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1일 일요일

“중국이 낙원인줄 알았더니, 한국은 천당이었다”

‘인민의 낙원’인줄 알았던 북한

나는 지금 한국에 입국해 자유를 누리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상이 모두 북한과 같은 줄 알았다. 그나마 북한에서 밥술이나 먹던 시절에는 우리 집이 제일 잘 사는 줄 알았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북한이 지금처럼 어려운 건 아니었다. 나는 77년에 당에서 주는 선물용 교복을 처음 받아 입었다. 인민학교(지금의 소학교)에 다니면서 돈만 있으면 사탕이나 과자 같은 것을 사먹기도 했다. 당시에는 물건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인민반으로 공급해주는 체계에서 형편 없이 부족하진 않았다.

중학교부터는 온 가족이 아버지를 따라 함흥에 올라가 살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가 승진하여 구역 00공장 지배인으로 승진한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가족은 비교적 풍족하게 살았다. 그러나 대학을 마치고 직장생활, 그리고 보위부 등을 거치는 과정에 90년대 중반의 ‘고난의 행군’도 맞게 되었다. 그 과정에 나는 여러 곡절을 겪으면서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다 경험했다.

내가 북한에 살면서 느낀 가장 큰 실망은 “김정일이 있는 한 대책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우리가 굶어야 하는지, 우리 나라(조선)가 왜 지지리도 가난해야 하는지를 알아도 말할 곳이 없었다. 아무리 살자고 발버둥쳐도 희망이 없었다.

그리고 체제의 폐쇄성은 인간의 창의력과 자유의 욕구를 말살시키고 있다. 우리만 굶고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당연히 체제를 반대하려고 애썼겠지만, 외부 세계의 정보를 접할 수 없어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었던 것이다.

북한에 있을 때 회령과 혜산을 다니면서 장사를 하고 살아 내 딴에는 중국을 안다고 자부했다. 국경지역 도시로 볼 때 제일 큰 도시가 중국 단동이 대표적이지만, 함경남도에 살고 있던 나는 신의주에 별로 다니지 않았다. 그냥 육안으로 중국물건을 보고 중국이 발전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도시와 농촌이 그렇게 발전했을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두만강을 넘어서 깜짝 놀랐고,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는 뒤로 자빠질 만큼 놀랐다. 그야말로 내가 그리던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었다. 바깥세상의 판사를 모르니 내가 밥술이나 먹고, 생활이 순탄했다면 탈북도 하지 않고 거기서 모여 살았을 것이다. 나의 생애에 가장 큰 시련이었던 ‘고난의 행군’이 없었다면 나는 중국을 몰랐을 것이고 또 한국이 천당이라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대학생은 우리학급에서 3명뿐이었다”

함흥기에 내가 사는 동네 자체가 집안이 괜찮고 배급도 잘 받던 사람들이다. 부유한 친구들끼리 성천강에 피크닉을 가는 경우도 있었다. 친구들끼리 조금씩 돈을 모아 고기, 빵, 그리고 술도 몇 병들고 강변에 소풍을 갔는데,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며 즐겁게 놀기도 했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북한에는 대학이 몇 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학에 온 학생들은 대부분이 아버지가 간부이거나, 공부를 아주 잘하는 수재들이었다. 고등중학교 때 성적이 좋았던 난 평양에서 명문에 해당하는 김책공업대학에 입학했다. 30명 학급에서 나와 2명만이 대학에 추천받았다. 그만큼 대학에 가는 사람이 적고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나의 대학 입학은 말 그대로 경사였다.

북한은 출신 성분과 토대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다. 성적이 좋아도 토대나 성분이 좋지 못하면 명문대학에 갈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고등중학교를 30명이 졸업하면 20명 정도는 군대에 갔고 그 외 노동자 집안이나 장애인 친구들은 농장이나 공장에 보내졌다. 당시 난 성분도 좋고 공부도 잘했기에 북한 최고 명문대학 중 하나에 입학할 수 있었다.

북한에는 대학생이 적다. 대부분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군대로 나간다. 철없던 시절에는 군대 나갔다 들어와야 사람구실을 한다고 저마다 젊은 학생들이 10년 군대복무를 하게 된다.

이것 또한 청년들속에 ‘조국통일은 청년들의 신성한 의무’라는 사회교양이 있어 저마다 군대 가겠다고 뒷돈을 고이던 시기였다. 왜냐면 군대 나가야 노동당에 입당하고, 대학을 다니고 사람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남한 청년들에게 10년 군대를 가라고 하면 아마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나는 지금 내가 10년 동안의 군대복무를 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북한에서 대학생이 적고, 대학간 사람을 일단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군대를 의무화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김책공업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가지 않았다. 대학에 가있는 동안 함흥에 내려오면 아버지 친구나 어머니 친구들, 직장 사람들이 모두 찾아와 부러워했다.

“함흥내기와 평양 딸은 결혼 안돼”

나는 평양에 배치 받기 위해 노력했다. 대학기간에 중앙의 간부자녀와 결혼을 하면 평양에 얼마든지 거주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평양에 배치를 받아야 했다. 예전 같으면 김책공대만 나오면 자동적으로 중앙당과 중앙기관에 배치를 받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경쟁률이 높아 지방으로 내려가야 한다.

나는 우리 학급에 곱게(이쁘게) 생긴 한 여성과 사귀기 시작했다. 그녀는 당중앙위원회 부부장의 자녀였다. 원래 공부를 잘해 학급의 수석이었던 나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나는 일요일이면 그와 대동강반에 산보(데이트)를 나가든가, 아니면 도서관에서 책을 보았다. 대학도서관에는 아는 학생들이 많아 인민대학습당이나 구역 도서관에 가군 했다.

대학 전과목을 최우등의 성적을 받은 나는 졸업을 앞두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빽이 없으면 평양에 배치 받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 여성과 사귀고 있었고 그와 결혼약속까지 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아버지에게 부탁해 평양에 좀 배치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배치문제는 걱정 말라며 아버지의 제자가 대학 간부과장(인사과장)이라고 귀띔해주었다. 북한의 대학은 국가가 공부를 시켜주었기 때문에 국가에서 배치해주는 곳에 무조건 가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자가 울면서 나를 찾아왔다. 부모님께 우리이야기를 꺼냈더니 당장 그만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녀의 어머니가 아주 보수적이었는데, 자기가 외무성에 있는 젊은 외교관과 이미 딸의 장래를 약속했다며 견결히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나와 결혼을 하지 못하면 자기는 죽어버리겠다면서 출가했다. 그의 속심을 알게 된 여자쪽 부모들은 내가 포기하지 않으면 당장 ‘조기연애’로 몰아 퇴학시키겠다고 을러멨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여성과 갈라졌고, 꿈에도 그리던 평양에서 나의 과학연구를 계속할 꿈을 접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계급신분에 따라 차별하는 북한제도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부모가 점 찍은 사람은 외교관이었고, 나는 장차 발전하면 대학교수에 미치는 직업이다.

남한에서는 대학교수가 엄청 권위 있는 직업이지만, 북한에서는 인테리들에 대한 대우가 한심했다.

그 여자와 갈라진 후 나는 훗날에야 친구들을 통해 그 어머니가 나를 왜 싫어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평양 외화상점 책임자였던 그의 어머니는 달러나 엔을 많이 다루었다. 달러를 풍족하게 쓰는 사람들은 대체로 외교관들이었다. 그들이 외국에 나가면 달러로 결재를 하기 때문에 월급을 달러로 받군했다.

어느 외무성의 간부를 통해 한 외교관을 소개받은 그의 어머니는 그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하라고 강요했다. 남자가 성공하면 외국에도 나갈 수 있으니 그때는 딸도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에서 교수나 하고 책에 파묻혀 있으면 외국에도 못나가고 쥐꼬리 월급을 받으면서 고생스럽게 산다는 것이다. 더욱이 내가 평양사람이 아니라 함흥사람이라는 것이 나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원래 평양사람과 함흥사람들의 차별이 강해 평양사람들은 “함흥사람과 결혼하려면 내 집에서 나가라”고 혹대하던 시절이었다.

풍요로웠지만, 외로웠던 시절

나는 김일성이 사망하기 전까지 배급을 받으면서 괜찮게 살았다. 더욱이 아버지가 간부여서 우리 집안은 먹는 문제는 걱정이 없었다.

대학을 졸업해서도 나는 그 이후 탄탄대로를 밟아나갔다. 김책공대를 졸업한 나는 전력부분(한국 전력에 해당)에서 일했는데 대우나 보수가 꽤 괜찮았다. 내가 하는 일은 전력을 허가 없이 쓰는 공장과 가정집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당시 사상이 투철했던 나는 국가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

약 3년 간 도 전력부에 있다가 보안성에 입대하게 되었다. 보안성에 들어가 일하기 시작하자, 자연히 친구들과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감시하는 직책에 있었기에 사람들과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당시 보안성은 북한 주민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 시기는 풍족하면서도 외로운 시절이었다. 사람들의 따돌림 아닌 따돌림을 받으면서 친구 관계는 단절됐다. 술을 마셔도 동료들끼리 마셨고, 모임을 해도 우리끼리 했다. 진정한 친구는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곳에서 모든 사람은 경쟁 상대 밖에 되지 않았다.

외롭지만 내 삶은 그렇게 이어졌다. 보위부란 울타리 안에서 난 내부의 사람들과만 어울렸고 외부의 사람을 감시하며 살아갔다. 외로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돈에 쪼들리기 시작했던 96년, 날개 없이 추락하던 날들

대학생활까지 잘 나가던 내 인생이 달라진 것은 1994년 이후부터였다. 90년대 중반 아버지가 당비서의 간계에 걸려 떨어진(좌천된) 것이다. 당시 북한에는 물건이 부족한 반면 수요가 많아서 공장의 물건을 빼내다 팔아 사리를 채우는 행위가 늘어나 당비서와 지배인 사이에 암투가 많았다. 아버지가 그런 일에 연루된 것이었다. 공장 지배인과 당비서 사이에서 벌어진 권력다툼에서 아버지는 밀려 나셨고 결국 일을 그만두시고 말았다.

그 때가 96년도였다. 이 때부터 내 인생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돈에 쪼들리기 시작했고 배고픔을 느끼기 시작했다. 여전히 직장에 다니고 있었지만, 전력난 이후 도시조차 불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던 시절에 내가 아버지를 부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때부터 내 투철했던 사상은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이후 98년도에는 직장을 그만두고 장사길에 나서게 되었다. 조금 가지고 시작했던 돈은 굴릴 줄 몰라 계속 사기 당했고, 까먹게 되었다. 장사를 하는 과정에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었고, 굶은 죽는 사람들을 내 눈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세상의 부조리와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최하층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면서 배고픔을 알게 됐고 죽을 먹게 됐다. 내 삶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꼈고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을 회의하는 시기가 이 때였다. 하루 하루 먹고 살기가 벅차던 때에 왜 이 세상을 사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한 생이 허무하게 그냥 지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변화가 필요했다.

99년에 이르러 우리 집안은 완전히 파산하고 말았다. 계속해서 어려워지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드디어 이런 순간이 왔구나 싶었다. 소규모로 장사를 하다가 밑천까지 말아 먹고 말았다. 우리 집안은 어쩌면 초기 고난의 행군시기 죽은 300만 주민들 중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99년도에는 산에 나무하러 가신 아버지께서 촉한(찬 기운에 몸져 누움)을 앓으셔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너무 굶고 지친 탓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간 후에 외아들로써 가장의 역할을 맡은 나는 뭘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부터 북한 체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될 때는 금방 지나갈 줄로만 알았던 그 굶주림, 가난이 일시적인 걸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 이 나라는 희망이 없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됐다. 나라가 멸망하면 출세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진로조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에게 여비를 주었던 소꿉친구

그 때, 내가 밑바닥 인생으로 추락했을 때에 날 도와준 친구가 있었다. 당시 장사를 하고 있던 내 친구 영수였다. 영수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였다. 강변에 나가 같이 목욕하고 놀던 친구였고, 같이 학교에서 공부하던 친구였다. 고등중학교 때 한 반에서 6년 동안 생활하며 싸울 때도 같이 싸워주던 친구였다.

그러나 그는 가족이 신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나와 어릴 적 친구로 같이 컸다. 그러나 내가 대학갈 때는 서로 길이 달라졌다. 그는 머리가 좋아 어느 전문대에 갔다가 배가 고프고 집안 생활이 어려워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때부터 영수는 돈에 원한이 맺혀 가족 생계를 위해 장사를 했다. 고철과 시멘트 등 고물을 팔아 살아갔는데, 남한으로 치자면 고물 장수에 속했다.

내가 바닥으로 추락했다는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영수가 나를 찾아주었다. 사실 보위부에 다닐 때만해도 그는 나와 별로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보위부에서 제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정말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몇 년 만에 만나는 진정한 친구였다. 다시 만난 영수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보위부에서 제대된 후 나를 찾아와 준 것 자체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랬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에서 전직 보위부 소속이었던 날 믿어준 것 자체가 감동이었다.

영수는 내 현실과 내 고민을 말없이 들어줬다. 내가 체험한 부조리한 현실을 모두 토로했다. 보위부에 있는 동안 쌓인 외로움이 치료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그 동안 못한 이야기들로 밤을 지새웠다.

그 때 중국에 대한 소식을 듣기 시작했다. 뭔가 희망이 보이는 나라, 먹는 문제로 고민하는 일은 없는 나라라는 말이 내 귓전을 때렸다. 그 때 영수와 헤어지면서 난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날 거라고 말했다. 당시 난 탈북을 계획하고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짜고 있던 중이었다. 너무나 위험한 상황이어서 탈북할 거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먼 길을 떠나고자 했더니 친구는 그 때 1000원이란 돈을 빌려줬다. 쌀 1kg이 100원하던 시절이었다. 없는 살림에 그만한 여비를 보태준 친구는 내게 있어서 은인이였다. 노동력을 팔아서 먹고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결국 1999년 초 한겨울에 두만강을 넘었다.

소꿉친구 영수가 나를 죽음에서 구해주다

내가 중국에서 잡혀 나온 것이 2002년 8월이었다. 반죽음이 되어 나온 나는 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수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고철장사와 시멘트 장사를 하여 적지 않은 돈을 벌어 살고 있었다. 그는 내가 불과 5년 전 만해도 보위부 군복을 입고 다닐 때 서먹서먹했던 사이었으나, 지금은 그가 나를 동정하는 것이었다.

사람의 일이란 이렇게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자기 주머니에서 돈 천원을 내놓으며, 우리 어머니에게 “이 돈으로 성재에게 닭곰을 해주세요. 몸보신을 시켜야지 이대로 두면 설사를 하고 죽는다. 그리고 처음부터 많이 먹이지 마세요”라고 몸 치료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도 외화벌이를 한다고 장사하다가 먼저 감옥에 갔다 온 사람이어서 방법을 잘 알았다. 나는 그때에야 비로서 진정한 친구가 뭔지 알았다. 사람이 처지가 달라지면 어긋나는 것이 친구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영수는 내가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들어가도, 그 감옥에서 나와도 만날 수 있을 만한 친구였다.

서서히 나는 감옥에 들어가 잃었던 것들을 되찾았다. 밑바닥 인생을 경험하면서 고등중학교 때 잃었던 친구를 다시 찾았고, 북한을 나와서 세계의 현실에 대해서 바로 눈을 떴다. 옛날 날 가뒀던 사상을 이제는 깨고 일어났다. 옛날의 모습은 이제 내게 없다.

북한에는 이미 2002년 7월1일에 7.1경제개선조치라는 것이 실시된 이후여서 시장의 물건값이 오르고 사람들이 장사하느라 벅적이었다. 7.1조치는 시장 합법화를 주 골자로 하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기대가 정말로 컸다. 뭔가 바뀌리라는 생각을 가졌고, 북한도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졌다. 중국에서 하도 고생을 했기에 집으로 무사히 돌아간 이후에는 절대 다시 중국을 가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북한의 현실이 또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경제개선조치도 북한을 그렇게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몸치료를 끝내고 다시 직장에 취직했다. 첫 월급이 3천원이었는데, 장마당 쌀 가격은 1kg이 500원 가량 하는 것이었다.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플레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돈 있는 사람들은 돈이 돈을 낳는다고 잘 살았고 돈 없는 사람들은 치솟는 물가 앞에 입만 벌리고 있었다.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직장에서 하는 일도 엉망이었다. 전봇대를 세우는 일이었다. 기계를 쓰지 않고 삽질을 해가며 땅을 파는데, 비만 오면 원상태로 돌아갔다. 너무나도 허무했다.

실망스런 경제조치, 북한에서는 희망이 없어

희망을 잃은 나는 결국 중국으로 탈출을 다시 시도했다. 중국으로 가서 연길을 떠돌며 선교사를 만나려고 시도했지만 단속이 심해서 그런지 누구도 만날 수가 없었다. 알던 인맥은 모두 끊겨버렸다.

그렇게 다니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 결국은 한 한국사람으로부터 인터넷 사용을 알게 되었고, 한 메일을 통해 인맥을 찾을 수 있었다. 2002년도 10월에 한국에 나온 탈북자들의 도움으로 선교단체를 알게 되었고, 지금 다니는 교회의 도움으로 결국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결국은 그렇게 갈망하던 자유를 찾는데 성공할 수가 있었다. 한국에 와서야 이제 자유를 좀 느끼면서 살고 있다. 북한은 고향이었지만 체제가 나를 옥죄었고, 먹고 살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중국은 먹고 살만하긴 했으나 불법 체류자 신분은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이렇게 내가 알에서 깨어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간이란 그 둘러싸인 환경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지 실감을 한다. 북한이 지금까지도 단단한 이유는 그 오랜 시간에 걸친 사상 교육 때문임을 난 안다.

하지만 난 그 알을 깨고 나왔다. 북한의 인민 대다수도 지금 현재 이런 시기를 겪고 있을 것이다. 현실이 썩을 대로 썩었기에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난 이런 사람들이 모여 북한이 바뀌기를 소망한다.

이 대한민국의 자유가 북한에도 있기를 소망한다. 언젠가 통일될 날을 기대하며, 나는 그 때를 준비하려고 한다. 북한 인권이 개선되기를, 탈북자의 한 사람으로서 열심으로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의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부조리한 현실이 무너지길 바란다. 그 날이 오면, 나를 도와준 친구 영수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에 내가 맨 처음 들어가 만날 친구는 바로 영수다. 영수가 준 여비로 이렇게 남한까지 왔다. 영수는 자기의 도움이 이렇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꼭 만나서, 도와주고 싶다. 이번에는 내가 그를 도와줘야 할 차례다.

박성재(탈북자) / 2003년 입국

0 개의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