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31일 토요일

불쌍한 어머님

이광호/탈북자동지회

저의 어머님의 고향은 남한의 경상북도 입니다.

해방 전부터 가난을 그림자처럼 달고 다녔던 저의 어머님은 가난의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해 6.25전쟁 때 북한 의용군에 입대하여 이북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인민군 장교였던 아버지와 결혼해 저희 3남2녀를 낳아 키우셨습니다.

어머님께서 이북에 보금자리를 튼 내 고향은 함경북도 김책시(옛 성진시) 쌍암동 대동골이라는 작은 시내가 흐르고 쌍포포구가 그리 멀지 않은 자그마한 마을이었습니다.

북한을 떠난 지 30년 가까이 되지만 지금도 고향의 아련한 추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한여름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방학이 되면 친구들과 방학숙제를 대충 해놓곤 곧바로 쌍바위가 오뚝 서있는 도래굽이 해수욕장에서 해지는 줄 모르고 물놀이에 정신이 팔리곤 하였습니다.

지금도 아련한 그때의 추억을 잊을 수 없는 건 해수욕장에 인접한 포구에 가끔씩 돛단 고깃배가 닻을 내리고 성게 해삼을 비롯한 진귀한 어물을 부릴 때면 일시에 애들이 모여 저마다 시루속의 콩나물처럼 머리를 빼들고 구경하던 웃지 못 할 그 모습입니다.

그 통에도 햇볕과 해풍에 가맣게 그을린 애들이 빼곡히 서있는 사람들 다리 사이로 꼬물거리는 해산물을 날쌔게 가로채 해수욕장 저편으로 줄행랑을 놓으면 그 뒤를 따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쫓아가는 어부들의 모습에 백사장에 몸을 지져대던 어른들까지도 키득키득 웃음을 참지 못하던 그 광경, 이것이 아마도 1960년대 후반, 인정과 인간의 묘연한 정서가 함께 어우러졌던 아련한 고향의 추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10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고향을 찾았을 때에는 아늑한 보금자리로만 간직되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성진 고갯마루까지 다닥다닥 들어선 초라한 양철집들과 그 사이로 악취를 풍기며 흐르는 생활오수가 대동천의 작은 개울을 오물장으로 만들어 버렸더군요.

특히 아침 출근길은 더욱 가관이었습니다. 이곳 한국의 출근길 교통체증인양 고향마을의 동구길은 출근길을 서두르는 사람들이 뒤엉켜 마치 물목에 갇힌 미꾸라지 떼를 방불케 했습니다. 여름철에는 장마로 하천이 불어나 초라한 복토길이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사람들은 산등성이를 에돌아 길 아닌 길로 등하교와 출퇴근을 하군 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성진 내화물공장에서 나오는 유해가스로 주변 산의 목초는 가을단풍처럼 발갛게 타죽고 살아있는 나무마저도 땔거리가 없는 사람들이 난벌하여 이미 산은 벌거숭이가 된지 오랬습니다. 하기야 산이 공해에 타죽고 있는데 그 밑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의 건강은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티 없이 맑고 깨끗했던 도래굽이 해수욕장도 여과하지 않는 성진제강소의 산업폐기물과 생활오수로 급속히 썩어갔습니다. 아름답던 내 고향은 이렇게 40여 년 전부터 죽음도시, 죽음의 바다로 파멸돼 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처절하게 파멸돼 가는 북한의 실상 때문이었을까요?

그처럼 건강하시던 어머니도 향년 54세를 넘기지 못하시고 근무현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1986년 3월 18일, 어머님이 떠나신 그날은 겨울을 마감 짓는 예년에 보기 드문 함박눈이 내려 온 강산에 하얀 이불을 깔아놓은 듯 했습니다.

그 밤에 누가 보기나 합니까? 누가 어머니의 충성심을 평가라도 해줍니까?

쇠뇌 된 충성심은 어머님을 그날 밤 늦게까지 제강소 구내에 군왕처럼 자리 잡은 김일성 현지지도 사적비 주변의 눈을 말끔히 치우게 했고 잠시 몰려오는 피곤을 피하려 휴게실에 들어오셨던 어머니는 결국 뇌출혈로 영원히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1986년이면 그래도 배급이 정상적으로 공급되고 사람살기가 지금보다 훨씬 낫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다 우리 집은 두 동생이 군대에 나가고 누이동생도 다 시집가고 아버님도 외국에 기술대표단으로 나갔다 오시군 해서 부모님 내외가 생활하시기 에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습니다.

급작스런 비보를 접하고 아버님 집으로 달려간 우리내외가 어머님을 맞을 준비와 조문객 받을 준비를 분주히 서두르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밥공기를 들고 오열합니다.

아내가 들고 있는 밥공기에는 전날 어머니가 드셨던 밥이 남아있었는데 그것은 쌀이 한 알도 섞이지 않은 노란 강냉이밥 한 숟가락이 전부였습니다. 자식들이 뒷바라지에 온갖 심혈을 기울여 오신 어머님께서는 이렇게 뒤에 돌아앉아서는 자식들 몰래 굳은 음식만 드셨던 것입니다.

더욱 원통한 것은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도 당신의 노력으로 당원이 되고 파견간부가 되고, 어엿한 5남매의 어머니로 성장하였는데 이것마저도 ‘수령님’은덕으로 돌리며 우리 자식들 보고 수령님께 끝까지 충성 다하라고 항상 당부의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용광로 쇳물보다도 더 뜨거운 열정과 태산보다 더 높은 어머님과 같은 쇠뇌 된 충성심이 조선로동당을 받들고 있었기에 북한의 일당 독재체제가 아무런 거리낌도 3대를 세습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일생을 충성심 하나로 김정일 체제를 받들어온 어머님이시건만 남기신 것은 싸늘한 시신과 입쌀 한 알 섞이지 않은 강냉이밥 한 숟가락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굶어죽는 사람의 시체가 버려진 장작처럼 길가를 메우던 1990년대 ‘고난의 행군’시기에 비하면 어머님의 돌아갈 당시는 그나마 강냉이밥이라도 먹을 수 있어 행운 이였습니다.

식량 기근과 함께 시작된 제1차 ‘고난의 행군’시기에는 내 고향 김책에서도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얼어 죽었으며 심지어 가족단위로 무리죽음을 당한 사람이 그 얼마인지 모릅니다.

당시 북한에서는 불과 3년도 안 되는 사이에 300만의 무고한 주민들이 무참히 굶어죽었습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희생된 인명과 거의 맞먹는 수자입니다. 군대로 말하면 300개 사단의 유색역량이 굶어 죽은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인류역사에 언제 이런 비참한 역사가 기록된 적이 있습니까?
이는 전대미문의 역사에 찾아볼 수 없는 오직 김정일 살인악마만이 저지를 수 있는 살육행위입니다.

……

가난의 멍에를 벗어 보려고 ‘장군님’의 품을 찾아 3천리 북행길에 올랐던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그 아들이 6만 리 노정을 에돌아 어머님의 고향마을을 처음으로 찾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16여 년 전인 1996년 봄이었습니다.

어머님을 낯선 이북땅 이름 없는 산언덕위에 모셔놓고 어머님의 영전도 없이 난생처음 외가집을 찾았을 때 저를 맞아주신 분은 90고령의 외할머님이시였습니다.

어머님을 김일성에게 빼앗기고 90평생 동안 딸을 기다리며 동구길을 지켜 오신 외할머님이시였건만 그 딸은 보이지 않고 얼굴도 모르는 40대 장정이 찾아왔으니 외할머님의 심정이 어떠하셨겠습니까?

“이 녀석아! 네 어미는 어디에다 팽개치고 너만 이렇게 혼자 온단 말이냐?”

밭고랑처럼 움푹 패인 양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흘리시며 외할머님께서는 50여 년 전에 헤어졌던 딸을 만난 것처럼 마지막 힘을 다해 저를 꼭 껴안아 주십니다.
그리고는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사랑하는 딸, 나의 어머니를 따라 하늘나라로 떠나셨지요.
저 들녘에서 바람에 실려 물씬 풍겨오는 신록의 봄향기가 시골마을을 가득 메워도 이제는 어머님의 고향마을을 찾아도 나를 다시 감싸줄 외할머님의 왜소한 품도 없습니다.

그러나 꿈에도 못 잊어 하시던 외할머님과 두고 온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낯설고 물설은 이름 없는 북녘의 산등성이에 누워계실 어머님, 그리고 김정일 압제 속에서 굶어죽은 300만의 무고한 주민들과 그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다 무참히 희생된 탈북자들에 비하면 저는 지금 너무도 행복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부강한 대한민국에서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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