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5일 금요일

동방정교회 소개- 서문

무명한것 같으나 유명한.(고린도후서 6장 9절)

 러시아 신학자 알렉시스 콤미아코프는 1846년 한 영국인 친구에게 보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모든 개신교도들은 숨어 있는 교황주의자이다.’ ‘ .... 정확한 대수학언어를 사용하면, 모든 서구인들은 단지 하나의 기지수인 a만을 알고 있다.

whether it be preceded by the positive sign+, as with the Romanists, or with the negative-, as with the Protestants, the a remains the same. Now a passage to Orthodoxy seems indeed like an apostasy from the past, from its science, creed, and life.(로마 가톨릭주의자들에 의해서 처럼 긍정적인 표시+(플러스)에 의해 선행되든지, 개신교들에 의해서 처럼 부정적인 표시-(마이너스)에 선행되든지, 이 a는 동일하게 존속한다. 이제 동방정교회에 대한 논쟁은 진실로 과거로부터 그리고 그것의 과학, 신조 그리고 삶으로부터 하나의 배교처럼 보인다.)

 동방정교회는 새롭고 잘알려지지 않은 세계로 달려가고 있다.’  콤미아코프가 기지수 a를 이야기 했을때, 그는 자유교회(Free Church:개신교(역자주)), 성공회 혹은 로마 가톨릭이든지 서방기독교인들은 과거에 공통된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였다. 그들이 항상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서로 똑같이 동일한 사건들, 예를 들면 중세시대의 교황 중심주의와 스콜라주의, 인문주의,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등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동방정교회의 회원들-그리스인, 러시아인 그리고 그 나머지-뒤에는 매우 상이한 배경들이 놓여져있다. 그들은 서방적 의미의 중세를 알지 못하며,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단지 16, 17세기 서유럽을 변형시킨 문화적 종교적 격변에 의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서방의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도들은 비록 그 대답에 있어서는 불일치할지라도, 일반적으로 동일한 문제들을 질문함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동방정교회에서는 그 대답들이 다를 뿐만아니라, 그 문제들 자체도 서방처럼 동일하지 않다. 동방정교회인들은 역사를 다른 전망에서 본다. 예를들어 서방의 종교적 논쟁에 대한 동방정교회인들의 태도를 생각해 보자. 서방에서는 일반적으로 로마가톨릭주의와 개신교주의를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동방정교회인에게 그들은 동일한 동전의 양면으로 나타난다. 콤미아코프는 교황을 ‘첫번째 개신교도’, ‘독일 합리주의의 아버지’로 부른다. 그리고 그는 동일한 동전으로 인하여 의심할 바 없이 기독교 학자를 괴짜의 로마 카톨릭교인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1847년 옥스포드를 방문하여 한 고교회 성공회원으로부터 ‘어떻게 우리가 개신교주의의 유해한 영향들을 저지할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받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당신의 로마 가톨릭주의를 떨어버리시요’ 러시아 신학자의 눈에 이 둘은 손을 맞잡고 가고 있었다. 개신교주의는 로마 가톨릭이 낳은 달걀로부터 부화하였기 때문에, 양자는 똑같이 동일한 전제들을 공유하였다.

‘새롭고 잘알려지지 않은 세계’ 콤미아코프가 이런 방식으로 동방을 말한 것은 옳았다. 동방은 교황없는 일종의 로마 가톨릭주의가 아니라, 서방에 있는 종교적 체계와 상당히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 ‘잘 알려지지 않은 세계’를 가까이 서 보는 사람들은 그 안에 다양하지만 이상하게 친밀한 많은 것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항상 믿어 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부분적으로 정당하다. 이러한 말은 동방정교회와 그들의 가르침에 관하여 보다 충분히 배우자 마자 나타난 여러사람들의 반응이다. 900년 이상 동방의 그리스와 서방의 라틴은 각자 자신의 방식을 따라, 서로 떨어져서 착실하게 성장해 왔다.

그러나 기독교세계(Christendom)의 처음 세기들 속에서 양측은 공통의 배경을 발견할수 있다. 아타나시우스와 바질은 동방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서방에 속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영국, 아일랜드에서 산 동방정교회인들은 그들의 관점에서 그들 땅의 민족적 성자들-알반(Alban)과 패트릭(Patrick), 쿠트베르트(Cuthbert)와 베드(Bede), 파리의 제네비에브(Genevieve)와 캔터베리의 어거스틴(Augustine)-을 이방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교회의 구성원들로서 볼수 있다. 모든 유럽은 오늘날 그리스와 러시아가 그런것 처럼 옛날에는 많은 부분이 동방이었다.

콤미아코프가 1846년 그의 편지를 썼을때, 사실상 양측에는 개인적 접촉으로 서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싼 가격에 구입할수 있는 원고들을 찾아서 1830년대에 레반트를 걸쳐 여행하고 있던 로버트 쿠르존(R. Curzon)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캔터베리의 대주교를 들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당황하였다. 상황들은 확실히 그때 이후로 변화하였다. 여행은 비교가 안되게 쉬어졌고, 물리적 장애들은 제거되었다. 그리고 여행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서방세계의 시민은 직접 동방정교회를 관찰하기 위하여 더이상 자신의 나라를 떠날 필요가 없다. 특선품과 경제적 필요로 서방쪽으로 여행하는 그리스인들과 박해에 의해 서방쪽으로 내몰린 슬라브인들은 그들과 더불어 그들의 교회를 가져왔고, 전유럽,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에 걸쳐 주교관구와 교구망, 신학대학과 수도원들을 세웠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가시적 일치를 위한 강력하고도 전례없는 열망이 현 세대의 수많은 여러 기독교단체들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방정교회내에서 새로운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서방 기독교인들이 재연합을 위한 그들의 관심속에서 동방의 적절성을 의식하게 되고, 그것에 관해 더 배우기를 갈망하는 순간에, 그리스-러시아 디아스포라들은 전세계에 흩어졌다. 연합을 위한 논의에서 동방정교회의 기여는 종종 예기치 않게 밝게 빛나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정확히 동방은 서방과는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신선한 사고의 지평을 열수가 있고, 오래된 어려움들에 대하여 오랫동안 잊혀진 해결책들을 제안할수 있다.

기독교세계에 대한 그들의 개념이 캔터베리, 제네바 그리고 로마에 제한되어 있지 않는 사람들을 서방은 결코 결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과거에 이러한 인물들은 광야에서 우는 소리였다. 서방은 이제 더이상 그렇지 않다. 9세기 이상 지속된 소외의 결과들은 빠르게 풀려질수는 없지만 적어도 시작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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