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2일 월요일

‘아버지’의 이름으로 땀 흘리는 탈북 남성




매일매일 성실하게 일하기에 더 나은 내일을 꿈꾼다는 이석철 씨. 지난 2007년 2월 홀로 두만강을 건너 그해 12월 한국 땅을 밟은 그는 이제 어엿한 가장이자, 중장비업체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꿈을 위해 오늘도 값진 땀을 흘리는 그를 만났다.

얼어붙은 두만강을 걸어서 넘다

이석철 씨는 강원도 춘천에서 한 중장비업체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햇볕에 검게 그을린 얼굴이 그가 얼마나 뜨거운 여름을 보냈는지 짐작하게 한다.

한번 중장비를 몰고 건설현장에 나가면 보통 12시간은 쉬지 않고 일하는 일상이지만, 어엿한 직장인으로 또 한 가정의 가장으로 제 몫을 다하고 있기에 힘든 지도 모른단다.

“지난 2007년 2월 혼자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한 겨울이었지만 북한에 남은 다른 가족들에 대한 염려와 경비대에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추운 줄도 몰랐어요.”

혹독한 추위 속에서, 그보다 더한 두려움을 안고도 그가 탈북을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북한에서 14년을 함께한 아내 이야기를 꺼냈다.

“2006년 9월 아내를 잃었습니다. 아내가 자궁경부암을 진단받아서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어요. 그런데 재발을 했고 다시 병원에 가니 아내를 수술한 의사는 이미 은퇴를 했더라고요.

북한은 의사가 집에서 몰래 환자를 보기도 합니다. 저도 아내를 처음 수술했던 의사를 찾아가서 아내를 진료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담당구역 경찰이 이를 알게 되어서 아내는 강제로 병원에 입원하게 됐어요.

병원에선 제대로 된 치료를 못 받을 게 뻔해서 불법이지만 따로 의사를 찾은 거 였는데, 그 경찰은 제가 사정하면서 건넨 돈만 받고 아내를 병원으로 보내버렸죠.

결국 아내는 변변한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한지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게 너무 원통하고 슬펐어요. 남한에 가서 이 억울함을 풀고 싶었습니다.”

이석철 씨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 석달 반을 은신했다. 그러다 몽골로 넘어가서 탈북자관할구역에 들어가 약 6개월간 숨어 있었다.

몽골에 있을 땐 북한군이 기습공격을 해 탈북자를 몰래 데려간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과연 내가 무사히 남한으로 갈 수 있을까?’ 매일 두려움에 떨면서도 남한에 가서 억울함을 풀고 다시 새롭게 살아보고 싶다는 희망으로 버텼다.

남한에서 맞닥뜨린 어려움

그렇게 2007년 12월 무사히 남한으로 들어온 이석철 씨는 2008년 3월 하나원을 수료하며 남한 생활을 시작했다.

“하나원 수료 후 6일 만에 수원의 한 주유소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북한에 아들이 남아 있었기에 빨리 정착해 아들을 데려와야 한다는 마음뿐이 었죠. 그런데 그 주유소가 4대보험이 안 되는 곳이라 그만두고 중국집 배달부로 취직했습니다.

하지만 두달 만에 배달 중에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6개월 동안 팔에 깁스를 하고 병원치료를 받았어요. 정말 마음이 답답했죠. 그러던 중 다른 북한이탈주민이 운영하는 구미의 한 회사를 소개받게 됐어요.

팔에 깁스를 한 채 구미로 내려갔습니다. 압축공장 현장직원으로 정말 부지런히 일을 했죠.”

다시 일어서겠다는 마음으로 구미에 내려간 이석철 씨에게 또 다른 어려움이 찾아왔다. 당시 남한의 교통법규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는 음주운전과 무면허운전 등으로 적발돼 벌금 600만 원을 물어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너무 큰 액수 앞에서 그는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까란 생각까지 했다. 월북을 위해 중국에 가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의 환경이 얼마나 척박하고 혹독한지 생각했고, 남한에 얼마나 힘들게 넘어왔는지를 떠올렸다.

그는 다시 남한으로 돌아와 벌금을 내고 면허도 다시 취득했다.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지며 마치 새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는 이석철 씨. 마음을 다잡은 그에게 소중한 인연도 찾아왔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위해서

이석철 씨는 현재 춘천에서 아내와 세 돌을 갓 넘긴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진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 애틋하고 소중한 가족이다.

“아내도 구미에서 일했는데 출산을 앞두고 아내 집이 있는 춘천으로 올라왔어요. 그때 저도 구미의 공장을 그만두고 같이 춘천으로 올라왔습니다.

올라온 다음 날부터 동네의 벼룩시장 등을 보면서 취직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러다 지금 다니는 중장비업체에 취직을 하게 됐죠. 여기서 일하면서 중장비자격증도 땄습니다.

제가 구미에 있을 때 압축기와 지게차 등 중장비를 몰아봤거든요. 그때 틈틈이 독학을 했는데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몰랐어요.”

2010년엔 북한에 남아있던 아들도 데려왔다. 지금은 경기도 이천에서 일하며 제 앞가림을 하고 있으니 든든하기만 하다는 이석철 씨. 아내와 두 아들을 생각하면 오늘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고 한다.



“탈북해서 남한에 정착하기까지, 여러 유혹이 있었어요. 탈북자들 사이에 타국에 가면 일 안하고도 쉽게 산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많이 돌았죠.

하지만 일 안하고도 먹고 살수 있다는 건 정말 거짓말입니다. 그런 이야기에 흔들리지 마세요. 정말 시간낭비입니다. 그럴 시간에 하나센터에 가서 상담을 받고 적극적으로 직장을 찾는 게 낫습니다. 죽을 각오로 힘들게 탈북했는데 헛된 이야기에 넘어가면 얼마나 허탈한가요.”

그는 ‘하나센터는 바로 우리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곳’이라 강조한다. 모든 것이 다 마음에 찬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생활부터 취업까지, 의지가 되는 유일한 곳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노력이 열매’란 마음으로 새 꿈을 꾼다

이석철 씨에겐 두가지 꿈이 있다. 하나는 결혼식을 올려 아내에게 예쁜 드레스를 입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언젠가 중장비업체를 직접 운영하고 싶다는 것이다. 아직 여러모로 준비할 게 많지만 그런 꿈을 품고 있다는 것 자체가 삶의 희망이 된다고 말한다.

“남한에선 내가 노력하면 그만큼 성과가 돌아옵니다. 누구 눈치 볼 필요가 없어요. 제가 중장비 쪽 일을 하게 된 건 우연이었지만, 정말 나만의 기술을 가지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다른 탈북자분들에게도, 특히 남성이라면 먼저 기술을 익혀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또 사람은 다 마음먹기 나름이에요. 다른 탈북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직장을 구할 때 탈북자라고 하면 사람을 깔보고 월급도 적게 준다며 억울해야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전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탈북자가 일을 쉽게 그만둔다는 이미지가 있으니 고용주 입장에서 불안할 수 있죠. 처음에 좀 억울하더라도 내가 성실하고 인정받으면 결국 다 대우를 해줍니다.”



 ‘노력이 열매’라 말하며 환하게 웃는 이석철 씨. 북한에서 배 3척을 가진 선주로 살았던 그는 남한에 와서 중장비업체의 직원이 됐다. 처음 남한에 왔을 때 80kg였던 그는 16kg가 빠져 지금은 64kg이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쉽게 산 거 같지만 나름대로는 죽도록 버텼습니다. 아내와 두 아들이 있는 데 제가 힘이 빠지면 안 되죠. 다른 길을 기웃대거나 방황할 시간도 없습니다. 북한에 아직 형제자매가 남아 있어요. 부모님 임종도 못 지킨 아들이라 늘 마음이 아프지만 어떻게든 다른 가족을 도와야 해요.”

명절이 돌아오면 돌아가신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더욱 그립다고 말하는 이석철 씨. 북한에서도 명절엔 온 가족이 모여 조상의 묘를 찾아가 인사하고 음식을 나눠 먹었다. 이제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석철 씨의 그리움이 더욱 짙어지는 건 당연하다.

“명절이 되면 마음이 더 애틋해집니다. 올 추석엔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토란국을 먹을 예정이에요. 언젠가는 그리운 가족들도 만날 수 있겠죠.”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그리고 소중한 꿈을 위해 이석철 씨는 오늘도 값진 땀을 흘린다. 언젠가는 모두가 함께 진정한 행복을 누리길 간절히 소망하면서.

0 개의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