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31일 토요일

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4) ─ 웅정필의 불운



 폭풍같은 사르후 전투가 끝이 나고, 천명제는 항복한 조선군등 여러가지로 포로들을 더 만들어내며 숫자를 불렸습니다. 또한 기세를 타서 개원과 쳘령을 탈취했고, 지역을 점령한것보다도 그 지역에 살던 주민들을 손에 넣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저항에 저항을 거듭하던 예허부마저도 결국 천명제와 후금에게 무너졌습니다. 1619년 8월의 일입니다.


 사르후 대패의 책임이 있는 양호는 당연히 자리에서 쫒겨났고, 후임으로 부임된 사람은 웅정필이었습니다. 웅정필의 자는 비백(飛百)이고, 호(號)는 지강(芝岡) 입니다. 호광(湖廣) 강하(江夏, 지금의 湖北 武昌) 출신으로 성격이 강직하고 병법에 밝았으며, 궁술에 능했다고 전해집니다. 1598년(萬曆 26년) 과거에 급제(及第)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어사(御史)로서 요동(遼東)에 파견되어 오랜 기간 그곳에서 근무했습니다.


 요동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니, 이 인사 조치는 적절했습니다. 사르후 때도 그랬지만, 명나라 조정에서 당초에 내린 판단 자체는 꽤 적절한 경우가 많았지만, 일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이상하게 변해가는 모습들이 자주 나오게 됩니다.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는 웅정필의 고민은 사실 천명제나 후금이 아니었습니다. 임무를 부여받는 웅정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곧바로 황제에게 상소하는 것이었는데,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안에서 논쟁하여, 신의 기를 꺽지 마십시오. 옆에서 어지럽혀, 신의 발목을 잡게 하지 마십시오."


 당시 명나라 조정은 어지러운 대립의 전선이었는데, 황제는 만력제(萬曆帝) 였습니다. 만력제가 정치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기에 정치의 여론은 황제에게 진언하는 환관인 언관 등으로 인해 좌지우지 되는 형편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언관은 사소한 일을 파해쳐서 트집을 잡는 것이 주 임무입니다. 웅정필이 두려워한것이 바로 이러한 일이었기에, 그는 현장에 나가기 전에 먼저 황제에게 이렇게 직접 단단히 못을 박는 언급을 했던 것입니다.


 태조 홍무제 주원장 이래로, 명나라의 황제들은 태양과도 같아 그 권한과 위세가 가히 바다를 가르고 산을 뒤집을 정도라, 아무리 대간신이 설치고 사악한 환관들이 판을 친다고 해도, 그 기반은 결국 황제의 총애일 뿐입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역신이라도 황제의 총애를 잃어버리는 순간 그의 악행은 그날로 끝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만력제 본인에게 직접 다짐을 받아놓는다면, 제 아무리 사특한 무리들이 묘한 소리를 지어내도 웅정필은 안심하고 전방에서 적을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걱정이 되는 부분을 이렇게 해결하고, 임지에 부임한 웅정필은 먼저 유우절, 왕첩, 문정이라는 세 명의 장수를 사람들 앞에서 처형했습니다. 앞서의 전투에서 줄행랑을 놓았던 인물이었는데, 이들을 처형함으로서 군율을 다시 다잡고, 또한 새로 부임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여러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사한 장병을 정중히 제사하고 위령식을 가져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습니다.


 웅정필의 대 요동 방위전선에 대한 가장 큰 생각은 우선 '싸우지 않는 것' 입니다. 웅정필의 생각에 지금은 싸우기에 좋은 시기가 아닙니다.


 바로 직전에 대패를 방했고, 그 전의는 전혀 회복되지 않았으며 병사들은 만주 팔기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고 무기, 마필 등은 어지로워 정비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후금과 천명제의 부하들은 그 위세가 대단하고 사기또한 하늘을 찌를 듯 했음으로, 지금 당장 싸우는것은 오자(吳子)가 말하길 전투의 첫번째는 기세라 하였고 손무가 말한 '가히 써 더불어 싸울 것과 가히 더불어 싸우지 않을 것을 아는 사람은 이긴다' 는 말에도 어긋나니, 가히 병법에도 맞지 않는 말이라 할 것입니다. 최소한 웅정필은 그리 판단했습니다.


 웅정필은 어지로운 군심을 다독이고 쥐어짜서 18만의 대군을 만들어낸 다음, 각지에 배치하고 연락망을 만들고,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작은 공격은 방어력을 이용해서 막아내고 큰 공격은 서로가 바로바로 구원을 올 수 있도록 하였는데, 소규모 유격대를 조직하여 기습 작전을 벌이기도 하고 군사훈련을 계속 시키는등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천명제도 적의 이런 태도에 잔뜩 긴장해서 1년이 넘게 함부로 싸움을 걸지 못했습니다.


 일단 적을 저지해내는 임무라는 측면에서 웅정필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통쾌하게 적을 물리치는 싸움이 못 되니, 눈에 뛰는 전공이랄것은 없고 또한 이는 내부에서 공격당할때 책임을 돌릴만한 방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결국 결과론으로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웅정필의 방법대로 그대로 가서 명군이 승리를 거두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반대의 결과를 취한 대가는 후술하겠지만 매우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곧 명이 생각지도 못한 대기근과, 이로 발생한 내부의 반란군 등 수많은 문제가 새로이 발생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시점에선 일이 더 커지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입니다.


 웅정필이 공격을 받은 가장 큰 원인은 만력제가 죽어버린 일입니다. 만력제의 뒤를 이은 황제는 태창제(泰昌帝) 였는데 오래 살지 못하고 천계제(天啓帝)가 이를 이어 받았습니다. 그리고 환관 위충현(魏忠賢)의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당초에 아무리 내부에서 흔들어대도 별 걱정이 없었던것은 만력제에게 부탁한 다짐 탓인데, 만력제가 사망해버렸으니 이는 무효가 됩니다.


 과연 고조(顧慥)와 요종문(姚宗文) 등의 관리들이 웅정필이 도무지 싸우려 들지 않고, 변방에서 백성들의 재물을 갈취한다고 고발했습니다. 결국 웅정필은 일이 이렇게 되자 물러나게 되어버렸고, 후임은 원응태(袁應泰)라는 사람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관리로선 제법 유능하다는 평가는 받았으나, 유능한 관리가 치열한 전쟁터에서 능력을 보일지는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마침 몽골의 각 부에 심각한 기근이 들어버렸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수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명나라 영토로 밀려왔고, 원응태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천명제에게 가장 필요한게 사람이라는것은 모두가 아는 바, 만일 이들을 구제해주지 않는다면 당장 후금으로 달려가 그들의 전력이 될것은 불보듯 뻔했습니다. 원응태는 이 사람들을 요양과 심양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이에 후금의 밀정들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심양과 요양은 바로 그해의 봄에 함락되었습니다. 하세현(賀世賢)등이 적군의 도발에 나서다 패하고 돌아가는데, 성문이 밀정들때문에 내려오지 않고 죽어버렸습니다. 이판사람으로 싸우는 식이니 후금군에서도 사망한 장교들이 나올 정도로 싸움은 상당히 혈전이었습니다. 심양을 지키던 1만 병력은 이렇게 분쇄되었습니다. 5일 뒤에 천명제는 바로 요양을 공격했습니다. 명나라 병력이 3만이나 주둔해 있었지만 천명제는 모든 군대를 전부 동원했고, 성 곳곳에서 밀정들이 불을 지르는 통에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절망한 원응태는 불 속으로 몸을 던져 자살했습니다.


 순식간에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이 무너지고, 50여개의 요새와 70여개 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눈 깜작하는 사이에 요하(遼河) 동쪽에서 명나라의 영역은 거의 사라지고 없어졌습니다.


 누가 봐도 인사 조치의 실패임은 명확했음습니다. 화가난 내각대신 우일경이 웅정필을 내각 대신으로 보냈으면 이럴 일이 없었을 것이라 말했고, 다급해진 명나라 조정은 웅정필을 다시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와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왕화정(王化貞)을 요동순무(遼東巡撫)로 기용했는데……이 인사조치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웅정필은 싸우지 않는것을 전략으로 내세우는 인물인데 비해, 왕화정은 다른 명나라 장수들처럼 큰 공을 세울 비책을 노리는 성향이었습니다. 둘은 각자 조화가 되기는 커녕 여러모로 어긋나버리고 맙니다.


 왕화정의 비책이란 이른바 이런것입니다. 당초에 무순에서 천명제에게 시원스레 항복했던 이영방에게 사람을 보내 내통을 권유하고, 피도(皮島) 즉 가도(椵島)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던 모문룡(毛文龍)이 후금의 뒤를 치겠다는 이야기를 믿었던 것입니다.





 모문룡에 대해서는 좀 더 이야깃거리가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논문을 여러편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제법 연구가 된 편입니다. 모문룡의 호는 진남(振南)으로 본래 이성량 밑에 있던 인물입니다. 모문룡은 1621년 5월, 요동의 유민들을 모아 요동을 회복하라는 왕화정의 명령에 따라, 그는 200명 남짓의 수군을 이끌고 해상으로 진출했고 그해 7월 후금의 배후지이자 요충지들을 습격, 탈환해서 승전보에 목마른 명나라 조정을 열광시켰습니다. 당시 명 조정은 후퇴를 거듭하던 처지라 이 소식은 더욱 그럴듯 했습니다. 한편 승승장구 하던 후금에게도 나름대로 충격을 주는데 성공했던 것입니다.


 이 지역의 후금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는 하지만 나름대로 주요 전장과는 거리가 있고 유동적인 부분이 많았던지라, 모문룡이 이런 활약을 하자 그 휘하로 귀순해오는 사람이 "주둔 7일만에 4만 여 명에 이르렀다." 라는 과장된 표현도 있습니다. "곳곳에서 후금인을 죽이고 호응해 왔다." 는 기록도 있습니다.


 피난해오는 사람들이 계속 모문룡의 진영에 가게 되면 후금으로서도 간담이 서늘해질 수 밖에 없기에 서둘러 대응했습니다. 후금군의 반격에 모문룡의 조선의 서북 지역으로 후퇴를 했고, 사태를 관망했습니다. 그러자 명나라 조정에선 모문룡의 활약상이라는것이 상당히 과장된것이 아니냐, '실체' 를 생각하면 본국으로 철수시키는게 좋지 않겠느냐는 말도 나욌지만 일단 1623년 경 무렵에도 모문룡에 대한 황제의 신임은 여전했습니다.


 뒤에 원숭환(袁崇煥)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도 나올 사람이기에 우선은 넘어가도록 하고, 왕화정은 이런 모문룡의 배후 습격 약속을 믿었습니다. 거기다가 심지어 몽골에서 40만 대군을 보내주겠다는 말까지 하는것이 아닙니까. 일이 이렇게 되면 가히 적수가 없을 것입니다.


 왕화정은 이렇게 되면 승리야 뻔한 일이니, 자신이 공을 차지해야한다고 여겼습니다. 요동순무인 자신은 요동경략인 웅정필의 밑에 있는 처지니, 공을 독점하려면 웅정필과 불화 하여 이를 소문을 내야만 자신의 의사로 작전을 수행했다는것이 증명이 됩니다.


 거기다 왕화정은 위충현과 친하기도 했기에 이런 점도 믿고 있었습니다. 수비를 중히 여기는 웅정필은 "이것은 꿈과도 같은 소리다." 하면서 충고를 했지만 왕화정은 웅정필이 자신이 세울 공을 시기한다고 믿었기에 별로 중하게 듣지도 않았습니다.


 웅정필은 여러 차례 말하지만 이쪽의 손실을 최소화 시키고 위험 가능성을 줄이는데 중점을 둔 지휘관입니다. 그 당시 명군의 지휘관들 중에 호언장담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편인데, 그런 웅정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천명제에게 처음부터 시원스레 항복한 이영방이나, 움직이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이상한 모문룡의 게릴라들은 믿고 큰 일을 맡길 만하지 못합니다. 몽골군 40만이야 처음부터 말을 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고 말입니다.


 둘의 대립이 얼마나 집요했는지, 왕화정이 군대의 명칭을 평요(平遼)군이라고 하자 이 지방에서 오래 근무했던 웅정필은 요동 지역의 遼자를 사용하는게 사람들의 불쾌감을 줄것을 우려해 동쪽을 평정한다는 평동군으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그러자 왕화정은 곧바로 성을 내는 판국이었는데, 사령관들이 이렇게 다투고 있으니 큰 싸움을 벌이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웅정필은 쌍방의 실력과 전력을 분석한 뒤 군사를 삼면으로 나눠 광녕을 막고, 등주, 내주, 천진에 수군을 배치하고, 산해관에 경략을 특설해 세 곳을 통제하는 형태로 가자고 했지만 왕화정은 요하 지역에 전군을 배치, 6만 군대로 일거에 승리를 거두자는 주장만을 고수했습니다. 이러한 불화는 결국 천명제의 귀에까지 흘러들어갔고, 1622년 정월 그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요하를 건너 요서로 진격해 들어갔습니다.


 요서로 접어든 천명제는 광녕은 일부러 공격하지 않고 전초인 서평을 공격해 서평을 지키던 나일관을 전사시키고 3,000명을 전사 시켰습니다. 왕화정은 손득공(孫得功)의 조언에 따라 3만 군대를 그에게 주어 서평을 구원토록 하려고 했는데, 정작 이 손득공이 적과 만나자마자 명군이 패배했다고 소리 지르며 말에 채찍질을 하며 달아났습니다. 대장이 이런식으로 나오자 당연히 병사들은 당황하여 제대로 싸움다운 싸움도 못해보고 패배했습니다. 사실 손득공은 이미 저쪽으로 넘어가버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손득공은 광녕으로 돌아와 의도적으로 후금군이 가까이 왔다고 하며 성 내에 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왕화정은 아무것도 모르고 사무만 보고 있다가, 갑자기 "적이 와서 다급하다. 어서 피해야 한다." 는 소식을 듣자 무슨 소리인지 몰라 눈만 깜빡 거리며 앉아 있었습니다. 왕화정에게 이런 말을 한 참장은 다짜고짜 그를 말 위에 태워 서쪽으로 도망보내 버렸습니다. 천명제의 군대는 손득공의 인도에 따라 무사히 광녕성에 입성했고, 왕화정을 200여리 추격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이영방의 내통도, 모문룡의 교란도, 몽골의 천지를 가를듯한 40만 대군도, 무엇 하나 없었습니다.


 왕화정은 웅정필을 만났습니다. 웅정필은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6만 군대면 금나라 군을 일거에 무찌르겠다는 사람이 아니오? 그래, 이젠 어찌 할 셈입니까?"


 그제서야 참회를 한 왕화정이지만 무슨 도리가 생길리가 없습니다. 둘은 아무 방법도 없이 산해관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일은 곡작 20여일 만에 결판이 난 싸움이었고, 요동 전지역을 완벽하게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당연히 왕화정과 웅정필 모두 체포 되어 죄를 추궁받았습니다.


 굳이 죄를 따지자면 왕화정의 죄가 더욱 컸고, 다만 웅정필은 상관이라 책임도 따라온다는 측면은 있었으나 애시당초 그가 무엇을 해볼 방법이 없었으니 상관이란것도 대수로울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위충현 등으로 인해 책임은 혼자 덮어쓰고 참수되었습니다. 웅정필의 목은 변방의 9곳(遼東, 薊州, 宣府, 太原, 大同, 延綏, 固原, 寧夏, 甘肅)으로 조리돌림을 당했습니다. 처형이 집행된것은 1625년의 일이었습니다. 웅정필은 마지막 절명시를 남겼습니다.


 "이 혼이 다시 살아나길 바랄 쏘냐? 절필하고 탄식하니 그 한숨 소리에 날이 밝구나."


 웅정필은 1629년에 숭정제 시절에 대학사(大學士) 한광(韓爌)의 요청으로 사면되어 양민공(襄愍公)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왕화정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높아져 결국 그도 1632년에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누굴 죽이고 누굴 회복시킨다 하여도 이미 죽은 사람이 살아오기는 만무하고 잃어버린 땅도 회복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명군은 산해관 서쪽으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천명제는 국도를 요양에서 심양으로 옮겼고, 이곳을 성경이라 불렀으니 훗날 봉천부로 불리우게 되는 곳입니다. 이제 팔기군은 요하를 건너 요서에까지 진출했습니다. 산해관만 넘으면 북경은 일직선이니, 일이 시간문제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천하의 천명제조차도, 거의 일이 목전에 다다른 이 시점에 생각지도 못한 저항에 직면하여 쩔쩔 매야 했습니다. 바야흐로 명나라의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Flavius Aetius), 원숭환(袁崇煥)이라는 걸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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