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8일 목요일

남쪽에서 ‘탈북자 수학선생님’으로 살아가기

한겨레 고등학교 강당에서 강연을 듣고 있는 탈북 학생들


저는 2006년부터 2014년 3월까지 한겨레고등학교 수학교사로 일했습니다. 한마디로 탈북자이면서 ‘선생님’으로 살아야 했던 날들을 보내왔습니다.

알려진 것처럼 한겨레고등중학교는 탈북청소년들을 위한 대안학교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 드린다면 탈북청소년들이 탈북과정에서 받은 심리적 상처를 치유하고 남한사회의 적응능력을 향상시킬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입니다.

그러므로 탈북청소년들이 북한을 떠나던 때부터, 장기간의 학습공백을 메우고 남한에서의 새로운 교육체제와 과정에 원만히 적응할 수 있도록 특성화된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 학교입니다.

학교에 처음 출근하던 날, 반신반의(半信半疑)한 눈길을 나를 바라보던 학생들의 초롱초롱한 눈빛과 마주했던 기억이 납니다.

탈북자가 탈북자를?! 하고 묻는 듯 한 학생들 앞에서 ‘나는, 너희들과 다른 탈북자’임을 은근히 내 비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학생들은 좀처럼 내 곁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았습니다. 나는 나대로 수업시간만 끝나면 ‘땡!’하고 학생들과 갈라서는 게 일이었고 ‘수업만 잘하면 되지 뭐’하고 마음을 정리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실무적인 날들이 늘어날수록, 교재와 칠판에 묻히면 묻힐수록 학생들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고 나 스스로가 탈북자가 아닌 듯 한 착각에 빠져버렸습니다.

학교의 위치도 도심과 멀리 떨어져 있던 터라 선배들과 동료 탈북자들을 만날 기회도 적었고, 막상 휴일만 되면 방안에 들어박혀 또 다른 교재에 파묻히곤 했습니다.

한겨레고등학교에서 탈북자출신 교사를 영입한 이유가 저들에게 자아(自我)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탈북청소년들이 남한 사회에 안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곤 했지만 그것은 그냥 학교 측에서 만들어낸 헌장쯤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감선생이 “김성열학생의 집에 무슨 일이 있는가?”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학생들의 사생활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살았던 터라 “잘 모르겠는데요”하고는 하던 일을 계속했었습니다.

이튿날 수업시간에 학생들의 출석을 체크하면서, 마침이다 싶어 성열이에게 물었습니다. “너 집에 무슨 일 있니?”.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던 성열이가 그러는 자신에게로 동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제법 큰 소리로 “없습니다.

아무 일도…”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튿날부터 성열이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한 달이 지나도록 보이질 않아 은근히 마음을 썼지만 (탈북자들이 다 그렇지 뭐, 공부하기 싫으면 그만 두는 거고…)하면서 그나마의 관심마저 매몰차게 끊어 버렸습니다.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어느 날, 00경찰서 형사라는 사람에게서 전화한통이 걸려왔습니다. 성열이의 담임선생님이 맞는 가고 하면서 경찰서로 좀 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학교도 그만 둔 앤데…별일이다고 생각하면서 경찰서를 찾아갔습니다.

구석 쪽 유치장에서 나를 본 성열이가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담당경찰에게 다가가 “성열이의 담임선생이다”고 자신을 소개한 나는 성열이가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던 가계에서 돈 11만원을 훔쳤고 그로 인해 지구대에 붙잡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와 토론해서 변상처리를 하겠다고 이야기 한 뒤, 성열이를 ‘인계’받았습니다. 그리고 도심 한복판에 우뚝 서서 따라설 염을 하지 않는 성열에게 물었습니다. “학교엔 왜 안 나왔니?”

“…”

“집에 무슨 일 있니?” …

어떤 질문에도 묵묵부답인 성열이에게 집으로 갈거냐 학교(합숙)로 갈거냐를 묻고는 “집으로 가겠다”는 그를 버스에 태워 보내주었습니다.

그때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한 탈북선배가 북에서부터 앓던 질병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마침 쉬는 날이어서 간만의 양복 차림에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딸애와 부인을 굶겨죽이고 남은 자식만은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북한을 탈출했고 이후엔 중국에서 6년여 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던 선배였습니다.

남편과 자식을 위해 자신은 늘 굶어 살았다는 부인을 못 잊어 하면서 재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식하나만을 키우며 살아온 선배의 이야기는 탈북자 사회에서도 꽤 회자되고 있던 터라 조문객도 제법 있었던 장례식장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다소 마음을 놓고 예식장을 나서려는데 “감사합니다. 선생님”하며 고개를 숙이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참, 선배에게 아들이 있었다고 했지…하면서 어린 나이에 상복차림을 한 선배의 아들을 껴안아주려던 순간, 제 눈을 의심하며 나는 굳어져 버렸고, 내 앞에 섰던 그 애, 성열이는 성생니~임~하며 저에게 매달려 꺼이 꺼이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럼 네가 남일 형 아들이구나…”

“…”

“이 녀석, 그럼 그렇다고 말을 좀 하지”

 “… …”

말수 적은 탈북청소년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말이 없던 성열이는 그날 밤, 장례식장에 퍼더버리고 앉은 나에게 아빠에 대해서, 그리고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이야기들을 끝도 없이 들려주었습니다.

“미안하다, 성열아. 선생이 돼 가지고 선배의 아들도 몰라본 나를 용서해라. 그리고…내가 이젠 네 삼촌이 되 줄 테니까…장례가 끝나는 대로 학교에 가자꾸나”

그렇게 나는 성열이의 삼촌이 되었고 이후로는 학생들의 형님이 되고 친구가 되기 위해 각방으로 노력했습니다.

말처럼 쉽지는 않았지만 ‘나도 탈북자’임을 숨기지 않았고 ‘나도 탈북자여서 너희들과 어울리고 싶다’고 먼저 손을 내 밀었으며 탈북자가 결코 남한 사회의 이방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늘 노력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어울렸던 성열이와 ‘친구’들이 지금은 모두 졸업을 하고 대학생이 되었거나 이곳 남한사회의 일원이 되어 ‘탈북자’가 아닌 ‘우리’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등학교생활을 통해 정체성 확립과 자존감 향상, 건강한 민주시민의 기초를 쌓았고 자존감으로 충만 된 새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그런 제자들이 찾아와 스승의 날을 기념해 주었습니다.

스승의 날, 밤새 애들과 어울리다가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하는 저에게 성열이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왜 그렇게 사랑하시던 학교를 그만 두었나요? 무슨 일이 있나요?”

그러는 성열이와 또 다른 성열이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수학만 가르치는 선생님인 것 같아 늘 미안했단다”

“아니, 아니, 수학선생님이 수학만 가르치면 되는 거지. 뭘 더 가르친다는 거예요?! 살아가는 법?! 돈 버는 법?!”

지금도 귓가에 쟁쟁히 들려오는 그 애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저는 오늘도 수학외의 ‘문제’들을 풀어가고 있고 삶의 새로운 학교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0 개의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