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3일 금요일

과학과 종교의 충돌

과학과 종교의 충돌 

Sam Harris 의 <Letter to a Christian Nation>에서

과학과 종교의 충돌에 대하여 과학자들이 정직하게 이야기 하는 게 도덕적으로 필요한 때이지만 국립과학아카데미(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 마저 도 다음과 같이 거짓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종교들과 진화론 사이의 분명한 충돌의 뿌리는 지식에 이르는 종교적인 방법과 과학적인 방법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을 오해한 데 있다. 종교와 과학은 세상에 관한 다른 문제들에 대해 대답한다. 우주에 어떤 목적이 있느냐 또는 인간실존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들은 과학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지식에 대한 종교적인 방법과 과학적인 방법들이 나름대로 역할을 하여왔고 계속해서 인류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 . . 과학은 자연세계를 아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것은 자연적인 요인들로 자연세계를 설명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과학은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하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느냐 않느냐는 문제는 과학이 중립을 지켜야 할 문제이다.

이 성명은 놀랄 정도로 정직성을 결여하고 있다. 물론 과학자들은 공공기관의 연구비 지원이 끊어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고 그래서 국립과학아카데미가 납세자들의 감정을 거슬리지 않는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진실은 종교와 과학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학의 성공은 종종 종교적인 교리를 대가로 지불하고서야 가능하였다. 그리고 종교적인 교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항상 과학을 희생하고서야 가능했다. 우리의 종교들은 단순히 “인간 실존의 목적”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다. 과학과 마찬가지로 모든 종교는 이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하여 나름대로 특별한 주장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들이 사실인양 행세한다. 말하자면 우주의 창조자는 당신의 기도를 들을 수 있다(때로는 대답하기도 하고). 수태하는 순간 영혼이 그 접합체에 들어간다. 하나님을 바로 믿지 못하면 죽은 후에 엄청난 고통을 당할 것이다라는 주장 같은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본질적으로 과학의 주장과는 충돌되는 것으로 그것들은 형편없는 증거물에 근거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좀더 광의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과학’(science라는 말은 라틴어 scire (안다, to know)란 말에서 온 것인데)이란 우리들의 세계에 대한 진실이 무엇인가를 알려는 우리들의 최선의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hard’와 ‘soft’ science를 구분할 필요가 없으며 과학과 역사와 같은 인문학의 분야들과 구별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면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 결과 이 사실은 과학적으로 합리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게 된다. 이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 다른 날짜에 일어났다든가 실제로는 에집트 사람들이 폭격을 했다고 주장하려면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과학의 핵심은 실험이나 수학적 모델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의 핵심은 지적인 정직성이다. 지금은 우리들이 인간 선언의 기본적인 모습을 인정하는 때이다. 제안의 사실여부를 생각할 때 사람들은 증거물들을 정직하게 심사하고 논리적인 논의를 하거나 아니면 그런 과정을 때려치운다. 종교는 사람들이 다른 기준의 지적 정직성이 적용된다고 상상하는 우리들의 삶의 한 영역이다.

연옥에 관한 최근 카톨릭 교회의 생각을 한번 살펴보자. 세계의 최고 신학자 30여명이 최근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아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것이냐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바티칸에 모였었다. 중세기 이후 카톨릭 교회는 그러한 아기들은 연옥에 가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명명한 ‘자연적인 행복’의 상태에서 영원히 즐길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그러한 불행한 아기들의 영혼은 지옥에서 영원히 보내야만 된다고 믿었든 성 아우그스틴의 생각과는 대립되는 것이다.

연옥이란 성서에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고 공식적인 교회 교리에도 나오지 않는것 이지만 수 세기 동안 카톨릭 전통의 한 주요부분으로 전해왔다. 1903년 교황 피오 10세는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들은 연옥으로 간다. 거기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즐길 수 없지만 그들은 고통도 받지 않는다’고 했을 때 연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듯 했다. 이제 카톨릭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들이 연옥문제를 재고하기 위하여 다시 모였다(이 회의에서 카톨릭 교리에서 연옥을 삭제하기로 결정하였다-역자 주)

이보다 더 지적으로 삭막한 프로젝트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토의가 어떠했을가를 상상해 보라. 과연 어떤 사람이 세레 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의 영원한 운명을 보여주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까? 어떻게 소위 교육받았다는 사람들이 이런 논의들은 황당한 것이고 무시무시한 무의식적인 시간의 낭비라고 생각지 않을 수 있는가?

과학과 종교의 충돌은 사람들의 인정과 토의라는 간단한 사실을 통해 줄어들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어떤 것을 믿는다고 할 때 거기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탄생했다던가 모하메드가 날개 달린 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던가 하는 것을 믿을만한 그럴듯한 이유들이 있다면 그런 믿음들은 반드시 우주에 대한 우리들의 합리적인 묘사의 한 부분을 형성할 것이다. 어떤 역사적 사건의 특수한 문제들을 ‘신앙’에 의존해서 판단한다는 것을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한다. 그것은 성서와 코란이 어떻게 만들어졌느냐 하는 문제나 예수 부활, 모하메드의 천사장 가브리엘과의 대화 또는 다른 종교적인 교리에까지도 개화가 가능한 것이다. 신앙이란 종교적인 사람들이 이성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할 때 서로 신앙을 계속 간직할 수 있도록 면허증을 주려는 노력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들이 다른 생활영역에서 증거도 없이 강력하게 믿는다는 것은 미친 짓이거나 바보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직도 우리사회에서 매우 영예스러운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종교는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확실한 듯이 가정하는 것을 고결하게 생각하는 논의의 영역 가운데 하나이다. 이 고결한 후광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따르는 신앙에만 빛을 발하는 것이다. 오늘날 비록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이라도 포세이돈 신을 경배한다면 누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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