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0일 토요일

남조선이 한국인줄 모른채 요덕수용소 수감생활

(편집자) ‘요덕도 가로막지 못한 가족의 끈’은 북한에서 태어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탈북했지만 중국에서 북송당해 요덕 수용소에 갇혔던 이금란 동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요덕 수용소에서 힘든 생활을 이겨낸 후 아버지와 함께 다시 탈북했다. 그 후 중국, 필리핀을 거친 고행 끝에 어머니와 재회할 수 있었다. 인간애을 찾기 힘든 공간인 수용소에서 모진 생활을 보내고도 여전히 가족에 대한 강한 믿음을 지니고 있는 이금란 동포의 이야기를 전한다.

북한에서의 생활

나는 6형제(4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께서 기관사셨기 때문에 유복했던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기억해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 형편은 넉넉한 편이었다. 사탕 같은 물건도 집에서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버지 인맥 덕분에 학교 졸업하고 처녀 때 철도 교환수 일을 6년 동안 할 수 있었다. 철도 교환수는 북한 각 철도를 전화로 연결하는 일을 한다. 북한에서는 괜찮은 직업이었고 나 또한 그 일에 만족했다. 무엇보다도 여자가 하기에는 좋은 직업이었다.

대학은 다니지 않았었다. 원래는 군대를 갈까 생각했었지만,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갈 수가 없었다. 미공급시기가 되면서부터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살기 힘들어진 현실을 등에 얹고 28살에 늦게 결혼했다.

남편은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국당간부가 소개해준 부모 없는 남자였고, 직업은 돌격대 소대장이었다. 북한에는 결혼하는 딸에게 접시며 여러 가지를 보자기에 넣어서 보내는 풍습이 있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장녀였기 때문에 시집갈 때 정말 신경써서 잘 챙겨 주셨다.

나는 결혼 이후 8개월 쯤 지나 임신을 했다. 임신 후 남편은 강원도로 일하러 갔다. 아이를 낳아도 남편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아마 남편은 엄마가 시집갈 때 챙겨준 그 보따리 때문에 미공급시기에도 잘 살았을 것이다.

얼마 후 아이가 태어났지만, 아이에게 먹일 음식은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시래기 물을 먹이거나 통강냉이를 조금 얻어 와 주고는 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소화불량에 걸려 버렸다.

하지만 아이에게 포도당 주사를 놔줄 돈이 없었다. 결국 내 옷을 다 팔아서 사탕가루를 사서 나오는데 어머니가 아이는 놓아두고 보따리만 들고 나에게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가 죽은 것이었다. 그렇게 1년 만에 자식을 잃고 말았다. 그 때가 1997년도였다. 아이를 잃고 다음 해 탈북을 위해 강을 건넜다.

흩어진 가족,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가다

현재 우리가족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한국으로 나왔다. 내가 제일 마지막에 아버지를 모시고 나왔다. 우리 가족들이 한국에서 다시 만나기까지는 정말로 힘겨운 시간을 버텨야 했다.

김일성이 사망하고, 미공급시기가 온 후부터 식량 사정이 곤란해지니까 가족이 뿔뿔이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넘어갔고, 연변 조선족 자치구에 있는 용정에서 우리는 만날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돼지 키우는 집에서 6개월간 있다가 연변 과학연구소에서 일한다는 조선족 남자와 결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자신은 다른 지역으로 연수를 가기 때문에 나에게 더 이상 같이 살지 말고 나가라고 했다.

그렇게 3년을 산 뒤 나는 조양촌 이라는 곳으로 다시 시집을 갔다. 그 곳에서는 1년간 머물렀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먼저 한국으로 떠나고 내가 뒤따라갔다. 그렇게 어머니는 우리 가족 중 가장 먼저 2002년에 한국으로 갔다. 조양촌을 나선지 반 년 만에, 나는 중국의 내몽골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우리는 한국으로 가기위해 창고 같은 방에서 8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중국 공안들이 방으로 들이 닥치는 바람에 전부 한 번에 잡혔다. 아마 미행이 붙었던 것 같다. 중국 공안들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들어왔는가?”, “왜 내몽골까지 들어왔는가?”, “누구를 통해서 들어왔는가?” 라며 계속해서 똑같은 것만 물어보았다.

한족들은 내가 중국말을 할 수 있으니까 자꾸 나에게만 물어봤다. 그러나 나는 한족 말을 잘 알지 못했다. 그 후 몇일 뒤 기차타고 도문변방으로 가서 또다시 10일 간 취조를 받았다. 도문변방에서도 내몽골에서 붙잡혔을 때와 똑같은 질문만 계속 했다. 그러나 도문변방에서 취급 받을 때는 나무각자로 다리를 많이 맞았다.

방마다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우리 방에만 200명 정도가 있었다. 우리 방에 노부부가 같이 있었는데, 할머니 상태가 좋지 않아 계속 출혈을 했다. 그러나 북한으로 넘어갈 때 할머니가 피를 흘리는데도 질질 끌어서 할머니를 트랙터에 태워서 갔고,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할아버지는 참지 못하고 우셨다.

그래도 도문변방에서는 할머니께서 약이라도 드실 수 있었지 북한에서는 개 취급을 당했다. 그 할머니는 이틀 후 돌아가셨다. 나는 도문변방에서 10일이 지난 후 버스타고 북한으로 끌려갔다.

도문변방에서 버스를 타고 북한으로 넘어갈 때 거의 700명 정도가 함께 갔다. 그 당시는 사스(SARS) 때문에 평상시에 비해 북한으로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버스 안에서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북한으로 넘어가서는 모두 온성구류장에 집결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그 곳에는 사람이 몇 백 명 정도 있었다. 도착 후에는 모두 무릎 꿇고 앉아서 대기했다. 너무 덥고, 바닥에는 이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온성군 호송원들이 나와서 우리를 인계받았다.

여성들은 여성 간수가 받아서 따로 모두 집결시켰다. 그들은 우리를 구류장으로 끌고 온 다음 옷을 다 벗겨 뽐뿌질 시키고, 머릿속, 심지어 자궁까지 다 뒤졌다. 그들은 “야이 간나, 돈 있는 거 솔직하게 다 말해라!”라고 윽박을 질렀다. 일주일간 취조 받다가 중국에서 같이 지내던 8명 중 한 명에게서 성경책이 나와 처음부터 다시 취조 받았다.

복도에서 아침 5시부터 밤 10시까지 무릎 꿇고 앉아 취조 받았는데, 너무 힘들었다. 그 때문에 지금도 허리, 다리를 잘 못 쓴다. 취조 받는 중에 나는 너무 맞아서 까무러치기도 했다. 아무데나 다 때렸는데 그때 맞은 머리가 아직도 아프다.

그들은 같은 질문을 계속 반복했다. 그들은 우리 가족들 중 엄마랑 남동생도 중국에 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너무 힘들었지만 가족들보다 내가 잡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재수사가 내려와서 다시 취조를 받았다. 결국엔 “다신 이런 일을 안 하고 교화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이제 다 조사했으니까 혁명화로 보낼지 말지를 결정할 테니 여기서 대기하라고만 했다. 나는 내가 요덕수용소로 가게 될지 몰랐다.


요덕수용소로 가다

그렇게 심한 취조를 받은 지 3개월 후에 그들이 옷을 주어서 나는 내가 사회로 살아나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는 중국으로 도망가지 않도록 개조하러 간다고 하며 나를 끌고 나가면서 “가서 일 잘하고, 생활 잘하고 오라”는 말까지 했다.

어둠이 내리는 저녁에 나를 지프차에 태우고 달리고, 또 3시간 동안 산골로 들어갔는데, 그렇게 간 곳이 바로 요덕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곳이 요덕인줄도 몰랐고 요덕에 15호 관리소가 있는 지도 몰랐다. 관리소의 정치부장이 나에게 대뜸 왜 여기에 들어왔냐고 세차게 물으며 “남조선 가지고 했지? 남조선이 잘 사는 것 몰랐나!”하면서 소리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그 때 잘사는 ‘한국’과 내가 아는 ‘남조선’이 같은 나라인지도 몰랐다. 정치부장은 이어서 “너 머리 깨끗이 개조될 때까지 여기서 생활해”라고 면박을 주었다. 그렇게 외래에서 일주일 생활하다가 투입되었다. 내가 그 당시 잘 걷지를 못해서 잠시 요양을 취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수용소에서의 생활

여자들은 3중대에 배치되었는데 모두 20명이었다. 하는 일은 주로 콩, 강냉이, 호박과 같은 작물을 심는 농사일을 했는데, 겨울에는 산에 가서 특별히 통나무 해오는 일을 하기도 했는데 6미터 길이의 거대한 통나무를 끌고 가는 일은 너무 힘들었다.

여름에는 아침에 5시 군대식으로 기상해서 체조 10분, 마당청소 10분, 세수 10분을 하고 30분 간 아침을 먹은 후에 일하는 현장으로 뛰어서 간다. 식사는 강냉이 죽밥이랑 염장배추나 무, 염장 배춧국 등이었는데 일의 할당량을 다 채우지 못하면 죽밥을 절반 뚝 잘라서 줬다.

계획대로 목표량을 달성해야지만 멀건 죽밥을 다 먹울 수 있었다. 오전 10시쯤 돼서 딱 10분 휴식하고, 다시 12시까지 일한 다음, 30분 점심시간 후 5분 쉬다가 1시에 작업을 나갔다. 그렇게 저녁 8시 30분까지 일했다.

겨울의 일과도 여름과 비슷했지만 아침 6시 기상, 일하러 나가는 시간이 아침 7시, 저녁에는 6시에 일을 마친다는 것이 달랐다. 노동 후에는 씻고, 7시부터는 학습, 생활총화, 9시에는 모여서 인원을 점검하고 10시에 취침이다.

여름에는 9시 점검 끝나고 11시까지 도라지랑 더덕을 산에 가서 캐 와야 했다. 새끼줄도 꼬고 지게를 엮고, 만들고 그렇게 하루 계획을 모두 수행해야만 1시든, 2시든 잠을 잘 수 있었다. 될 수 있으면 우리를 재우지 않고 일을 시켰다.

그러다 보니 죽는 사람도 참 많았다. 그것도 양반인 것이 구류장에 갇혀 판결받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는 다 떨어진 식기에 마시는 죽 같은 것을 주었는데 수저조차도 없어 그릇을 입에 대고 마셔야 했다. 먹을 것이 부실하다보니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 모두 극도로 허약해졌다.

나도 원래 몸무게인 53킬로그램에서 무려 10킬로그램이나 빠져 44킬로그램이었다. 그러다 보니 휘청거리며 제대로 걷지를 못해 맥없이 쓰러지곤 했다. 남자들 같은 경우는 맥이 없어 제대로 일을 못하니 매일 구타당했다. 그들은 설사병에 걸려도 개처럼 현장에 나가서 일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불쌍한 그들을 동정할 수 있는 권리조차 없었다. 동정하는 기색을 보이면 구류장으로 끌려간다. 갑자기 모두를 모이게 하더니 지프차에 태워서 대상자들을 데려간다. 그 사람들은 우리는 몰라도, 수용소에 있는 스파이들한테 걸려서 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으며, 구류장을 나올 때 까지 볼 수가 없었다. 구류장에 끌려갔다가 한 달 동안 갇혀 있으면 영영 못나오는 신세가 되어 거의 죽게된다. 언젠가 2명이 구류장에서 탈출하다가 일주일 만에 잡혀서 공개적으로 총살 처형을 당한 일도 있었다.

수용소에 갇힌 모든 이들에게 본보기로 다 보여줬다. 그런 마음 아픈 광경을 본 날은 모든 것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연민을 표현할 수도 없었기에 속으로만 마음 아파했다. 그렇게 속앓이를 하며 지내던 중 교회 다니던 사람을 만났는데, 내게 한 주일에 성경 구절을 하나씩 외우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며 추천해주었다.

사도신경만 속으로 암송하면서 엄마한테 보내달라고 기도했다. 돌이켜 보건데 그런 바람이 통해서인지 지금 대한민국까지 무사히 왔고 너무 감사한다.

첫 해에는 통나무 끌다가 다리를 다쳐서 석 달 동안 외래에 있었다. 그렇다고 해봐야 치료하는 것은 없고 그냥 안정만 취할 수 있었다. 처음 수용소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아버지가 주신 비누를 사용했는데, 수용소에서 주는 것은 새까만 비누에 거품도 나지 않는 것이었다.

생리대 같은 물품은 없었다. 2달만 생리를 했었는데 내 옷을 찢어 생리대처럼 사용했다. 한국에 와서도 2년 동안 생리를 안 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갇혀 있던 여자 두 명이 임신 했었다. 소대마다 창고 정리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임신되었다.

어떻게 임신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남녀가 신기하게 만나서 임신이 되었다. 태어난 아이는 안타깝게도 낳아서 산에다 묻었다. 아이의 엄마아빠는 죽이지는 않았고 6개월씩 수용소 구류 연장만 했다. 나는 2003년 5월에 들어가 2006년 5월에 나왔다.

일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눈이 펑펑 내리고 키만큼 쌓이는 산에 가서 나무 해오던 일이 생각난다. 눈 때문에 미끄러운데 산도 아주 험한 산이다 보니 걷지도 못하고 눈에 구르면서 갔었다. 내려올 때는 굴러서 울면서 내려왔다.

나무를 제대로 해오지 못한 남자들은 숙소 안에서 정말 많이 맞았는데, 우리도 맞을까봐 떨고 있었는데, 다행히 여자들은 때리지 않았다. 내가 있던 곳은 아이들은 없었고 군대 탈영하고 붙잡혀 온 20대가 가장 어린 아이들이었다.

나오기 일주일 전부터는 선생이 “밖에 안 내보내고 구내(생활하는 곳에서 헐한 일 한다)에서 일을 시켜 이제 집에 갈 때가 되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5월 30일, 안전원이 나를 불러 호송하더니 온성군 보위부까지 데려가 그곳에 인계했고, 내 동생이 온성보위부에 와서 나를 인계한다는 담보서를 써서 수용소 밖의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7인 탈북자 강제송환사건의 동포들에 관하여

나는 요덕에서 ‘7인 탈북자 강제송환사건’의 당사자 들을 만났었다. 은철이(김은철)와 허영일이라는 사람을 안다. 내가 요덕에 들어가고, 은철이가 6월에 퇴소했다. 그리고 허영일이라는 사람은 같이 일하면서 알게되었다.

수용소 안에는 여자가 총 20명, 남자가 총 180명 정도 있는데, 남녀 간에 거리는 두지만 일을 하다가 이야기 정도는 나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러시아에서 잡혀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요덕 수용소에 나보다 일 년 먼저 들어왔으며 내가 기억하는 허영일은 키는 보통에,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안타깝게도 허영일의 처는 요덕에서 죽었다.

(7인 탈북자 강제송환사건에 대한 간략한 소개 (편집자)

북한 인권문제의 심각성과 탈북난민의 인권보호를 위해서 국제적 협력 메커니즘 구축의 필요성을 절감케 한 사건이다. 1999년 겨울(11월) 중국에서 러시아로 국경을 넘어 온 허영일, 방영실, 리동명, 장호영, 김광호, 김성일, 김은철 총 7명의 탈북 동포들이 러시아 연해주 국경 수비대에 체포되었다.

이에 북한인권시민연합과 국제사회의 노력으로 유엔난민기구(UNHCR)가 체포된 7명을 난민으로 인정하였다. 그들에게서 제 3국행 희망의사를 확인하였고 러시아로부터 출국비자를 받아 한국행을 확정짓는 듯하였다. 그러나 1999년 12월 30일, 러시아는 탈북자 7인을 중국으로 돌려보낸 후에야 한국 총영사관에 이와 같은 사실을 통보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한 러시아 대사는 러시아 법률에 의해 불법 월경자는 국경을 넘어온 국가로 다시 돌려보내야 하고, 러-중 국경을 탈북자들이 한국행 루트로 이용하는 선례를 남길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후 7인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북한으로 송환되지 않도록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는 중국 장쩌민 주석에게 호소문을 보내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했으나 2000년 1월 12일 중국정부는 탈북자 7명 전원을 북한으로 강제 송환시켰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으로부터 송환된 인원은 7명이 아닌 6명이며, 그 중 허영일, 방영실 부부는 함경북도의 한 창고를 털고 불을 질러 국가에 10억원의 손실을 끼친 죄로 각각 9년, 5년에 해당하는 노동 교화형을 내린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연 단위 국제 사회의 대북원조 규모와 맞먹는 가치의 창고가 함경북도에 있을 리 없다는 점에서 북한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그 외 나머지 네 명에 대해서는 그냥 풀어주었다 하였으나 북한은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이 사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의 필요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였다. 마침내 2002년, 2005년에 걸쳐 다른 탈북 동포들의 증언을 통해 북한 당국이 훈방했다던 4명을 포함, 7명 전원이 북한의 주장과 다르게 완전통제구역이나 요덕 수용소에 수감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한국에 오기까지

앞에서 말했지만 수용소 안전원이 나를 온성군 보위부까지 데려갔고, 내 동생이 온성보위부에 와서 나를 인계한다는 담보를 쓰고 나서야 사회로 나올 수 있었다. 나는 수용소를 나올 때부터 북한을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했다. 다시는 중국에 가지 않는다는 담보를 했지만 보위부원들도 나를 계속 감시했다.

요덕 수용소에서 사회로 나왔다고 해도 형편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밑천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사회에서 장사도 못하고, 그저 아버지랑 남동생이랑 농사를 지으며 근근히 살았다. 결국 나는 어머니(2002년에 이미 한국에 계셨음)의 연락을 받고 3개월 후 다시 도강했다.

이웃이 어머니한테서 연락이 왔다고 계속 받아보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미행인줄 알고 절대 받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받아보라고 권해 마지못해 받았는데 정말 내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한국까지 오는 길을 안내해 주었지만 나는 선뜻 결정할 수가 없었다.

이미 한번 수용소에 갔다 왔기 때문에 잡히면 무조건 총살이었다. 그러나 용기를 내 도강하기로 결정했다. 아버지와 함께 떠났다. 회령 학포를 통해 국경을 넘었다. 학포를 건너니 도와주기로 한 사람이 강 건너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국경을 넘고 중국에 도착해서는 안면이 있는 친척 언니 집에 있었다.

그다음 위조여권을 이용하여 북경 영사관으로 들어갔다. 한국까지 오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영사관에 들어가서 얼굴을 보니 말이 아니었다. 6개월 후 나는 아버지와 같이 한국으로 갈 수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필리핀에 도착한 다음 그 곳에서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나는 공항에 도착했을 때를 잊을 수가 없다. 처음에는 중국보다 못 사는 나라인 줄 알았는데 공항에 내리니까, ‘정말 이런 곳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침 하나원에 사람이 너무 많고, 내 경우에는 먼저 온 가족이 있다 보니 일주일 만에 하나원에서 조기 퇴소 할 수 있었다.

퇴소 후 어머니를 만나니까 그동안 하도 울어 눈물이 말라 울음도 안 나왔다. 어머니께서도 내가 잡혀갔을 때 눈도 안 보일 정도로 눈물을 많이 흘리셨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67세의 환갑이 훨씬 넘은 나이에 다리가 좋지 못하신 상태셨다.

이제 한국에 온지 6년이 되었다. 비록 지금까지 요덕 수용소에서 겪은 고초 때문에 전신이 아파 병원에 다니며 일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천사같은 아들이 있다. 요즘은 아들 키우는 재미에 빠져 지낸다. 나에게 이런 소소한 행복을 깨우치게 해준 한국, 나는 한국에 온 걸 후회하지 않는다.

출처 : 북한인권시민연합  www.nkhumanright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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