틀을 차리는 것 같았다. 나는 어디서 그를 본 기억이 났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하바로프스크 체크도민 러시아 경찰서 수사과 책임지도원이었다. 그는 사할린에서 태어난 조선인 교포다.

들리는 말이 그의 부모들은 남조선 출신이라고 한다. 그는 체크도민 경찰서에서 근무하면서 북조선 안전부 사업을 잘 도와주고 있었고 그들에게서 선물도 받고 명절 때면 초청도 받는다는 말들이, 많이 돌아 벌목장 우리 노동자들은 은근히 그를 피하였다. 바로 그러한 사람이 나를 데리러 온 것이다.

『나를 언제 호송하게 됩니까?』

『내일 아침 7시 비행기로 가게 되었어요.』

『그럼 당신에게 두 가지 요구 조건을 제기하겠는데 들어 주시겠습니까?』

『뭐요?』

『첫째는 오늘 저녁에 마야를 만나는 것이고, 둘째는 여기 경찰들에게 내가 법에 어긋나는 아무러한 죄도 없다는 것을 당신이 법관으로서 증인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잡혀가면 끝인데 그런 게 필요 있어? 그리고 나는 좀 자야겠어.』

나는 그의 거만한 태도에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아 참기 어려웠다.

『당신이 만약 그 요구 조건을 들어 주지 않으면 나를 순조롭게 데리고 가기가 힘들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는 나를 한참 쏘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순조롭지 못하면 어쩔 셈이야.』

『뛰던가, 아니면 최후 발악이라도 해야지요.』

『흥, 총으로 쏘면 어떻게 된다는 걸 알아?』

『알지요, 내가 바라던대로 되지요.』

그러자 그는 나를 무사히 데리고 가는 것이 자기 임무라고 생각했던지 얼르기 시작했다.

『김선생은 그런 생각을 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살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야 해요. 방법은 있지요. 당신이 러시아법을 위반한 것으로 하고 러시아 재판을 받고 러시아 감옥으로 가면 되지요.』

그의 말이 맞았다. 북조선 벌목장에서 그러한 사건이 몇 번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야에 대하여 상세히 이야기하고 카자흐스탄 경찰들이 나를 큰 죄인으로 생각하는데 그들에게 옳은 인식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감옥소 경찰들도 역시 나에 대하여 알고 싶었던지 그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그들은 나에게 아무 죄도 없다는 것을 알고 모두가 아깝다고 혀를 차고 나와 마야를 두고 사랑을 주제로 한 인도 영화의 주인공처럼 묘사하면서 떠나기 전에 마야를 만나게 하자고 하였다.

이렇게되자 김와실리는 자기가 직접 마야를 데려오겠다고 나갔고 나는 감방으로 돌아와 소지품을 정리하고 칼을 몸에 깊숙이 감추었다. 그 칼은 나와 한 감방에 있던 러시아인이 흘레브(러시아 빵), 칼바스(러시아소시지)를 썰어 먹으려고 몰래 가지고 들어온 것인데 내가 감추어 두었던 것이다.

나는 그 칼을 거의 한달 동안 몸에 깊숙이 감추고 있었고 그 러시아인은 칼이 없어진 것으로 하여 은근히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경찰들이 그가 칼을 가지고 감방에 들어 왔다는 것을 알면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그 칼을 다시 꺼내어 만지고 또 만졌다. (내가 혹시 실수하면 어쩌나…. 대담해야 해. 북조선으로 절대로 끌려가면 안 돼. 두 손으로 힘껏 찌르고 위로 쭉 올려 째야 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간수가 와서 소지품을 다 준비해 가지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아침에 떠나는데 왜 벌써 다 준비하고 나 가느냐고 하자 그는 나와 마야를 생각해서 아침까지 사무실 한 칸을 내줄테니 마야와 같이 있으라는 것이었다.

면회실에 들어서자 기다리던 마야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소리내며 울었다. 나는 쾌활하게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아니 잡혀가면 죽는다면서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어요.』
『운다고 풀릴 문제도 아닌데 같은 값이면 분홍치마라고 우는 것보다 웃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러자 마야는 정색해 가지고 모스크바 남조선 대사관에 연락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나는 맥없이 고개를 저었다.

어느덧 아침 6시가 되었다. 경찰들이 와서 시간이 되었으니 비행장으로 나가자고 하였다. 드디어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김와실리가 나에게 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마야가 가슴 아파할 것 같아 수갑은 채우지 않겠는데 비행장까지 조용히 나갑시다.』

우리는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왔다. 1층으로 내려서면서 곧 바로 나가면 현관 출입문이고 양옆으로 긴 복도로 되어 있다. 현관 출입문 앞에는 호송차가 발동을 걸어 놓은 채 세워져 있었다.

나는 1층에 내려서면서 현관 출입문으로가 아니라 옆으로 돌아서 복도로 뚜벅뚜벅 걸었다.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것을 경찰들도 알았던지 부러 말리지 않았다.

약 3~4m 복도를 따라 걸었다. 나는 칼을 뽑아 들었다. 하나- 두울- 세엣! 실패다. 온 몸에 식은땀이 쭉 내뱄다. 뒤에서 김와실리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김 선생, 이젠 시간이 되었어요. 늦으면 비행기를 못 타요. 그만하고 나갑시다.』

나는 그냥 복도를 따라 걸었다. 다시 한 번, 하나- 둘 – 셋! 아 또 실수다. 내가 왜 이럴까. 눈을 딱 감았다. 다시 한 번, 하나- 두울- 셋! 제기랄 또 실수다. 이상한 생각 이 들었던지 김와실리가 급히 따라왔다.

바로 등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손이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순간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흠칫 놀라며 악- 하고 소리쳤다.

퍽- 칼이 뱃가죽을 뚫고 들이 박혔다. 그 순간 또 다시 그 무엇에 놀란 것처럼 아-악 하며 칼을 위로 쭉 올려 당겼다. 어느 정도 뱃가죽이 찢어지면서 칼이 쭉 빠져 나왔다. 비틀거 리다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예상 못 했던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경찰들의 다급한 외침소리가 들렸다. 마야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나에게로 다가오다가 내 손에 쥐여져 있는 피묻은 칼을 보더니 악 소리치며 쓰러진 내 위에 푹 고꾸라졌다. 나는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마야를 흔들었다.

『마야, 마야, 아니, 왜 이래.』

마야는 정신이 좀 들었던지 급히 내 몸을 여기저기 만져보며 물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짓을 했어요. 빨리 말해요. 예, 빨리.』
나는 마야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마야, 고마워.』

너무도 당황한 경찰들은 어쩔바를 모르고 온통 뛰어다닌다. 나는 김와실리를 찾았다. 구급차를 부르려고 달려갔던 김와실리가 급히 달려왔다.

『김와실리, 미안해요. 나는 아무래도 갈 것 같지 못해요. 후 – 그러니 돌아가면 김일성에게- 내- 인사를 전해주세요. 그리고 내가 김일성이 죽으면 한 달 동안 큰 잔치를 차리고 싶어했다고 전해주세요.』

나는 그를 보며 더없이 만족한 사람처럼 웃음을 지었다. 이상하게도 생각했던 바와 같이 아프지 않았고 다만 잠자고 싶었다. 구급차가 달려왔고 나는 경찰들과 마야, 의사들과 함께 담가(들것)에 실려 구급차에 태워졌다. 차가 한참 달릴 때 나는 잠들어 버렸다.

누군가 자꾸 흔들어 깨운다. 갑자기 콧마루가 찡해지며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화가 났다. (이것들은 왜 자지 못하게 할까.) 자지 못하게 알코올 솜뭉치를 코에 가져다 댄 것 같았다. 차가 멈춰서고 나는 담가에 실려 내리면서 잠들어 버렸다. 꿈을 꾸었다.

나는 그때 그 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참으로 재미있는 꿈이었다. 처음 내가 탈출하였을 때 하바로프스크에서 나를 도와준 할머니의 집에서 한국방송공사에서 보내온 책을 보았는데 그 내용이 꿈속에 나타났다.

그 책은 미국의 의학박사가 쓴 책을 국문으로 번역한 것인데 사람이 육체에서 영혼으로, 영혼에서 다시 육체로 돌아오는 내용이다. 내 꿈속에 나타난 것은 심장마비를 일으킨 사람이 영혼에서 아무런 장애도, 구속도 받지 않고 공중으로 떠다니다 자기를 치료하는 의사들을 내려다보고 웃고 있었다는 책의 내용이었다.

『기분이 참 좋은데. 저 사람들은 바로 그 책에서처럼 수술하고 치료를 하는 거야. 야! 좋구나. 내가 이렇게 좋아하다 죽지 않을까. 응, 그래. 알만해. 책에서 죽은 사람이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곳으로 날아다녔다고 했지. 나도 그렇게 안될까?』

나는 그때 꿈속에서 본 책의 내용이 참으로 재미있었다. 꿈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온 천지가 캄캄해지면서 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정신을 차린 후에 울고 있는 마야에게 처음으로 한 꿈 이야기였다. 그럼 내가 왜, 무엇 때문에 할복이라는 끔찍한 짓을 하게 되었는지 한 번 돌이켜 보기로 하자.

벌목장 탈출

내가 북조선의 독재정치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여름부터라고 생각한다. 그때 나는 자유 외출하여 하바로프스크에 와서 정시하라고 하는 조선인 교포 할아버지를 알게 되어 그의 집에서 이틀 동안 유숙하면서 그를 통하여 북조선의 김일성은 자기의 본명이 아니며 원래 진짜 김일성은 1930년대 초에 조선 사람들 속에 널리 알려진 공산주의 투사라고 하면서 원래 김일성이 죽은 다음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김일성의 이름을 가로채어 자기를 김일성이라고 자처하였으며, 그의 아들 김정일이도 북조선에서 는 백두산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의 고향은 소련의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아무르스크 강변이고 당시 그의 소련 이름을 유라라고 불렀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이 소련에 많다고 하였다.

나는 처음에 그 말을 듣고 노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이도 많으신 분이 젊은 사람 앞에서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가?』고 하면서 그 집에서 하룻밤 더 자려고 계획하였던 일정을 바꾸어 여관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 후 노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나는 북조선은 독재정치이며 인간의 초보적인 자유도 보장되지 않는 신격화된 사회, 폐쇄화된 사회라는 것을 알았어도 김일성이 자기의 독재를 위해 희생된 투사의 이름까지 가로채어 인민을 기만하는 파렴치한 인간이라는 것은 몰랐다.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도 북조선에서는 백두산에서 태어났다고 하면서 백두산 일대를 대로천 박물관을 건설하였는데 거기에 소비된 자금은 아마 내 키를 넘을 것이다. 나는 김정일의 고향이 소련의 아무르스크 강변이라는 말을 들은지는 오래됐으나 그것은 남조선에서 북조선을 헐뜯기 위한 악선전이라고 생각했다.

백두산 일대에 가보면 김정일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를 누구나 알게 될 것이다. 바로 그때부터 나의 사상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 같다. 마치도 온실에서 곱게 피어난 한 떨기의 꽃송이가 찬바람 부는 들가에서 당장 시들어 버리듯이….

1991. 8. 23. 일이다. 나는 저녁에 친구들과 함께 3년간 처와 가족을 떠나 징용살이를 하다보니 고이고 쌓인 가족에 대한 달콤한 정, 냉동기와 텔레비전 몇 대를 사가지고 조국에 돌아가 야매 가격으로 팔면 돈벌이가 잘 될 것이라는 야릇한 생각, 친구들 호상간 오는정, 가는정 찰찰 넘치게 술 몇 잔 맛있게 마시고 있었다.

친구들은 술 몇 잔씩 마시고 기분들이 좋아지자 돌아가는 정세를 놓고 말을 주고받았는데 기본은 소련방의 민주화 노선에 따라 변화된 세계적 흐름이었다.

나는 그때 기분도 좋은 김에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이번 8월 군사정변은 세계정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번 사건은 러시아에서 민주주의가 실시되느냐, 아니면 공산독재가 실시되느냐하는 중요한 계기였는데 인민들의 거센 항거로 하여 쿠테타는 실패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개방, 개혁 정치를 해야하며 민주주의가 실시돼야만 한다.』
라고 말했다. 그 날 술판이 끝난 다음 나는 자기의 실수를 크게 느꼈고 어딘가 모르게 무서운 생각에 사로 잡혔다.

아닌게 아니라 다음날 아침에 벌써 당위원회의 호출을 받았다. 나는 당위원회에 가서 아무 말도 한 것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 그러나 당위원회 종합 지도원은 시간을 줄테니 잘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노골적으로 돈을 가져다 바치라는 소리나 같았다. 내가 만약 조국에서 그런 말을 했다면 그 즉시로 어떻게 처형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시베리아 벌목장에서는 간부들이 돈을 받아먹고 소위 죄인들에 대한 문건을 작성하는데 성한 사람을 정신병자로도 만들고 충실한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도 만든다. 나는 많은 생각을 하였으나 비굴하게 돈을 먹이고 살아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때 나는 더 지체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단호한 결심을 내렸다. 뛰자. 탈출하자. 그리하여 바로 그날(8월 24일) 체크도민-하바로프스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마치 금방 누군가 뒷덜미를 잡는 듯한 조바심으로 오돌오돌 떨면서….

8월 25일 6시 30분, 하바로크스크 역에 도착한 나는 난처하였다. 어디로 갈 것인가. 탈출할 생각만 하였지 구체적인 목표도 계획도 없이 떠나고 보니 어떻게 할지 몰라 망설이기만 하였다. 나는 두 시간 가량 역 주변을 돌면서 생각을 정리하였다. 우선 목표를 설정해야 했는데 그 목표란 뚜렷한 것이었다.

남조선, 남조선 밖에 더 갈 곳이 없었다. 남조선으로 정치 망명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이미 고르바쵸프 대통령의 개방 개혁 정치로하여 아득하게 멀어 보이던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간 냉전의 종말은 일시에 태풍마냥 세계를 휩쓸고 마치도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소련의 수도이며 세계적인 대도시인 모스크바에 남조선 대사관이 자리를 척 잡고 있는 때다.

그런데 모스크바는 어떻게 가고 남조선 대사관은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던 나는 일전에 만나 본 일이 있는 조선인 교포 정시하 할아버지가 남조선에 친척 방문으로 갔다 온 일이 있다고 하던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나는 버스를 타고 그 노인의 집으로 찾아 갔다.

당시 노인은 꽃장사를 하면서 살았는데 장마당으로 막 나서려 던 찰나에 내가 들어섰다. 내가 인사를 하자 노인은 들어오라고 하면서도 별로 반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였다. 아마 전번에(1년 전) 좋지 않은 말 몇 마디 한 것으로 하여 노여움을 사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하든 노인의 도움으로 남조선 대사관으로 가야 했다.

『자네 어떻게 되어 다시 왔나?』

나는 양해부터 구했다.

『할아버지, 작년에 있었던 일은 양해하여 주십시오. 저는 할아버지의 그 말씀을 듣고 많은 생각을 하였고 또 할아버지와 같은 분이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김일성의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여 연구해 보았는데 할아버지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정말 북조선의 독재자들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우리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얼마나 무참히 짓밟고 있는가를 똑똑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남조선으로 망명하려고 뛰쳐나왔습니다.』

할아버지는 새삼스럽게 나를 다시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남조선으로 가면야 좋기야 좋지, 그런데 그게 헐한 일이 아니야. 자네 이제 잡히기만 하면 끝이야. 그리고 북조선에 있는 자네 부모 형제들은 어떻게 하나? 들리는 말이 그들도 모두 잘못된다는데…』

그 말을 들은 나는 내가 그렇게도 고심하던 문제가 현실로 닥쳐왔음을 피부로 느꼈다. 이젠 정말 온 가족 친척들의 불행과 고통의 장본인으로 된 것이다. 열차를 타고 오면서도 줄창 그 생각 때문에 골머리가 아팠는데 처음으로 남에게서 그 말을 직접 듣고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할아버지, 됐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성공 할 수 없어요.』

그러자 노인은 『됐네, 진정하라구. 밤잠도 제대로 못자고 쉬지도 못했을텐데 좀 쉬라구. 내 이제 시장에 나가 뭘 좀 알아보고 꽃도 좀 팔고 점심시간이면 돌아오겠네.』하고는 노친을 불러 식사도 시키고 잠자리도 깔아 주라고 당부하고 나갔다.

한국대사관을 찾아가는 길

할아버지는 그 날 오후 2시경에 돌아왔는데 자기가 잘 아는 교포 할머니 한 분이 친척 방문으로 일시 남조선으로 가게 된다고 하며 그 수속 때문에 모스크바 남조선 대사관에 일시 떠난다는 것이다. 그 날 저녁 나는 노인과 함께 그 집으로 찾아갔다.

할머니는 나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북조선 사람들이 불쌍하다느니 김일성이 죽지 않고 오래 산다느니 하면서 한참 말하고 나서, 자기는 모스크바에 못 가고 자기 사위가 자기 여권 수속 때문에 일시 모스크 바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집에서 자고 아침에 사위를 만나 토론해 보자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사위(오쎄르게이)를 만났는데 그는 아무런 증명서도 없이 어떻게 가겠느냐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증명서 없이 가자면 열차로 가야 하는데 열차는 7일간 가야 해요. 그런데 나는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시간을 낼 수 없어요.』

할머니가 옆에서 어떻게 잘 생각해보고 도와주라고 하자 쎄르게이는 한 가지 방법은 남의 신분증을 빌려가지고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인데 이건 위험하고 또 신분증을 빌리자면 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담하게 한 번 해보리라 마음먹고 신분증을 빌리는데 돈이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다. 2~3천 루블이 면 된다는 것이다. 그때 나에게는 미화 100달러와 소련돈 4,500루블이 있었는데 100달러를 내주면서(당시 1달러는 40루블 정도) 신분증도 빌리고 비행기표도 준비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쎄르게이는 내일 당장 떠나자고 하면서 잠간 나갔다 들어오더니 신분증을 빌리려고 했던 친구가 출장가고 없으니 며칠 후에 떠나자고 하였다.

며칠 후인 9월 6일 저녁 쎄르게이는 나를 찾아와 신분증과 비행기표를 다 준비했으니 내일 아침 11시 비행기로 떠나자고 하면서 신분증의 이름과 생년월일 같은 것을 외우라고 하였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오쎄르게이와 그의 처 오따찌야나와 같이 비행장으로 나갔다. 우리는 혹시 북조선 안전원들이라도 있을까봐 으슥한 곳에서 약 15분가량 기다리는데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타실 분들은 개찰구로 나오라는 안내 방송원의 목소리가 울렸다. 극도의 긴장으로하여 쿵쿵 울리는 심장의 박동 소리가 귓가에까지 울렸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경찰은 신분증을 대조하지도 않고 그냥 통과 시켰다. 후- 하나님! 그때 시간은 하바로프스크 시간으로 오전 10시 30분경이었는데 7시간만에 모스크바로 날아오니 모스크바 시간으로 아침 10시 40분이었다.

모스크바 공항에 내린 후 나는 『후- 이젠 됐구나.』하고 긴장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날씨는 안개가 꼈는지, 구름이 꼈는지 분간하기 어렵게 음침하고 안개같은 가는 이슬방울들이 쌀쌀한 바람에 실려 온 몸을 감싸며 우수수 떨려났다.

그때 음침한 모스크바의 날씨와는 달리 나의 가슴은 성공하였다는 기쁨으로 가볍게 설레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나의 앞길에는 기쁨이 아니라 죽음으로의 언덕과 간고한 시련의 가시 덤불길이 놓여 있었다. 파란 곡절이 놓여 있는 자기의 운명을 내가 어찌 알 수 있었으랴.

우리는 공항에서 모스크바 안내 약도를 하나 사들고 대사관을 향하여 떠났다. 달리는 차에서 차창 밖을 내다보노라니 생각했던 모스크바와는 너무도 달랐다. 어둠에 잠긴 듯한 음침한 날씨에 건물들도 대체로 구식 건물, 말 한 마디 없이 차를 모는 운전수 역시 무뚝뚝한 표정이다. 그러나 여기가 바로 세계적인 대도시라고 생각하니 잠자고 있는 크나큰 괴물과도 같았다.

한국대사관에서 일어난 일

대사관에 도착한 나는 오쎄르게이에게 대사관의 대사님을 좀 찾아보라고 하였다. 한참 후 오쎄르게이는 대사관 관원 한 명을 데리고 나왔다. 그 관원은 나를 보더니 『안녕하세요, 북한에서 오셨다지요. 이 방에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대사님은 안 계시구요. 참사님을 찾아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회의실 같은 방을 가리 켰다.

순간적으로 이상한 기분에 사로 잡혔다. 바로 이 사람이 북한에서 타협할 수 없는 원수로 알고 있던 남조선 사람이로구나. 하 고 생각하니 등골로 식은땀이 쭉 흐르는 것 같았다.

그가 가르키는 방에 들어가니 대사관 가족인 듯한 중년 여인과 처녀 한 명이 포도를 먹으며 소곤소곤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그들은 앉으라고 의자를 권하였다.

나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한 쪽 벽에는 남조선 대통령 노태우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 앞에는 남조선 국기가 세워져 있고 맞은편에는 세계 지도와 책장이 놓여 있었다. 처녀가 우리에게 포도를 먹으라고 권하면서 소련에서 사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처녀는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아마 소련에서 산다고 하니 흥미를 느낀 것 같았다.

예, 친척 방문으로 남조선에 가려고 여권 수속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처녀는『아이, 한국말을 참 잘하시네요.』하면서 뭔가 더 물으려고 하는데 문이 열리며 키가 후리후리한 사람이 들어섰다. 그는 들어서면서 여자들에게 옆방에 가 있으라고 일렀다. 그들이 나가자 그 사람은 자기는 대사관의 최 선생이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자기 소개를 하였고 나 역시 내소개를 하였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왔느냐는 최선생님의 물음에 남조선으로 망명하려는 나의 결심을 이야기하고 오쎄르게이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런데 오쎄르게이 말을 듣던 최 선생은 순간에 낯색이 달라지면서 쎄르게이더러 밖에 나가 좀 기다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가 나가자 최 선생은『김 선생이 망명하겠다면서 저 사람을 믿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가. 이런 일은 그런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하면서 미안하지만 몸을 좀 볼 수 있는가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좀 불쾌하였다. 몸수색을 하다니…. 그러나 나는 남북간의 대립상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필요하다면 보십시오.』하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는 내 몸을 여기저기 만져보고 절대로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며 말했다.

『지금 북한 대사관에서 자주 도발을 걸어옵니다. 얼마전에도 몸에 녹음기를 감춰가지고 망명을 신청하는 것처럼 하면서 대사관 관원들의 말을 녹음하여 가지고 러시아측에다 대고 한국에서 북한 사람들을 납치해 간다고 제기하여 러시아측 경찰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시베리아 벌목장 노동자 한 명이 남조선으로 가려고 남조선 대사관에 찾아 왔다가 성공 못하고 서구라파로 넘어가는 국경에서 소련 경찰에 체포되어 북조선 대사관에 잡혀갔다.

그는 심문에서 자기는 남조선 대사관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북조선 대사관으로 알고 찾아갔는데 들어가 보니 남조선 대사관이었다면서 남조선 대사관에서는 자기를 남조선으로 망명하라고 강요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남조선 대사관에서 겨우 빠져나와 열차를 탔는데 잘못 타서 헝가리 국경까지 가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결국 북조선 대사관에서는 그를 이용하여 남조선 대사관을 비방 중상하는 데 써먹은 것 같다.

북조선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우리 사람들이 남조선으로 망명하는 것이다. 북조선 사람들이 탈출하여 러시아에서 사는 것과 남조선으로 가는 것은 그 성격 자체가 완전히 다르게 취급되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처벌한다.

그 외에도 최 선생은 여러 가지 실례를 들면서 북조선 대사관에서는 사람이 없어지면 남조선 대사관 주변에서 감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더러 이름과 생년월일, 간단한 경력을 쓰고 망명하겠다는 전향서를 쓰라는 것이었다.

이름 김 영권
생년월일 1955. 1. 13
출생지 양강도
사는 곳 양강도
경력
재소임업대표부 제8사업소 노동자
전향서

나는 북조선의 독재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남조선으로 망명할 것을 원하면서 한국 정부에서 받아줄 것을 요청합니다.

1991. 9. 7 김 영권

내가 다 쓰고 펜을 놓자 그는 여권은 무슨 여권을 가지고 있는 가고 물었다. 나에게는 여권이 없었다. 북조선에서는 도주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여권을 내주지 않았다.

최 선생 은 자기도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여권이 없이는 못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내 귀를 의심했다. 여권이 없이는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한 개 국가를 대표하는 대사관에서 이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는가 하고 찾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갈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재차 물었다.

『아니 그래 갈 수 없습니까?』

『여권이 없이 어떻게 가겠습니까. 다른 서방국가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여기 러시아는 아직 공산권내에 있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은 외교관계를 맺은지 얼마 안 되지만 북한은 40여년간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에 자칫 잘못 하여 외교상 문제가 크게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한국정부는 한 민족으로서 당신과 같은 사람을 도와주고 싶지만 지금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김 선생이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너무 안타까와 또 물었다.

『다른 무슨 방법은 없겠습니까?』

『방법은 이제 당신이 우즈백스탄이나 카자흐스탄에 가서 살면서 잘하면 소련 여권을 만들 수 있는데 소련 여권을 가지고 한국에서 초청장을 받아 가지고 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탈출한지 며칠 안되는데 다시 북한으로 돌아 가든가.』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이런 소리를 하는가. 남조선에 못가면 못 갔지 다시 돌아설 사람 같은가.) 하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좀 어렵기는 하나 당신이 헝가리로 가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은 헝가리와 대단히 관계가 좋으므로 여권 없이도 한국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헝가리로 가는 것도 신통치 못한 방법이라는 것을 느끼면 서도 도와주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고, 비로서 한국에로의 망명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달았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뛰쳐나온 나 자신을 뼈저리게 뉘우쳤다.

어디로 갈 것인가?

대사관을 나선 나는 허탈감으로 하여 머리가 띵하고 도무지 무슨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어디로 갈까. 나에게는 갈 데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었다. 쎄르게이는 옆에서 보기가 안됐던지 넓고 넓은 소련땅에 살 데는 얼마든지 있으니 걱정말고 여관에서 쉬자고 하였다.

엎친데 덮친다고 그날따라 찾아가는 여관마다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온 거리를 헤매며 자리를 찾던 우리는 밤 12시나 되어 개인이 운영하는 자그마한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여관에서 목욕을 한 다음 식사하자고 하였으나 나는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침대에 드러누었다. 그러자 그는 어디서 구했는지 꼬냑 한 병을 가지고 와서 속이 답답할 때는 한 잔 하면 좋다고 잡아끌었다. 나는 혼자서 그 한 병을 거의 다 마시다시피 하고 거나하게 취한 김에 정신없이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8시경에 일어난 나는 세수를 하고 자리에 드러누었다. 쎄르게이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고 물었다. 나는 도리어 그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가고 물었다. 그러자 쎄르게이는 타쉬켄트나 알마티아에 조선인 교포들이 많은데 거기에 가서 좀 살면서 증명서를 해가지고 남조선으로 가는 것이 좋지 않은가고 물었다. 그러나 그쪽으로 가서 아는 사람도 없이 어떻게 살며 여권은 어떻게 만든단 말인가. 생각하던 끝에 말했다.

『쎄르게이 아무래도 내친 걸음인데 헝가리로 가는 것이 어때. 국경까지 열차로 가고 국경을 넘을 때는 걸어서 넘으면 되지 않을까?』

쎄르게이는 아무튼 잘 생각해 보고 결심하라고 하며 오늘은 모스크바 구경이나 하고 저녁에 다시 토론하자는 것이다.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크레믈린으로 갔다. 크레믈린 앞거리에 도착한 나는 깜짝 놀랐다. 파편에 맞은 듯 창유리가 깨지고 타이어가 터지고 충돌하여 찌그러진 승용차들과 대형 짐차들 이 거리에 꽉 차있고 바리케이트를 쌓았던 자리들로 하여 엉망진창이다.

나는 쎄르게이에게 여기가 왜 이렇게 지저분한가고 묻자 여기가 바로 지난 8월 쿠데타가 일어났던 자리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새로운 기분으로 그 자리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리고 혼자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만약 그때 공산당 집권자들이 승리하였다면 세계 정세가 어떻게 변했을까?) 크레믈린을 다 돌아 본 다음 우리는 레닌사적관, 백화점까지 다 돌아보고 여관으로 돌아 왔다.

다음날 아침 나는 헝가리로 가려고 모스크바의 키예브쓰카야 역으로 나왔다. 그때 우리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모스크바-부다페스트행 열차를 타고 키예브까지 가면서 국경 통과 질서를 알아보고 열차에 몸을 숨겨 가지고 국경을 통과할 수 있으면 열차원을 돈으로 매수한다.

다음은 국경까지 열차로 가고 국경을 넘을 때는 산을 외돌아 걸어서 넘으면 되는데 나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걸어서 국경을 넘는 것은 자신이 있었지만 넘어선 다음이 문제였다. 국경에서 부다페스트까지 가자면 헝가리 돈이나 달러가 있어야 하는데 나에게는 4,000루블 밖에 없었다. 쎄르게이가 나에게서 받은 100달러도 집에 두고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 해결 방도가 서지 않았다. 무작정 열차에 올라탄 우리는 열차원을 만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탄 방통은 헝가리로 넘어가지 않고 앞으로부터 3방통 만이 헝가리로 넘어간다는 것이었다.

쎄르게이가 자기 혼자서 헝가리행 방통에 가보겠다며 나갔다가 한참 후에 돌아와서 안될 것 같다고 머리를 저었다. 열차원은 쎄르게이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왜 증명서가 없는가고 오히려 따지려는 것이었다. 갈수록 태산이라고 일은 자꾸만 꼬이기만 했다.

어쩌면 좋은가. 어디로 갈까. 헝가리 국경을 넘다가 잡히면 끝이야. 그렇다고 타슈켄트나 알마타아에 가면 누가 여권도 없는 사람을 믿고 도와주겠는가. 생각할수록 기막힌 노릇이었다.

되든 안되든, 죽든 살든 타슈켄트나 알마타아 밖에 더 갈데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다음날 아침 키에브에서 내려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나는 타슈켄트에 가 보기로 결심하고 열차 시간을 알아보니 다음날 아침 7시에 열차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표를 사고 역에서 자기로 했다.

쎄르게이의 우정

역에서 기다리노라니 또다시 머리가 복잡했다. 이젠 날짜도 퍽 지났음으로 쎄르게이는 빨리 돌아가야 했고, 나는 혼자서 행동해야 했다. 쎄르게이는 내 앞길을 두고 자꾸 걱정하면서 뭐든지 하나라도 더 주려고 애를 썼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 없어. 괜찮아. 젊은놈이 아무렴 제구실을 못할까. 내 이제 타슈켄트에 가서 기어이 성공하고야 말겠어.』
『꼭 성공하라구. 그리고 조심해야 해. 자네 잡히기만 하면 끝이야. 타슈켄트에 갔다가 정 바쁜 일이 생기면 나에게 전보를 보내라고.』

그는 주소를 적어주고 아침이면 헤어지겠는데 다시 못 만날지 모르니 헤어지기 전에 술이나 한 잔 같이 하자면 카페로 이끌었다. 그런데 밤 12시경에 김일성의 초상 휘장을 단 사람 몇 명이 카페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극도로 긴장하여 눈짓으로 쎄르게이더러 밖으로 나가자고 하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한참 후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그들도 역시 대합실에서 밤을 새울 작정인지 오래도록 앉아서 음식을 먹으며 일어설 줄 몰랐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온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생각할수록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에서 제 사람들을 무서워 피해다니며 밖에서 오들오들 떨며 밤을 새우자니 한심하기만 했다.

작 별

김일성. 김일성이라는 존재가 도대체 뭐길래 사람들을 이렇게 만드는지 저절로 화가 치밀어 올라 쎄르게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이제 김일성이 죽으면 돈을 주어서라도 한달 동안 잔치를 차리겠네.』

쎄르게이는 웃으며 그때 자기도 잊지말고 꼭 청해 달라고 하면서 북조선 사람들은 왜 김일성 김정일을 그냥 놔두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북조선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를 정치사상적으로 목숨으로 옹호, 보위하자는 술어가 하나의 대명사처럼 사용되는데 이따금 방송에서 방송원이 그 구호를 목청껏 외치면 영리한 강아지들까지 덩달아 꼬리를 흔들며 같이 곡조를 맞추어 짖어댄다고 말했다.

쎄르게이는 좋다고 웃어대면서 자기가 총으로 그들을 쏘아 죽이면 훈장을 주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에게 훈장뿐 아니라 김일성 대신 북조선의 대통령 자리에 앉혀 주겠다고 말하자 그는 당장 가겠다고 덤벼서 또 다시 웃어댔다.

그러노라니 어느덧 차시간이 되어 우리는 헤어져야 했다.

『뱃심을 든든히 가지라고, 맥을 놓으면 안 돼. 그리고 돈이 떨어지면 굶지말고 어디서 도적질해서라도 먹어야해. 나는 며칠 안되었지만 자네 배짱이 마음에 들어. 우리 꼭 다시 만나자구.』

그리고는 러시아식대로 굳게 포옹하고 살뜰히 입을 맞추어 주는 것이었다.

『고맙네. 돌아가기 전에 자네 장모와 처에게 일이 모두 잘 되었다고 말하라구. 여자들이 걱정하면 일이 잘 안되는 법이야.』

나는 돌아서 열차로 돌아갔다. 밖에서 쎄르게이가 주먹을 쳐들어 보인다. 나 역시… 건투를… 하고 주먹을 쳐들었다. 기적소리 울린다.

열차는 출발하였다. 마치도 새로운 운명의 길을 걷기 시작한 나의 첫 출발을 알리는 듯 기적소리는 가슴속에 긴 여운을 남기고 사라질 줄 몰랐다.

사랑하는 어머니
집 떠난 이 아들 걱정으로
사립문 가에서 울지 마시고 마음 좋게 가지세요.
오늘은 내 비록 그대들의 두 어깨에
무거운 짐을 실었어도
내일은 그 집에 날개가 돋혀
아늑한 꽃밭으로 그대들을 싣고 가리.
그대들이여.
들어 보시라.
세계는 민주의 함성 요란타.
대지는 민주의 아침 노을 불탄다.
기다려다오.
조금만 참아다오.
나도 그 영광의 대오, 민주의 함성과 함께…
사랑하는 아들 청석아.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너의 어린 가슴에
불행과 고통을 안겨주는 한이 있어도
정의로운 그 영광의 대오.
민주의 함성과 더불어 나는 영생하리!

0 개의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