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24일 화요일

군부가 관리하고 있는 평양 지하철의 비밀

인터뷰 날짜 : 2012년 7월 24일
장 소 : 북한개혁방송 사무실
증언자 : 강철용(평양시 지하철도 시설관리대 복무)
탈북일자 : 2011년 10월
평양지하철 근무 : 2005년 ~ 2010년 2월
출처 북한개혁방송 http://www.nkreform.com/common/news/news.asp?c_idx=43

지하철 운영관리 군부대

평양지하철 관리는 군인들이 한다. 북한은 군대 초모사업으로 군 입대자들에게 신병훈련을 시키고 평양지하철에 배치한다. 나는 군대 초모사업으로 군대에 입대하여 신병 훈련 받고 지하철도에 2관리소 7대대로 받았다.

평양지하철 관리 부대의 명칭은 ‘내각 보안성 제23국 지하철도 운영관리국’이다. 운영관리국 책임자의 군사칭호는 중장(준장)이다.

제23국에는 제1관리소에서 제8관리소까지 있다. 관리소 책임자의 군사칭호는 중좌(중령) 또는 상좌이다. 2008년 8총국 참모장이 23국 국장으로 오면서 건설을 전문으로 하는 8관리소를 추가하여 총 8개 관리소가 되었다. 한 개 관리소 인원은 500∼600명 정도 된다.

관리소에는 ‘대’가 있고 그 밑에 ‘관리’가 있다. ‘대’의 책임자 군사 칭호는 소좌이고 ‘관리’ 책임자는 상위다. 부를 때는 관리소는 ‘1관리소’(대대급) 또는 ‘2관리소’라고 하며 그 밑에는 ‘대’(중대급 규모), 그 밑에는 ‘관리’(소대급 규모)라고 부른다.

지하철도 운영관리국(본부) 건물은 평양시 서성구역 붉은별역에 있다. ‘전우역’에 4관리소가 있고 ‘부흥역’에 3관리소, ‘건국역’에 5, 6관리소, 붉은별역에 1, 2관리소가 있다. 붉은별역에서 서포구역으로 넘어가는 산등성이에 신병훈련소가 있고 지하철 운영관리국 병원도 함께 있다. 지하철 운영관리국 수리관리소(공장)는 용성구역 입구에 있으며 이곳에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지하철 연결철로가 있다.

1, 2관리소는 전동차만 관리하는 관리소(대대)이다. 각 관리소(대대급)에는 1대에서 5대까지 있다. 관리소 산하 1대(중대급)는 에스컬레이터를 담당하고 2대는 통신설비 관리, 3대는 전쟁설비 관리, 4대는 노선 및 갱도 관리, 5대는 지하철 운영시 표를 팔거나 열차 안내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여성 부대이다.

지하철 안의 벽화 등 그림 관리는 붉은별역에 있는 지하철 운영관리국(본부)에서 한다. 본부에 5개 ‘대’가 있는데 1대가 지하철 내 오염 공기를 여과하는 설비(전쟁설비)를 관리하고, 2대가 개선역, 광복역, 락원역 등지에 있는 김일성 동상 경비를 서는 임무를 한다. 3대는 예술선전대이고 4대는 운수대대, 5대는 보초를 담당한다. 지하철 운영관리국은 군대체계로 되어 있지만 일반 군인들은 총기를 휴대하지 않고 신병훈련소에만 총이 있다.

■지하철 운행 및 이용 실태

평양 지하철은 첫차가 오전 6시에 운행을 시작해 막차는 오후 9시 40분까지 운행한다. 오전 5시 50분이면 지하철 역 문이 열리고 출입할 수 있다. 열차 배차 간격은 8분~15분 정도이다. 김일성 말씀 중에 ‘최대한 5분에 한 대씩 뛰도록’이란 것이 있지만 대체로 8분 정도 간격이다.

평양 지하철의 운송능력은 1시간에 약 3,000명 정도로 추정한다. 평양 지하철 열차 1편성 당 객차는 4개 정도이다. 지상의 여객열차 차량보다 작고 한 차량에 많이 타면 약 70명 정도 탈 수 있다. 남한의 지하철은 양 끝에 노인석이 있지만 북한의 지하철은 노인석이 없고 남한의 지하철 보다 차량이 적은 편이다.

아침, 저녁 출퇴근 시간대라고 해서 열차 배차 간격이 변동되지는 않는다. 평양시 출근시간은 아침 7시부터 8시, 9시고 퇴근시간은 오후 6시부터 8시 사이인데 출근 때보다 퇴근 때 지하철에 사람이 많이 붐빈다. 지하철에 사람이 제일 적을 때는 출근 시간이 끝나고 1시간 정도 지난 후와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2시~4시 사이다.

■ ‘지하철 통근카드’ 발급과 뇌물

지하철 승차 요금은 2009년 이전에는 북한 돈 10원이었으나 현재는 교통카드를 사용한다. 2007년부터 자기가 다니는 기업소(회사)에 1,600원을 내고 신청하면 기업소에서 6개월치 ‘지하철 통근카드’를 발급해준다.

어느 누구나 카드를 발급받는 것이 아니라 직장을 다니는 사람에 한해서 발급해준다. 때문에 교통카드 발급과 관련해서 뇌물이 오고가기도 한다. 교통카드 한번 발급 받으려면 담배 한 보루(10곽)는 쥐어줘야 한다. 정책상으로는 기업소에 다니는 사람이 탈 수 있지만 표만 구하면 평양시민 누구나 탈 수 있다.

지하철에서 표를 관리하는 것은 지하철도 운영관리국 관리소에 있는 각 대의 여성들이다. 이들은 정복을 입고 표를 받는 등의 일을 할 뿐, 뇌물을 받아서 무언가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군관들이다.

지하철은 제시간에 탈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버스보다 편리하다. 버스의 경우 버스의 정시도착 여부를 알 수 없어 불안하나 지하철은 그렇지 않다. 출퇴근 시간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줄이 50m씩 서는 곳도 있다. 동평양 쪽에는 지하철이 워낙 없으니까 버스를 사용한다. 평양시 운송수단 중 궤도 전차도 사용할 만하다.

2. 평양 지하철 군인들의 근무 및 생활 실태

■ 지하철 근무자 선발 및 근무 환경

평양지하철도 운영국은 본부까지 모두 합쳐 3,500명 정도이다. 신병 훈련 대대가 봄과 가을에 초모(군입대) 사업을 하는데, 봄에 200명, 가을에 150명 정도를 뽑는다. 이 중에 여성은 1/5정도로 전체 인원 중 600~700명 정도이다.

지하철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젊은 사람들이다. 평양 지하철에서 근무하는 여성 역시 전국에서 초모해 오는데 대체로 힘 있는 집안 자제들이다. 2006년부터 평양에 사는 사람은 평양시에서 군사 복무를 하지 못한다는 방침이 떨어졌다.

사는 곳과 군 복무지가 같으면 너무 편하고 군율이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평양시에 집을 두고 있는 사람은 모두 지방으로 보냈는데 평양시 지하철도 운영국 만은 제의서를 올려 평양 거주자를 뽑아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전체 부대 군인의 10~20%는 평양에 거주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평양지하철 복무자들은 어느 정도 생활수준이 되는 사람들이다.

평양지하철 운영국 병사 중 약 70%는 부모가 돈 또는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일반인이다. 70%의 사람들도 부류가 나뉜다. 굉장히 잘 사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돈을 잘 쓸 수 있는 사람들이 20%, 괜찮게 사는 사람이 30%, 상류급이 20%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지하철 관리 부대 중 가장 근무하기 좋은 곳은 에스컬레이터를 관리하는 부대이다. 근무지는 지하철이고 부대는 지상에 있다. 또 관리소 본부에 속해 있는 경리소대라는 것이 있는데 식량, 기름 등 먹는 것을 다루기 때문에 여기에 들어가려면 뇌물을 바쳐야 할 정도로 인기가 좋다. 여기에서 하는 일들은 사무보조 같은 일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군사 복무를 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평양시에서는 군인들이 외출할 때 군복을 입지 못한다. 2005년 경에 유엔 등에서 인도지원 관계로 북한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당시 외국인 눈에는 평양에 군인들이 너무 많아 보였고 그런 것이 이미지상 문제가 있어 외출시 군복을 금지시켰다.

지하철 부대 군복은 일반 군대 군복과 같고 경비대 연장을 단다. 지하철에 내려가 근무 할 때에는 검은색의 근무복을 입고 지상에서 훈련할 때는 일반 군복을 입는다. 2년에 한 번씩 군복을 주고 3년 마다 근무복을 주는데 제때에 공급되지는 않는다. 외출 시에는 사복을 입어야 하는데 별도로 사복을 지급하지 않으며 남의 옷을 빌려 입거나 근무복을 입고 나가기도 한다.

외출은 한 달에 한 번도 못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한달에 5일 정도 외출했다. 내 경우는 평양에 대학 친구, 친척 등이 있어서 갈 데가 많았다. 2007년에 1년 간 평양시 평천구역에 내각 육해운성과 함께 아파트를 건설하는 일에 동원된 적이 있었다.

당시 철근 가공 작업을 했는데 굉장히 힘들었으나 사회에 나와 있어서 좋았다. 근무시간 외에 외출을 하려면 이유가 있어야 하거나 식량이나 물자 등 무엇인가 가지고 올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있다면 말하고 나갈 수 있다. 근무를 서다 보면 지하에서 술도 먹고 싶고 하니까 밖에 나가서 그런 것을 갖고 올 수 있다고 하면 무조건 내보낸다.

군 복무 중에 군관학교를 가려면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문제는 시험이 아니라 돈이다. 시험으로는 한 사람도 안 붙는 것 같다. 일단 제일 높은 보안성 정치군관학교는 대학 경력으로 쳐 준다. 보안성 정치대학이 제일 인기가 높다. 아니면 보안성 산하 군관학교를 가는 식이다. 힘 있으면 보위대학도 갈 수 있다.

■병사들의 연애 문제

지하철 운영국 병사들 중에서도 분대장들이 연애 문제가 아주 활발하다. 지하철 부대라서 밤 근무가 많다. 지하철은 오후 10시 전에 운행을 마감하지만 그 다음 날 운행 준비로 인해 야간 근무를 많이 한다.

지하철 부대는 3교대로 일한다. 야간근무(오후 10시~다음날), 낮근무(오전 8시~오후 3시), 오후근무(오후 3시~오후 10시)로 나뉜다. 야간 근무일 때는 그 다음 날까지 무조건 지하에 있어야 한다. 야간 근무 때는 지하철 청소나 설비점검을 한다. 1대, 2대, 3대, 3, 4관리, 5대는 지하에 고정근무가 있다. 5대는 여자부대니까 이들과의 연애 문제가 많이 생긴다.

연애 과정에서 임신을 하면 자체적으로 해결한다. 의사들에게 은밀하게 돈이나 뇌물을 주고 소파(임신중절) 수술을 하는 식이다. 이성관계가 많은 병사들은 대체로 평양시에 거주하면서 군인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신병훈련 받을 때 여자 신병을 도로 집에 보낸 일도 있었다. 군에 입대하기 전에 임신했는데 모르고 군대에 입대해 왔다가 임신 사실이 밝혀져 돌려보낸 것이었다. 여성군인들도 입대할 당시 나이가 17살이었다.



지하철 부대에서 연애 문제에 관심이 많은 병사들은 주로 집에 돈이 있고 평양에서 살다가 군에 입대한 병사들이다. 군대 복무하는 여성이 10명이라면 7명 정도가 남성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이성관계가 빠르게 시작되는 병사는 한 줄 달고(상등병)도 이성관계를 갖게 되는데 나이는 20살 미만이다. 주로 초급병(상등병이나 하사관)들이 그런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군대 내에서 연애 문제는 각자가 관리를 하기 때문에 생활제대 된 사람은 없었다. 내가 근무할 당시 한 여성 부분대장이 외상거래와 사기를 치다가 빚이 100만원 정도로 늘었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제대한 일은 있었다.

3. 평양 지하철 구조와 설비·보수

■평양 지하철 구조 및 주요 시설

평양시 지하철은 1973년도에 개통됐다. 지하철 개통 당시 1단계, 2단계, 3단계로 나눠서 개통했는데 그때마다 김일성, 김정일이 모두 방문했었다. 부흥역, 영광역, 승리역, 개선역에는 김일성, 김정일이 왔다갔고, 봉화역은 김정일이, 붉은별역은 김일성이 왔다 갔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방문하는 지하철 역은 고정되어 있는데 대체로 영광역부터 붉은별역을 많이 방문했었다.

평양 지하철 깊이는 가장 얕은 곳이 80m 이상, 가장 깊은 곳은 100m이다. 에스컬레이터 길이는 120m로 경사는 45도~50도 정도다. 역 간 거리는 약 10분 정도로 제일 짧은 구간이 건국역부터 황금벌역 사이다. 그 외에는 비슷하다. 평양 지하철도 평상시에는 한국과 똑같이 교통 편리를 보장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남한의 지하철의 경우 수입과 지출을 따지지만 북한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다.

평양 지하철은 유사시 주민대피용으로 사용한다. 이를 위해 지상에서 핵폭발 등으로 공기가 오염됐을 경우 지상의 공기를 차단하는 방호문을 운영한다. 지하철역마다 환기갱(환기 터널)이 있다. 양쪽으로 역마다 환기 터널이 있으며 가운데에도 환기터널을 꼭 만들어 놓는다. 모두 지상과 통하는 것으로 깊이가 80m이고 경사가 50도 정도다.

이 환기 터널은 전쟁이 나면 모두 차단해야 하는데 이 임무를 우리 부대가 담당했다. 우리 부대의 평상시 관리 임무는 기계조작으로 차단이 되는지, 밀폐가 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356일 매일 점검한다.
또한 평양지하철에는 ‘3방 설비’라는 것이 있는데 폐쇄된 지하철 내부로 들어가는 공기를 여과하는 시설을 말한다. 3방 설비라고 이름이 붙은 것은 전쟁 등의 유사시에 독가스나 핵오염, 방사선을 방어한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3방 설비는 락원역과 부흥역, 붉은별역에 하나씩 있다. 평양시 지하철은 X자형으로 되어 있는데 각 노선의 한쪽 끝 역에 하나씩 있다. 3방 설비가 있는 시설에는 국장의 명령과 승인이 없이는 들어가지 못한다.

나는 신병 교육을 3방시설이 있는 곳에서 받았다. 3방 설비가 있는 내부 공간은 너비 100m, 길이 200m, 높이 3m로 아주 큰 편이었다. 층막이 있고 그 위에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 자체가 공기 통로이다. 이곳에는 근무실이 따로 있고, 유사시 정찰병들이 방사선탄이 떨어졌다고 관측되면 분석실에서 분석한 후에 여과기를 가동한다.

또한 지하철에는 유사시에 사용하는 지하 발전소가 있다. 공병국이 건설했는데 위치는 정확히 모르고 1973년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3방 설비는 러시아 산으로 재래식이다. 새로운 설비를 도입하지 않고 계속해서 보수 정비해서 낡은 것을 사용하고 있다.

병원 시설은 지상에 있고 훈련을 할 때는 지하로 내려가서 한다. 훈련은 상반기와 하반기에 한다. 주민들을 대피시킨 후 3개의 방어문(방호문:防護門)을 닫는다. 3단계 방어문은 모두 폭풍을 방어하고 오염된 공기의 침투를 막는 것인데 첫 번째 방어문은 두께가 80cm이고, 두 번째는 50cm, 세 번째는 30cm 정도 된다. 첫 번째 방어문의 무게는 20톤 정도 된다. 콘크리트가 깨지는 일은 없는데 방호문이 철근 구조물이라 지하에 습기가 많아 1년 동안 녹이 2~3mm 정도 일어난다. 그것을 벗겨내기가 힘들다.

내가 있던 부대는 방어문을 관리했는데 지하철 관리의 기본은 3방 설비 관리다. 내가 복무한 3대 1소대(관리)는 부흥역부터 영광역까지 방호문을, 2소대는 봉화역부터 승리역까지 방호문을 책임졌고, 4관리소 3대 1소대가 통일역, 개선역, 2소대가 전우역하고 붉은별역을 관리했다. 전쟁이 나면 평양시민들은 지하철뿐만 아니라 산마다 파놓은 방공호에 대피하도록 하는데 대체로 지하철을 이용한다고 한다.

■평양 지하철 설비 노후화와 보수 문제

각 관리소의 지하철에 석수가 굉장히 많이 차는데 3관리(소대)와 4관리(소대)는 지하철에 스며들거나 고이는 물을 퍼내는 일을 담당한다. 석수량이 대단해서 기계를 24시간 가동하는데, 경우에 따라서 2시간 가동 후 30분 쉬는 자동화 체계를 갖춘 곳도 있다.

지하철 갱도(터널)에서 물길이 흐르면 모이는 곳이 있다. 거기에 펌프를 설치해서 물을 푸는데 대체로 방호문 쪽에서 많이 나온다. 아니면 한 개 갱(터널) 뽑을 때 많이 나오고 지하철 자체에서 생기는 것도 있다.

만약 물을 퍼내는 펌프가 고장이 나면 지하철이 잠기게 된다. 때문에 관리소 1개 역사에 2~3대의 양수기를 가동하고 비상시에 사용할 예비 펌프를 설치하고 있다. 양수기는 북한에서 만든 것으로 크지만 잠수 펌프는 그에 비해 작다.

또한 이따금씩 지하철 전기 공급에 문제가 생겨 불이 꺼질 때가 있다. 그러나 10초 만에 다시 켜진다. 전동차가 가다가도 실내등만 꺼지는 경우도 있다. 하루에 적게는 한 번, 많으면 세 번 정도 정전이 되는데 대체로 오후에 정전 현상이 많다.

때로는 정전으로 인해 30분간 운행이 중지된 적도 있었는데 1년에 15~20일 정도는 그런 상황이 발생한다. 특히 겨울에는 전기가 많이 부족해서 정전이 되는 현상이 집중적으로 일어난다. 2005년부터 지금까지 가장 많이 정전 된 때가 2007~2008년 사이였다.

통신은 유선망을 사용하고 각 관리소의 2대가 전문적으로 통신과 전기를 관리한다. 각 관리(소대) 근무실에 버튼식 전화기가 한 대 설치돼 있다. 2008년도 하반기에는 지하철에 카메라(CCTV)를 설치했다. 지하철 역전의 양 끝과 에스컬레이터 내려오는 계단에 한 개, 역사 동상 등에 설치했다. 한 개 지하철 역에 보통 5개 정도 된다. 카메라를 설치한 후 여성군인들과 잘 놀던 병사들이 곤란해 했다.

에스컬레이터는 모두 30년 이상 된 것들로 중국산이다. 봉화역 에스컬레이터는 북한산으로 아주 투박하다. 중국산은 처음 개통 할 때 설치된 것들로 시간이 지날수록 보수는 해야 하는데 자재가 비싸서 자체로 만들어보자고 해서 설치한 것이 봉화역에 있는 북한산 에스컬레이터이다.

영광역은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역 앞과 뒤에 두 개있다. 에스컬레이터 보수는 이번 달에는 붉은별역 한쪽(내려가거나 올라가거나 하는 한쪽) 에스컬레이터를 대보수했다고 하면 다음 달에는 영광역을 하는 식으로 순환식으로 한 달에 한 번씩 한다. 에스컬레이터 대보수는 낮에도 한다.

그러면 그날은 지하철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에스컬레이터를 보수하는 역에는 지하철 전동차가 서지 않고 지나가는 식으로 운영된다. 예를 들어 붉은별 역이 대보수에 들어간다고 하면 약 25일 동안은 운행을 안 한다.

전동차가 고장 나면 용성(평양시 용성구역 지명)에서 보수를 한다. 폐기할 것은 폐기하고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친다. 부품은 다 북한제이다. 아직도 운행 중인 평양 지하철 중에는 중국 전동차가 두 대가 있고 독일제 중고 전동차도 있다. 중국 전동차는 처음 들여올 때 김일성이 시운전에도 참여해서인지 아직도 남아있고 독일제 전동차는 70년대부터 계속 사용하고 있다.

각 역 역장실이 지령실, 종합실과 마찬가지 인데 이곳에 컴퓨터가 들어왔다. 그러나 컴퓨터로 하는 일은 지하철 내부에 설치한 카메라가 촬영하는 화면을 보는 것 외에는 별다른 용도는 없다.

북한에서 부흥역부터 영광역 까지가 외국인들 관광이 많이 진행되는 곳이다. 이곳 지상에 만수대 창작단이나 고려호텔(영광역 위) 등이 있고 영광역에는 외국인 전용 시설 건물도 있다. 때문에 평양시 지하철 중에서 제일 잘 관리되고 있는 역사가 바로 영광역과 부흥역이다. 이곳이 가장 화려하고 교통편도 좋다. 이 곳에 근무하는 여성도 예쁜 사람만 뽑는다. 외국인들에게는 다른 곳은 보여주지 않는다.

3. 평양 지하철 구조와 설비·보수

■평양 지하철 사건사고 외

2002년 여름, 건설역에 정차되어 있던 전동차에서 전기 합선으로 폭발사고가 있었다. 폭발로 큰 화재가 발생했고 사람들이 연기에 질식해 사망했다. 이 사건 이후에 전동차 마지막에는 감시를 담당하는 여성이 한명씩 탄다.

2007년에는 홍수로 지하철이 잠겨 약 보름동안 운행되지 못했다. 당시 건국역을 비롯해 대부분의 역전들이 물에 잠겼다. 지하철 내부의 설비 자체는 그 정도 양의 물을 감당 할 수 있는데, 평상시에 관리를 잘 안하니까 물이 많아지면서 입구로도 들어왔다. 사람들이 타는 곳과 지하철이 떨어져 있는데 그곳 까지 물이 찼다. 완전 잠기면 복구가 힘들다.

지하철 내 소매치기 등 범죄도 있다. 나와 같은 부대에서 복무했던 사람 중에 소매치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었다. 근무 나가고 올 때마다 전동차를 타니까 그럴 확률이 높았고 그때는 전동차에 카메라도 없었다. 후에 카메라를 설치했지만 밖에만 설치했다.

지하철 관리국 군인으로 근무하면서도 부수입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지하철 내부의 전기선(동선)을 잘라서 파는 것이 그렇다. 밤 근무를 설 때 지하철 내부에 설치된 동선을 자르는데 꽤 비싸게 판매된다. 지하철 내부에 배선된 전기선들은 모두 전기가 흐르는데 4선 중에서 영선(접지선)은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 이 영선을 잘라서 팔아 돈을 버는데 약 10~15m 정도 잘라서 피복은 벗겨 버리고 순수 동(구리)선을 잘라서 파는 것이다.

지하철에 5개 대대가 들어가 있는데 어느 대대에서 누가 잘라 팔아먹었는지를 알 수 없다. 이런 사건은 한 달에 한번 정도로 일어나는데 가장 많이 일어나는 역사는 부흥역, 혁신역 쪽이다.

지하철 근무 병사들은 다른 설비나 부속품도 팔아먹는데 지하철 내부의 비상용 잠수 펌프도 훔쳐 팔아먹는다. 군인들이 지상의 아파트 건설장에 동원 나갔을 때에는 철근, 시멘트, 자재 등 훔칠 수 있는 것은 다 훔친다.

지하철 내부에서 공사나 정비 등을 하다가 팔이 빠지거나 하는 등의 사고도 일어나고 그 중에 죽는 사람도 있다. 지하철 내부에서 1년에 약 5건 정도 사고가 일어난다. 지하철 이용 시민들이 사고 나는 일은 없다. 훈련 때마다 군인들이 점검하니까 그런 면은 괜찮은 편이다.

4. 기타

■김정은 외 고위층 관련

김정은 후계자에 대해서는 2008년 후반기부터 알았다. 2009년에 평양에서 축포축제를 조직한게 김정은이었다. 김정은이 김정일 아들이며 군부대 대장으로 있다는 말을 평양에 집을 두고 있는 분대장에게 들었다. 당시 나이가 몇 살인지는 모르고 어리다는 것은 알았다. 2009년에는 총정치국 부국장으로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북한에 있을 때는 김정은이 신병서부터 체계적으로 군사복무를 했고 모든 군사 과정을 밟았다고 들었다. 당시에는 정말 믿게끔 소문이 났었다.

2007년에 장성택 별장 문제가 제기되어 부대를 해산한 적이 있었다고 들었다. 장성택 별장 자체가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다는 소문이었다. 그래서 2007년 가을 그 부대를 해산시키고 다른 부대들에서 하전사들을 뽑아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2009년 대동강 과수농장 개간을 시작해 그해 가을에 과일을 먹게끔 하자는 방침이 있었다. 그때 장성택과 김정일이 함께 방문했고 사이가 좋아보였다.

내가 병원에 입원 했을 때 보안성 정치국 정치부 책임지도원과 같이 있었는데 그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장성택의 권력이 강해서 김정일이 견제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또한 김경희가 가계를 중시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장성택은 말하자면 남이다. 그래서 김정일보다 김경희가 장성택을 더 경계한다고 들었다.

장성택이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체제 자체를 크게 변화시킬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본다. 리영호도 무엇을 바꾸고 반대 한다기 보다 그 자리를 지키는 게 본인에게 더욱 이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평양시민들은 김정은에 대한 충성심이 여전하다고 본다. 다만 삶이 힘든 사람들은 먹고 사는 일에만 신경을 쓴다. 그냥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기타

평양시 군대를 제대하고 고향에 왔을 때 우리 집 앞 강 건너가 중국 장백이어서 중국 방송을 많이 봤다. 때문에 처음 한국 영화를 볼 때 별다른 것은 없었지만 다만 한국말이 어감이 좋다고 느꼈다. 내가 한국 영화를 처음 접한 것은 2005년에 해주에서였다.

아버지가 해주에서 돌아가셨는데 그때 아버지 곁에 있었다. 해주 배천 군곡리라는 곳은 서울 항공이 보이는 곳이다. 한 달 동안 있으면서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봤다. 군복무 당시 평양에 있을 때는 아는 형들과 외국영화를 봤다. 지상에 올라가면 영화 관람 시간이 있으니까 토요일 일요일은 만수대에서 영화를 봤다.

2003년부터 2005년 까지는 한국 드라마가 인기 있었다. 그러던 것이 2004년 11월부터 3달간 중앙당 과장급 이상에서 검열을 나왔다. 2003년도부터 중국에서 CD플레이어가 많이 들어왔다. 또 남한의 국정원에서 CD작업을 만들어 성공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렇게 대규모 국가적 검열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2,000명이 내려온다 했는데 범위가 작으니까 1,000명을 신의주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이런 검열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런 문제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한다.

국경지대는 그런 매체가 돌면 인심이 험해진다. 당시에는 걸리면 모두 교화소에 갔다. 2004년 이후 중국에서 CD(DVD) 플레이어가 정말 많이 넘어왔다. 친구들도 보면 웬만한 영화는 다 봤다. 당시 기차를 자주 탔는데 기차 승무원들도 영화 CD를 밀수하는데 한국영화의 경우 마진이 3배가 떨어진다고 했다.

평양을 검열한 일은 없었고 기본적으로 국경을 검열했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 친구들끼리는 ‘살기 좋다’ ‘발전되었다’고 이야기 하지만 겉으로는 한국을 대안으로 여기지 않는다. 친구들의 속생각은 모르겠다.
대학 다니는 학생들 사이에는 정보가 빨리 돈다. 다들 MP3 플레이어를 갖고 있다. 군대 때 나도 갖고 있었다.

지휘관들에게 들키면 조금 곤란하지만 회수당하는 것뿐이다. 소대장은 괜찮은데 소장이나 그 위까지만 아니면 괜찮다. 군인들 중 MP3 갖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내 친구는 MP3로 한국 노래를 많이 들었다. 그 친구 형님이 컴퓨터 센터에 있어서 한국 방송 라디오 주파수를 잘 잡아 생방송으로 나오는 노래를 따냈다고 했다.

사회주의체제를 떠난 이유는 그 체제 자체가 사람의 심리를 구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당이 결론을 내면 다른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은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수적인 충동으로 들고 일어나면 번지지 못하고 금방 진압된다. 나는 북한을 더욱 봉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 와서 느끼는 것은 한국 정부는 통일에 힘쓰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평화통일을 반대하는 정책으로 되어있다. 남한에 와서 보고 듣다보면 정치인들이 북한을 봉쇄하면 북한 주민들이 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북한주민들은 늘 힘들게 살아왔다. 전화 통화를 해보면 저기 사람들은 항상 검열 속에서 살고 매번 복잡하다. 언제 편안하게 산 적이 없다.

2006년에 대한민국 쌀 포대가 없어졌다. 대한민국 쌀 포대는 질이 좋기 때문에 그것을 쓰고 싶은 사람은 돈을 주고 사서 쓰거나 이어서 방수포로 만들곤 했다. 그런데 2006년부터는 민간인에게 나오는 것 자체가 없었다. 그 전에는 장마당에서 한국 호남쌀이라고 팔았었는데 그 자체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다. 6.18돌격대나 고속청년돌격대가 그 쌀을 먹었는데 그때부터 없어졌다. 단속 때문이 아니라 북한당국이 내부적으로 민간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막은 것으로 본다.

좀 더 봉쇄하고 지원을 안 하면 정권 자체가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게 된다. 국내에서 쌀이 많이 돌지 못하면 주민들이 사먹는 쌀 값이 비싸진다. 농사가 잘되면 국민들에게 그 생산물이 돌아와서 삶이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쌀이 국내 안에 있으니까 어찌됐든 간에 자연히 쌀값이 내려가니까 삶이 괜찮아지는 것이다. 북한에서 농사가 잘 된다고 했을 때 그 쌀이 인민들한테 분배되어서 괜찮아 지는 것이 아니다.

즉 외부에서 지원이 들어가면 인민 개개인에게 차려지는 것이 생겨서 삶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국내 쌀 값이 내려가니까 사먹기 괜찮아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조금만 막으면 비싼 것을 사먹게 되니까 반감이 생길 것이다. 국가는 뭐하는 것인가라는 반감 말이다. 북한 체제는 백성 하나하나를 책임져서 먹여 살리는 것이라고 하지만 평생을 복종해도 먹고 살기 힘들다면 조금씩 불만이 쌓이지 않겠나.

나는 노동자 가족이면 영원히 노동자로 살아야 하고 또 연좌제가 있는 사회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잘못을 해도 그것이 가정 전체로 확대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같은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인데 왜 이런 시스템으로 운영 되는가가 이상했다. 군대 있을 때는 군사복무 자체가 힘드니까 생각의 여지가 없었고, 공부 할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사회에 나와서 환경이 변화하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가정이 군대에서 사회로, 평양에서 지방으로 환경이 변해서 그런지 충격이 컸다. 내가 일생동안 이렇게 살아야 하나, 내가 날 위해서 일생동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남한에 와서 사무보조나 택배 등 많은 아르바이트를 해보았다. 사무직도 노가다도 해보았다.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열심히 살고 교만한 사람들은 교만하게 사는 것 같더라.

0 개의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