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2일 월요일

오갈데 없던 탈북여성이 남한 와서 사장이 되기까지




40년 만에 알게 된 세상

“호기심이었어요.”

어떻게 해서 북한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이영희 대표는 담담히 말문을 열었다.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 여태껏 모르고 살던 세계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궁금증으로 그녀는 탈북을 계획했다.

“그때 중국으로 오가던 사람들은 돈이든 물건이든 꼭 하나씩 손에 쥐고 돌아왔어요. 그래서 나도 한번 가보자 했죠. 잠깐 갔다 올 생각이었어요. 근데 그게 이렇게 길어질 줄 그때는 몰랐어요.”

1999년, 당시 마흔한 살의 이 대표는 친척을 따라 압록강을 건넜다. 경찰들의 단속이 허술하던 때였다. 사람들 틈에 섞여 한겨울의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그렇게 걸어 나왔다.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중국 연길이었다. 이 대표가 따라나섰던 친척은 삼촌 집을 소개시켜주며, 잠시 일을 보고 올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그곳에서 접하게 된 세상은 이전까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TV를 통해 본 남한은 북한과 비교도 안 되게 잘 사는 나라였다. 사십 평생을 북한이 최고인 줄 알고 살던 이 대표에게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남한과 북한의 차이, 북한의 실체를 하나씩 알게 됐어요. 그동안 속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 거지요. 사람의 본성이 자유를 갈망하는 거 아닌가요.

억눌려 살았다는 걸 알게 되니 반감이 들었어요. 그렇게 생각이 바뀌니까 하나라도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어요. 남편과 애들을 두고 왔으니 그래도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생각이 바뀐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됐다는 것이었다. 금방 데리러 오겠다던 친척은 끝내 오지 않았고, 중국말을 모르는 이 대표 혼자서는 북한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도 없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됐어요. 어떡하나 하고 있는데 북에 드나드는 사람들 말로는 지금 들어갔다간 감옥에 다 끌려간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는 겁이 나서 갈 생각을 못했어요.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다보니까 결국 눌러앉게 됐지요.”

소개받은 집에서 머무는 동안 교회를 다니게 됐다. 남한에서 파견 온 목사님과 전도사님들을 통해 성경 공부를 하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북에서 넘어온 어느 부부와 아기 엄마, 할머니, 청년들과 함께 숙소에 머물며 신앙생활에 빠져들었다.

“먹는 것, 자는 것 다 해결해주면서 공부만 하라고 했어요. 왜 이 사람들이 아무 대가도 없이 우리한테 이렇게 헌신할까 궁금했어요. 나도 선교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 사이에 식구들을 데려오려는 시도를 몇 번 했지만 다 실패했고, 결국 목사님이 인도하는 대로 혼자 남한에 오게 됐어요.”

무일푼에서 회사 대표가 되기까지

2002년, 서울 잠실에 정착했다. 신앙생활을 하며 시간이 흘렀다. 5년 동안 정부에서 지급되던 정착지원금이 끊기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해진 것이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교회 안에만 있다 보니 북한이탈주민 세계와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는 깨달음이 든 것도 그 즈음이었다.

2007년, 친구의 소개로 탈북여성인권연대 활동을 시작했다. 그것이 세상 밖으로 첫 발을 내딛은 시발점이 되었다.

“탈북여성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하는데, 고민이 다들 취업이에요. 일을 하긴 해야 되는데 어딜 들어가야 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시작해야 될 지도 모르겠다는 거지요. 남한 사람들하고 같이 어울려 일하는 것에 자신감도 없고요.

막상 직장에 들어갔다가도 북한이탈주민인 게 드러나면 냉대를 받는 것도 견디기 힘들어했어요. 그래서 우리끼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게 됐어요.”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안정된 일자리를 찾다가 지인을 통해 박스 만드는 공장을 소개받았다. 이 정도 일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겠다 싶었다.

5개월가량 공장을 다니며 열심히 일을 배웠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경험을 쌓다 보니 자신감도 생겼다.

“뭔가 본격적으로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사람들하고 양천구청을 찾아가서 우리가 이렇게 준비했는데 일할 공간을 마련해줄 수 있느냐고 했어요. 그랬더니 감사하게도 한지공예사업단을 만들어줬어요. 거기서 일을 하기 시작했고, 그게 계기가 돼서 사업을 구상하게 됐어요.”

성실성과 추진력을 눈여겨본 탈북여성인권연대의 강수진 대표가 샘플북 기획실을 연결시켜주었다. 커튼 등의 인테리어 건자재를 견본책자로 만드는 일이었다.

기획과 디자인, 인쇄는 기획실에서 하고 생산만 외주로 맡으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2011년 6월 29일 에덴데코를 설립했다. 그러나 말이 사업이지 처음부터 번 듯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1년 동안은 변변한 작업장도 없었어요. 남의 사무실 바닥에서 셋방살이로 일을 시작했지요. 그러다가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에서 시행하는 사회적 기업 컨소시엄 설립지원을 받게 됐어요. 지원재단의 도움으로 공장도 구하고 기계 설비도 마련해서 그때부터 정식으로 일을 할 수 있었어요.”

‘나보다 우리’라는 새로운 꿈

에덴데코는 설립 첫해에 1,200만 원의 손실을 겪었다. 그리고 이듬해 2,400만 원의 순이익을 거뒀다. 적자를 메우고 남은 돈으로는 벽지 샘플북을 작업할 프린터 두 대를 장만했다.

이 대표는 조금씩 여유가 생기는 만큼 설비를 확충하고 있다. 설비가 부족하면 외주를 맡겨야 하는데, 시설이 받쳐주는 만큼 고스란히 매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샘플북 자체가 경쟁시장이 좁기 때문에 유리 한 면이 있고, 인쇄 외의 모든 제작 공정을 맡기 때문에 재정적으로도 높은 이득을 얻는다.

최근에는 모 홈쇼핑에서 판매하는 어린이 교구를 만들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회사가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은 이 대표에게 있어 최고의 동력이 된다.

그러나 사업이 나날이 승승장구하는 이 대표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직원들이 얼마나 합심하느냐가 일의 결과를 좌우하기에, 일보다 사람 관리가 훨씬 더 어려운 문제였던 것이다.

“탈북여성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자는 취지였기 때문에 설립 초기에는 전부 북한이탈주민을 고용했어요. 그런데 사업이 불안정한 초반에는 급여를 제대로 못 줘서 그만두는 직원들이 많았어요.

너무 미안했고 그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됐지만, 사람들이 계속 들락날락하니 공장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이 컸죠. 육체적으로 힘든 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는데, 사람 문제로 마음을 쓰는 건 정말 힘들어요.”

현재는 탈북여성 4명과 남한여성 2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 같이 어울려 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적응할 수 있는 이점도 크다. 일일이 사람 손을 거쳐야 하는 작업의 특성상, 섬세하고 꼼꼼한 여자들이 더 적합한 것도 남자직원 없이 꾸려나갈 수 있는 요인이다.

“직원들한테는 늘 미안해요. 시작 단계다 보니 월급을 많이는 못 주고 있어요. 하루라도 빨리 급여를 올려주고 싶은 마음이에요. 무엇보다 직원들이 만족하는 회사가 됐으면 해요. 최고의 작업 환경은 아니지만 기분 좋게 일할 수 있는 곳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내가 이 회사 다니길 잘했다는 자부심이 생기게요.”

직원들에게 이로운 회사, 나아가 사회에 이로운 회사를 만드는 것이 이 대표의 꿈이다. 에덴데코는 수입의 30%를 사회에 환원하는 사회적기업으로, 단순히 이익을 내기 위한 회사가 아니라 더불어 잘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공익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에덴데코가 사회적기업이긴 하지만 아직은 우리 밥벌이나 하는 정도예요. 조금 더 여건이 갖춰지면 사회서비스형 사회적기업으로 키워보고 싶어요. 일을 통해서 어떻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탐스 슈즈라고 일대일 기부를 하는 기업처럼 말이죠.

그 회사는 소비자가 신발 한 켤레를 사면 가난한 나라의 아이에게 한 켤레를 보내주잖아요. 그런 기업처럼 개인의 욕심이나 사심 없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회사를 키워나가고 싶어요.”

스스로를 믿고 당당히 맞서라

남한 사회에서 기반을 잡기까지 십여 년의 세월이 걸린 이 대표는 탈북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다. 특히 처음 서울에 정착해 5년간 오로지 교회에만 파묻혀 살았던 때를 시행착오의 과정이라고 돌이킨다.

“왜 좀 더 일찍 사회로 나오지 못했나 싶어요. 그때 허비한 시간이 참 아깝죠. 막연한 두려움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안타까워요. 비슷한 처지의 탈북자들끼리 어울려 지내면 그 안에서 위로는 받을 수 있겠지만, 그럴수록 세상하고는 더 멀어져요.

조금씩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오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하다못해 혼자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돌아다니면서 익숙해지는 연습을 해야 해요. 그렇게 사회에 적응하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그런 과정을 거쳐 이제는 어엿한 기업가로 자리매김한 이 대표는 자신처럼 창업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수없이 발생하는 변수와 위기 상황에서 자신감마저 없다면 한순간의 좌절이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사업을 하다 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하게 돼요. 그런데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자신이 없으면 그 사람들한테 휘둘릴 수밖에 없어요. 그러지 않으려면 누구보다 일을 잘 알고 있어야 해요.

내가 아는 것보다 상대방이 아는 게 더 많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준비가 필요한 거예요. 욕심을 버리고 조급함도 버리고 천천히 철저하게 준비하세요.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돈 때문에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오늘 하루 생활하는 데만 급급하다 보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기가 힘들어요. 당장은 적은 돈이더라도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성실하게 다니면 형편도 차차 나아지게 될 거예요. 먹고사는 건 가장 기본적인 문제잖아요. 생계가 안정되면 생활도 자연히 안정될 수 있어요.”




 든든한 울타리가 되는 또 하나의 가족

혈혈단신 내려온 이 대표에게 직원들은 가족이나 다름없다. 여러 명의 직원들을 먹여 살리는 가장으로서 보람과 책임감을 느끼는 동시에,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식구로서 위로와 위안을 받는다.

그러나 추석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가슴 한구석에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얼마나 크고 깊을까 짐작해본다. 이 대표는 애써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북한의 추석은 이곳처럼 큰 명절이 아니에요. 그냥 제사상 차리는 정도지요. 근데 남한에 와보니 추석 선물도 주고받고, 식구들이 다 모여서 즐겁게 지내는 연휴로도 의미가 크더라고요. 참 정겨워 보이고 좋은 문화 같아요.

우리 직원들은 다행히 다 가족하고 같이 내려와 있어요. 그래서 작년에는 추석 연휴에 직원들 휴가 주고, 저는 공장에 나와서 일했어요. 공장은 내 집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올해도 비슷할 거예요. 그래도 마음만은 풍족해요. 회사가 잘 돌아가고 직원들 월급 제때 주는 게 지금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거든요.”

이 대표의 눈빛에서 소박하지만 강건한 기운이 느껴진다. 희망을 품은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긍정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에너지다. 여태껏 이뤄온 일은 혼자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고 주변에 공을 돌리는 모습에서 성공의 요인을 찾을 수 있었다.

사회라는 곳은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님을, 그것을 받아들이고 용기를 낼 때 비로소 희망의 문이 열린다는 것을 이 대표는 본능적으로 깨달은 듯했다.

“저라고 특별히 잘난 사람이 아니에요. 저도 많은 도움을 받아 이 자리까지 오게 됐어요. 한 가지 달랐던 점이 있다면, 남들보다 조금 더 용기를 냈다는 것뿐이에요. 웅크리고 있지 말고 밖으로 나오세요.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발씩 폭을 넓혀보세요. 기회는 그 안에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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