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3일 토요일

풍족한 삶이 아닌 정상적인 삶을 택하다

52만원과 167만원, 이것은 대한민국 입국 17년 차 김인국씨가 회사에서 받은 첫 월급과 현재 받고 있는 급여다.


52만원, 어찌 보면 요즘 자유로운 직업선택을 하는 사회적 풍토로 볼 때 어떤 사람의 알바비용이 될가말가한 액수이고 167만원은 웬만한 사람이 정식으로 회사에서 일하면 받을 수 있는 많지 않은 금액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땅에서 17년차 살아가고 있는 김인국씨의 인생에서 단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30대 중반의 한창 나이에 대한민국 땅에 첫 발을 디뎠던 그가 얼마 안 있으면 정년퇴직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바로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명예롭게 퇴직을 맞는 다는 것이다.


그의 직업은 남들보다 눈에 띄는 직업도 아니고 그렇다고 월급이 욕심나는 그런 직장은 더더욱 아니다.


김인국씨가 일하는 빌딩관리본부. 얼핏 듣기에 거창한 이름 같지만 대한민국에 우후죽순처럼 들어 선 일반 빌딩을 관리하는 너무 평범한 사업장이다.


바로 그곳에서 17년간을 일해 온 김인국씨는 말 그대로 뿌리 깊은 나무처럼 든든히 버텨왔다.


회사에 노조까지 생겨 62세로 정한 정년퇴직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그는 그래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아왔노라고 이야기한다.

김인국씨가 대한민국에 입국하던 1997년, 당시는 탈북민정착시설인 하나원도 없었고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법조차 없던 때였다.


탈북자라야 손에 꼽을 지경이었지만 대한민국이 IMF를 겪고 있어 어려운 상황이었고 그래서 직업문제는 가장 선차적이고 어려운 난제였다.


시시각각으로 위협하던 생명에 대한 위협은 사라졌지만 젊고 건장한 장정을 앉혀놓고 먹여줄 곳은 아무 곳도 없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당장 일을 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김인국씨는 북한이 러시아에 파견한 근로자중 한 사람이었다.


1990년대‘고난의 행군’으로 북한사회전체가 엄청난 위기를 겪고 있었어도 아직은 두만강이나 압록강을 건너는 탈북자들이 많지 않던 그 시절 러시아에 파견된 북한근로자들이 현지의 사업장을 탈출해 난민신청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물론 심심찮게 러시아 파견 근로자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만 1980년 후반~90년대 초반에 위기를 맞은 동유럽권의 사회주의나라들의 자본주의에로의 전환으로 하여 생긴‘재쏘생’들의 사업장이탈은 곧바로 대한민국에로의 입국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10여년 군복무 제대 후 북방의 한 탄광에‘무리배치’를 받았던 김인국씨는 탄광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각방으로 노력하던 끝에 집안반대도 무릅쓰고 뇌물까지 바치고 91년도에 러시아에 용접공으로 가게 되었다.


러시아의 어느 큰 도시 탄광건설사업소에 배치 받은 김씨는 평소에는 작업장에서 러시아인들과 함께 일하고 주말이나 휴식 일에는 그들의 소개로 현지인들의 집들에 나가 부업으로 용돈까지 챙겼다.


당시 북한정부는 근로자들에게 러시아정부가 지불하는 급여의 17%만 급여로 주었는데 거기서 밥값까지 떼고 나면 북한의 가족은 챙길 여유도 없었다.


그러 던 중 평소에 성실성으로 보위지도원의 인정을 받았던 김인국씨는 남한드라마를 보다가 보위지도원에 발각되어 취조 받던 중에 사업장을 탈출한 다른 근로자를 잡아들이라는‘임무’를 받고 외부에 나갔다가 자신도 유엔을 통해 난민신청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97년 3월, 김인국 씨는 4명의 동료들과 함께 한국에 들어왔고 2개월 후인 11월부터 다니던 교회 목사님의 소개로 지금의 빌딩관리업체에 근무하게 되었다.


사실 빌딩관리는 다 알다시피 일이 별로 힘들지 않고 남자들이 주로 일하는 곳이다.


일은 그런대로 눈치껏 한다고 했지만 외국어처럼 낯선 언어에 멍할 때가 많아졌다.


수군거리는 동료들의 뒷소리가 그의 귓전에까지 날아왔고 별치 않은 일에도 트집을 잡으려 했다.


아무리 스스로 마음을 다 잡자고 노력해도 그때뿐이고 이판사판 하는 생각도 불쑥불쑥 머리에 떠올랐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퇴근 후에는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푸는 라 코가 삐뚫어 지도록 정신없이 술을 마시기도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의 고충을 들어 줄 가족조차 곁에 없는 실정에서 술은 둘도 없는 친구였다.


건강은 말할 것도 없고 몸은 몸대로 쇠약해졌다.


심지어 식사를 하다가 말다툼이 벌어져 고성이 오가고 수저를 집어던지고 식사도중에 파출소로 가기도 하고.


그렇게 몇 개월을 지내다보니 은근히 반발심이 생겼다.


남자 대 남자로 한판 붙자고 동료들을 불러냈다.


알고 보니 특별한 이유도 없고 말하자면 신입사원이라서 당했던 거고 시쳇말로 말로 하면 그냥 놀림 반, 무시 반 그런 거였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암튼 꼬였던 매듭은 큰일 없이 풀렸다.


지금은 그 때 일을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담담하게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몇 번 당하고보니 은근히 면역력도 생겨 들어도 못들은 척 누가 일부러 건드려도 모르는 체 오직 자기 일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바로 그 회사에서 그 동료들과 함께 17년을 버텨왔다.


몇 년 전에는 회사의 인정을 받아 팀장도 되었다.


모든 조건을 따져 봐도 너무도 당연한 자리지만 자그마한 회사에서 장기근속자들 만에게만 차례지는 그 직책이 더없이 소중하다는 인국 씨. 업도 평범하고 회사는 더 평범하고 월급도 많지 않은 그 일을 지금까지 잘 해 올수 있은 비결은 무얼까.


낯선 이국땅에서 파견근로자생활 때도 당하지 않았던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게 만들었던 이유를 굳이 꼽으라면 그는 함께 입국한 친구들을 꼽는다.


이역 땅에서부터 가족처럼 혈육처럼 그와 함께 해온 동료들이 있었기에 그는 그 무엇도 이겨낼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표한다.


인국씨의 삶에는 목표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어진 삶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가장의 월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보잘 것 없었지만 그 월급을 쪼개 적금 들고, 보험도 가입하고 노후대책을 위한 국민연금에도 가입했고 북한의 가족도 돕는다.


인국씨 본인 스스로가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고 또 그와 함께 직업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가족의 응원이 있었기에 그는 스스로의 삶에 만족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아침이면 회사로 학교로 가고 저녁이면 온 가족과 함께 식사하고 즐기고. 남들처럼 황홀하고 풍요로운 삶이 아닌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삶을 선택하고 남보다 두 세배의 기쁨과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는 그의 삶이 성공 그 자체가 아닐까.


2014년 11월 김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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