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7일 토요일

한 납북 어부의 30년간의 북한 생존기




‘납북귀환자의 이야기’는 1975년 8월 동해 공해 상에서 어업을 마치고 귀항하던 중 납북되었던 어선 ‘천왕호’와 배에 탔던 선원 33명 중 한 사람인 최욱일 아버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한의 가족과 납북자가족모임의 도움으로 극적인 탈북에 성공하여 2007년 1월 대한민국으로 귀환하였다.

납북된 33명중 22명은 모두 굶어 죽었다. 지난 3월 15일 북한인권시민연합은 제네바에서 열린 제99차 유엔 강제적·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 미팅에서 최욱일 아버님이 북한에서 자신을 포함한 납북자들의 생활을 증언할 수 있도록 하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를 가로지르며, 경기도 안산에 살고 계시는 최욱일 아버님 댁을 방문했다. 납북된 지 32년 만에 황혼의 나이가 돼서야 재회하여 새로 시작한 신혼 부부 마냥 행복에 젖어있는 이들 노부부에게 아팠던 두 인생의 지난날들을 기억하게 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아프지만 행복한 오늘이 있어 즐겁게 추억할 수 있고, 힘들게 버티고 이겨낸 세월이 있어 최욱일 씨 부인이 구수하게 부쳐낸 메밀김치 지짐과 한 잔 술이 더 맛나게 느껴지는 듯 했다. 아픈 그들의 지난날들은 오늘의 행복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편집자)


꿈과 함께 만든 기계배

내 고향은 강원도 주문진읍 교향리이다. 이 고장 토박이로 시집간 누나도 같은 동네에 모여 살았고 온 가족이 그렇게 같이 살았다. 원래 바닷가에서 나서 자란 나는 일찍이 나무배를 타고 고기잡이 일을 해왔었다. 자연스럽게 어깨너머로 배 위에서 하는 일들을 몸으로 익히면서 배우게 되었다.

21살에 일찍 결혼하고 계속 뱃일을 했다. 그러던 중 큰 배를 하나 장만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기계 배로 고기잡이를 하면 속도도 빠르고 힘도 더 세고 해서 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드디어 1974년 거금 3천 7백만 원(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40억 원 정도는 더 될 것임) 돈을 들여 39톤급 기계 배를 마련했다.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모두가 희망과 꿈을 담아 아끼고 아껴서 장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배는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했고 모두가 기뻐했다. 그렇게 우리의 꿈이 담긴 “천왕호”가 만들어졌다.

나 또한 이 배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삼 남매와 네 번째로 태어난 8개월 된 막내아들의 장래도 이 한 척의 배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소중했고 가족 모두의 기대가 담긴 배였다.

결혼 14년 만에 장만한 배를 보면서 이제 잘살게 될 내일만을 꿈꾸면서 기대도 컸다. 이제 큰 배도 마련했으니 먼바다로 출항할 준비가 되었다. 사실 이렇게 큰 배를 만들게 된 것은 당시에 가까운 바다에서는 고기가 잘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작은 배로는 고기를 잡아 봤자 적은 량 밖에는 잡을 수 없었고 여섯 식구 생계를 유지하는 데는 큰 보탬이 안됐다. 그래서 한번 크게 배 사업을 해보고자 한 것이었다. 1975년 8월 9일 섭씨 30도가 넘는 찜통더위에도 우리는 출항준비를 마치고 출항했다.

한번 먼 바다에 나가면 며칠씩 바다 위에서 있어야 했기 때문에 많은 것을 준비해야 했다. 어구 손질, 디젤유 4드럼, 냉동 오징어, 얼음 5톤, 25Kw용 전구 15개, 배의 기관용 부속품, 생필품 등을 준비했다. 그리고 33명이 “천왕호”에 탑승했다.

당시에 어획 목표량은 오징어 3만 6천 마리 정도였는데 당시 시가로는 3,4백만 원이 목표 수익이었다. 한번 항해를 떠나면 뭍에 있는 가족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험난한 바다에 나가 혹시라도 일이 생길까 걱정되어 집에 있는 쌀을 다 털어서 배에 실었고 주머니에 돈을 두둑이 채워주었다.

배가 막 떠나려고 하는데 셋째 딸애가 부둣가로 달려나왔다. “아버지 알사탕 사줘” 하면서 애원하며 울면서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때 내 윗옷 안주머니에는 돈이 얼마간 있었다. 항해 도중에 혹시나 경비대원들을 만나면 찔러줄 돈이었다.

형님은 배의 사무장이었던 나에게 요긴하게 쓸 비상금을 항상 챙기고 다니라고 말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도 딸애의 울음도 뒤로하고 무작정 배에 올랐다. 북에 있는 30년 동안 그때 딸애의 울음소리가 귓전에 들려와 늘 내 가슴을 후비며 괴롭힐 줄은 미처 알 수 없었고 예상도 못 했다.

북한군에 묶여 버린 ‘희망’

당시에 우리 배 규모는 제법 되었지만, 장비는 충분히 갖추지 못했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전기, 방향탐지기, 독도해역 지도와 컴퍼스 등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선장 김익두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멀리 공해 상까지 나가 고기잡이를 하곤 했었다.

공해 상에는 중국 배, 일본 배들도 많이 어로작업을 하였는데 우리는 종종 일본 배를 따라다니곤 했었다. 왜냐하면 일본 배들은 기계 장비를 잘 갖추고 있어 고기떼를 잘 탐지했었기 때문에 우리도 쫒아 다니면서 눈치껏 고기를 잡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끔은 일본 해역 부근까지 나가서 고기를 잡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1975년 8월 16일 조업 7일째 되는 날 우리는 그동안 잡아들인 오징어를 보며 돌아가서 좋아 할 처자식과 식솔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만선의 기쁨을 누리며 좋아하고 있었다. 밤 11시 강릉 문화 방송에서 태풍경보가 있다는 것을 라디오로 듣고 서둘러 어구를 거두고 주문진항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1975년 8월 17일 조업 8일째 되던 날 새벽 4시쯤 되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는 북한 경비정이 우리 배를 향하여 기관총을 쏘아대며 추격해 오고 있었다.

우리배가 멈추면 위협 사격이 멈추고 움직이면 다시 사격하고 그렇게 가다 멈추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총 한 자루 없었던 우리는 저항도 못하는 사이에 권총과 기관총을 소지한 북한군 군관 1명과 병사 1명이 우리 배에 올랐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꼼짝 말아 움직이면 쏜다” 하고 엄포를 놓더니 우리 배를 북한경비정에 로프로 연결하여 북한해역으로 끌고 갔다. 우리 배 엔진 동력과 북한해군 배 엔진 동력을 포함하여 2척의 배가 함께 가동했는데도 6시간이나 걸려서 북한수역에 있는 어느 한 항구에 도착했다.

6시간의 거리는 우리배가 북한해군에 발견되던 당시 북한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도 북한군은 우리배가 북한해역에 있었다고 했다. 북한군에게 끌려가는 배위에 꼼짝도 못하고 앉아 있는 동안 천 갈래, 만 갈래 생각이 다 들었다.

그동안 남한에서 들었던 소문들이 기억났다. 들었던 바대로 정말로 “북한에 도착하면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마음은 너무 착잡하고, 막막하고 억울했다.

왜 끌려가야 하는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사랑하는 가족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저 북한으로 가야한단 말인가? 배위에서 저항해 보고 싶었지만 북한군의 겨누고 있는 총부리를 보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북한의 원산항에 도착하다.

배위에 상황은 한 마디 말만 했다가는 당장 무슨 피해가 날아올지 몰라 조마조마했고 그 속에서 우리는 더 애간장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북한 강원도 원산항에 도착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어느새 소문을 듣고 왔는지 모르지만 항구에는 환영인파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마도 북한군이 우리가 북한으로 월북했다고 허위로 미리 상부에 보고를 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조금 있더니 군인들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다시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초대소라는 곳으로 보내졌다. 건물 외형이나 시설들이 꽤 괸찮은 편이었던 것 같았다. 대우도 그만하면 괸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무엇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거기다가 배를 만들어서 1년도 타보지 못하고 잡은 고기와 배를 모두 빼앗길 것을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잠도 오지 않았다. 밥을 먹어도 모래알을 넘기는 것 같았다. 한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시간만 보냈다.

한 주가 지나고 본격적으로 사상교육이 시작되었다. 초대소에서 하루 일과는 아침 6시에 기상, 아침체조 하고, 그리고 다시 숙소로 들어와 세수하고 7시에 아침식사하고, 8시 반부터 집중 강습을 받고 12시까지 계속됐다. 이렇게 아침일과가 끝났다.

강습은 한 번에 90분 동안 들었고 10분 동안 잠깐 쉬고 다시 두 번째 강의를 들었다. 점심을 먹고 약 한 시간동안 오침을 하고 오후 강습이 시작 되었고 3시간 동안 두 강습을 듣고 오후 강습 일정이 끝났다.

강습이 끝난 후 체육운동도 하고 저녘 식사를 하고 북한체제 선전용 영화를 보는 것으로 하루 일과가 끝나고 보통 저녁 9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에 누워도 두고 온 처자식들이 눈앞에 얼른얼른 거리는 것만 같아 눈을 감아도 잠도 않고 긴 한숨만 나왔다.

그러니 김일성의 주체사상이니, 혁명역사니, 사회주의체제의 우월성이니 하는 것들은 사실 듣고 있어도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우리가 가장 기다리는 소식은 우리를 과연 언제 돌려보낼까 이었다. 3개월이 지나고 6개월 지나도 돌려보낸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기다리는 대답은 하지 않고 대신 계속 기다리라는 말뿐이고 “수령님의 교시가 있어야” 한다고 하니 어떤 동료들은 무의식적으로 불평을 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사회는 거짓말도 안한다고 하는데 왜 보내준다고 하고 보내주지 않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결국 원산초대소에서 10개월의 시간이 지나갔다. 초대소에서는 구타나 고문 같은 행위는 없었으나 불평을 하면 요주 인물로 찍히고 나쁜 놈으로 취급을 하여 이런 말도 자주 할 수 없었다. 단지 하도 억울하고 답답하여 늘어놓은 푸념이었다.

동료들과 헤어지다

원산 초대소에서 생활한지 9개월쯤 되니 사회에 배치된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처음으로 직감했다. 우리는 어쩌면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구나. 지금까지 집에 돌려보낼 거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 바보 같았다.

우리는 큰 버스에 타고 기차역까지 함께 가게 되었는데 가기 전에 우리를 인솔하는 5과 지도원 이라는 사람이 각 사람에게 북한 돈 200원과 가방 그리고 속옷과 세면도구, 겉옷을 챙겨주었다. 보내달라는 고향에는 안 보내주면 크게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우리를 위로한답시고 안심시키려는 수작이었다.

그렇게 어찌할 방법 없이 30년 세월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곳에 정착하다 배치 받은 곳은 함경북도 김책시의 어느 한 시골 농장이었다. 이제 아는 친구 하나 없이 혼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으로는 하염없이 눈물만 나왔다. 의지할 사람도 말 친구를 해줄 사람도 없이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었다.

처음 도착하자마자 나를 인솔해 간 5과 지도원과 함께 내가 일하게 될 농장 관리워원장과 초급당 비서를 비롯한 간부들과 만났다. 해당 협동농장에 배치 받은 것을 환영하며 앞으로 일도 열심히 하고 당과 수령을 위해 성실히 생활하면 좋은 일들이 있을 거라고 위로해 주는 듯이 나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생활 속에서는 처음에 환영인사를 할 때와 전혀 달랐다. 처음 거처할 집이 없어 늙은 노부부가 사는 윗방에 곁방살이로 들어갔다. 집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불편했고 정 붙이기가 너무 힘들어 잠이나 겨우 잘 수 있는 곳이었다.

잠만 그곳에 자고 밥은 합숙 식당에서 먹었다. 남쪽에서 왔다고 특별히 심한 노동을 시키지는 않았지만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다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말을 조심해야 했다. 둘이서만 말한 얘기가 다른 사람을 통해 여러 번 나에게 돌아오는 것을 경험했다.

그 이후로 나는 둘이 있을 때는 절대 속 깊은 얘기를 하지 않았고 얘기 한 내용을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나에게 돌아온다고 해도 나를 보호 할 수 있었다. 세 명이서 모여 이야기 할 때는 아예 말조차 하지 않았다. 둘 중 누가 어떻게 보고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이 북한 보다 좋은 점에 관하여 말을 하면 큰일이었다. 혹시나 주변 사람들이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느냐고 물어보면 언제나 북한보다는 힘들고 어렵게 산다고 말을 해야 했다.

사실 내가 납북 되던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의 경제 형편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한국이 항상 그렇게만 살고 있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고향 한국이 언젠가는 더 발전하고 있을 거라고 근거도 없이 믿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 텔레비전에서 내보내는 것은 남한의 대학생들이 시위하고, 깡패들이 나오는 것만 보여주었다. 박정희대통령이 사망한 소식과 8·28 도끼 사건도 한국이 도발을 했다고 북한주민들에게 역설하는 것도 들었다. 북한 사람들은 북한정부가 보여주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알고 있었지만 점점 고향 한국이 더 발전할거라고 굳게 믿고 싶었다.

결혼과 계속되는 감시

시간이 지나면서 배치 받은 곳에서의 생활에 잘 적응해 가고 있었다. 주변으로부터 내가 일을 잘하고 있다는 호평도 퍼지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배치 받은 후에도 종종 나를 이곳까지 이송해 왔던 연락소 지도원이 가끔 찾아오곤 했다.

이 연락소 지도원이 나를 결혼 시키면 좋을 것 같다는 얘기를 내가 일하는 단위의 관리책임자들에게 귀띔을 해주었던 것 같다. 결혼을 하고 난 후에는 입당(북한의 조선노동당에 당원으로 가입함을 의미, 입당은 북한에서 성인남자라면 가정 이력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가입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므로 입당 여부는 배후자를 만날 때도 중요한 문제이다.)도 하게 되었다.

당원이 되고 나서는 분조장(북한의 농촌에서 7~8명으로 구성된 조의 팀장을 이르는 말)과 기술지도원 일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은 올라갈 수 없었다. 나는 남보다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주간에는 일을 하고 야간에 공부하는 야간기술학교에도 다녔다.

당시에 북한에서는 농촌을 선진화 한다고 하여 농업전문학교가 생겼는데 강사들이 일주일에 세 번 직접 농촌 마을회관 같은 곳에 찾아와서 강의를 해주곤 했다. 그렇게 2년간을 열심히 다녀 농업 준기사 자격증을 받았다.

일을 잘 한다는 좋은 평가도 받았고 일정한 관리자로 그리고 기술자로 일 하게 되었지만 차별과 감시를 받는다는 생각은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직접적으로 당한 것은 없었지만 뒤에서 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일도 잘하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노력한다고들 겉으로는 얘기하지만, 안전부나 보위부 같은 사람들은 항상 내 속내를 알아보고 싶어 안달이었다.

당 일군이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모른다고 그들이 내 마음을 다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래서 나도 그 놈들한테 속을 다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북에 있는 자식들은 아예 대학에 가는 꿈조차 꿀 수 없었다.

북한에 있으면서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간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했다. 사시사철 손에서 일을 놓기가 힘들었고 열흘에 한 번씩 쉬는 날이 있다고 해도 쉬는 날에는 텃밭 가꾸고, 김매고 하느라 너무 힘들었다. 여자들은 열흘 내내 흙 묻은 옷을 손빨래 하느라 온 하루를 보냈다.

가족들에게까지 감시를 받았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가족들에게도 내 마음 속 깊은 얘기를 솔직히 다 말할 수는 없었다. 나도 모르게 남한에 있는 가족들과 부모님 생각이 나 눈물을 흘리면 가족들은 고향생각이 나서 그러는 것이라고 여겼다. 나는 자식들에게 “내가 죽거들랑 내 뼈라도 내 고향에 묻어 다오…”라고 말하곤 했다.

고역과 아픔의 기억들

북한의 농촌에서는 아침 5시에 출근해서 해가 져야 일이 끝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 시간동안 내내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농촌이긴 했지만 식량이 없어서 쥐꼬리만큼 먹기 때문에 서너시간만 삽질하고, 밭, 김을 매고 나면 금방 허기가 졌다. 그리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고역이었다.

도중에 중참이나 간식 같은 것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우리집 형편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기차역마다 굶어 죽은 사람들이 널렸었고, 꽃제비(노숙자)들로 가득했다.

한 번은 회령이라는 곳에 가봤는데 열대여섯 살로 보이는 누나가 힘없이 거리에 쓰러져 있는 아홉 살 쯤으로 보이는 남동생위에 앉은 파리를 쫓아 주는 모습을 목격했다. 오고가는 중국 상인들이 먹을 것을 주길 바라고 앉아 있는 듯 했다. 정말로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이렇게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죽어 가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우리 납북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정원이라고 기관장 했던 사람도 굶어 죽었다. 장례식에 갔더니 동네 사람들이 부인이 먹을 것을 주지 않아 굶어 죽었다고 했다. 식량난이 지속되면서 여성들이 장사를 하는 것은 정부가 그런대로 묵인했지만 남성들이 장사를 하는 것은 정부가 엄격히 통제했다. 그리하여 남성들이 여성의 경제활동에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중국 친척과의 연락

우리 집도 언제 굶어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에 나는 노동연한이 다 되어 정년퇴임을 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집 주변에 텃밭을 가꾸고 거기서 나오는 채소를 팔아 쌀을 사오면서 생계를 근근이 유지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중 94년도에 처음으로 부인이 중국에 있는 친척집을 방문하였다.

부인은 돌아오는 길에 중고 옷이며 신발, 밀가루, 외화 등을 가져와서 중국 친척집 방문은 마른땅에 단비가 내린 것처럼 우리 집 경제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98년에 부인이 다시 중국에 들어갔다가 중국에 있는 친척들에게 내가 한국에 가족이 있다는 말을 했다.

그랬더니 중국친척들이 한국 가족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면서 내가 편지를 쓰면 한국 가족에게 전달해 줄 것이라고 했다. 편지를 보내는 것도 매우 조심스럽고 나름의 작전이 필요했다. 나는 생각 끝에 부인 편에 편지를 보내지 않고 중국친척들을 만나는 대로 조카를 세관으로 내보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세관 앞에서 3일간 조카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2일 만에 세관에 나온 중국친척에게 담배 대 모양으로 된 편지가 들어 있는 담배 곽을 주며 한국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편지에는 “처남한테 편지 받아 봐라, 간단히 내 소식을 전한다. 주문진 누나에게 소식을 알려주라. 소문은 내지 말아다오”라고 적었다.

중국의 조카가 한국과 연락을 한지 이틀 만에 한국에서 전화가 왔고 한국에 있는 우리 형님의 전화를 부인이 중국조카 집에서 받았다.부인은 한국 가족들의 집주소와 전화번호 그리고 현금 200달러를 받아 돌아왔다.

한국 가족과의 연락, 그리고 탈북

그렇게 한국가족들과 연락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만에 하나 한국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이웃들이나 보위부원들이 알게 되면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가족과 연락을 다시 주고받은 이후로 한국에서 보낸 편지도 받았다. 편지를 받자마자 읽어 볼 새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한국에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때가 2000년 이었다.

한국 가족은 그때부터 납북자 가족회와 함께 나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그 후로는 나를 한국으로 인도하려는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 겁이 나고 무서워서 어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급기야는 북한의 보위부원이 쌀을 가지고 아예 우리 집에 살림을 차리고 우리 가족과 함께 먹고 자기에 이르렀다. 나는 당 일군을 찾아 갔다. “나를 왜 감시하나? 탈북 안할 거다. 감시 시키지 말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 이후로는 보위부 감시원이 집을 떠났고 한동안 감시망도 주춤해 지는 듯 했다. 이때 한국에서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이 왔다. 나는 그 사람과 내가 미리 생각해두었던 장소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 사람이 나와 함께 떠나면 분명 동네에 감시하는 눈이 많아 금방 보위부에 알려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그 사람을 만나러 가면서 가족들에게 “누가 물어 보면 내가 시장에 갔다고 해라. 만약에 내일에도 물어 보면 마찬가지로 시장에 갔다고 해라”라고 입단속을 시켰다.

나를 인도하러 온 사람은 국경경비대에 돈을 주면서 중국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시간까지 약속 하고 나와 함께 국경을 넘었다. 중국에 처음 도착했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가능한 빨리 한국영사관으로 가야했다.

국경 근처에서 몇 일간 숨어 지내다가 연길로 가던 중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한시가 급했다. 나는 급한 응급처치만 받고 병원을 나와 선양에 있는 한국총영사관으로 들어갔다. 2007년 1월 16일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내 고향 대한민국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가족들과 재회하였다.

출처 : 북한인권시민연합 https://kor.nkhumanrights.or.kr/mai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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